수파산(壽坡山) 자락에 남은
“서원(西園)의 마지막 수계원(修契員)”
글쓴이:조장빈
북한산의 동문(洞門)인 우이동에서 백운대를 보면, 우이능선이
살짝 감싸 돌아 산자락에 포근히 자리한 듯 보이고 하루재를 넘어 보는 인수봉의 동남면도 그리 위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수산장 터에서 왼쪽으로 돌아들면, 고개를 바짝 쳐들어 바윗길을
가늠해 보아야 하고 산그림자가 드리워 조금은 낯선데, 산의 북벽이다.
건너편 노고산정에서 보면, 숨겨진 정인봉이며 인수와 백운대에서 내린 암릉이 거칠게 굽이쳐
산의 처음 모습이 그대로인 듯하다.
암릉이 숲으로 숨어들어 나지막한 동산을 이루는데 아래서 보면 홀로
우뚝하니 수파산(壽坡山)이다. 수파산은
고양시 북한산 자락으로 효자비가 세워진 마을의 봉우리로 장수를 기원하는 산명이다. 이 산자락에 인왕산
호랑이가 등을 내주었던 효자 박태성과 그의 부친 묘소가 있다. <존재집(存齋集)>에 시묘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기이한 새가
날아와 가지에 앉아 함께 곡하였고 밤새도록 북한산 호랑이가 어르렁 거리며 효자를 지켜주었다 한다.
그의 증손인 존재(存齋) 박윤묵(朴允墨, 1771~1849)이 말년에 이곳 추원재(追遠齋)에 거처했는데, 그는 송석원시사회의
막내로 인왕산 자락에서 벌어진 ‘백전(白戰)’의 추억을
간직한 노시인이다. 간간히 옥동을 찾을 땐, 중흥사를 거쳐
문수사에서 보현봉 자락으로 난 길로 사자항(獅項)을 내렸다. 푸른 노을, 붉은 기운의 가을빛이 감도는 길에 누런 잎
붉은 단풍이 갠 날을 희롱하면, 학발노인(鶴髮老人)은 낭랑하게
시를 읊으며 능선을 내렸으니 산아래 이요동(二樂洞)의 여기각(如斯閣)에서는 신선이 내려오는 줄 알았겠다.
扶病楓壇獨自登, 병든 몸으로 楓壇을 혼자 스스로 오르니
泉鳴石竇尙淸澄. 돌구멍에서 나는 샘의
물소리는 오히려 선명하도다.
林間好是歸來客, 숲 사이에서 마치 손님들
돌아오는 것 같고
物外依然過去僧. 속세 밖에서 의연히 스님이
지나쳐 가네.
岸樹靑蒼交落落, 언덕의 나무 푸르고 푸르러
서로 축축 늘어졌으며
巖花紅紫出層層. 바위의 꽃 붉고 붉어
겹겹이 피었네.
眼看物色雖如昨, 눈으로 풍경을 보나 어제와
비슷하거늘
哭送當時幾友朋. 울면서 송별할 때에 친구들을
자세히 살펴보네.
가을이면 풍단의 후학들 시회에 참여하여 장혼이 직접 벽에 새긴 아름다운 네 글자를 보고 회한에 젖기도 했다.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 손수 함을 터니 먼지만 책상에 쌓인다. 몸은
늘어진 매화와 같이 늘어지고 쇠약해졌으나 정신은 아직 돌과 같이 창창하다.
송석원시사회의 시종을 보았고 계회가 다시 육각현의 서원시사로 이어진 세월을 보낸 마지막 남은
시인은, 그 날 꿈 속에 서산의 산안개가 옥동을 올라 백설령을 타고 넘어 환하게 드러난 송석원 터에서 먼저 간 수계원들의 모습을 보았을 터이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부분
천수경 : 인왕산의 소나무 같은 자태 돌 같은 풍골로 서사풍류의 주인이 되었네
김낙서 : 다섯 수레의 글을 읽어 이미 일가를 이루어 시단의 우러름. 그
기폭이 기울었네
장 혼 : 가슴엔 천고를 가득
품고 세상을 휘젓는 고담, 칼날과 같네
이의수 : 고금신서
옥촉에 읽지만 가난한 이 마음에 실은 사랑 누가 알리요
김태욱 : 아끼는
건 금준에 가득한 술 뿐 취해 통곡하며 긴 노래 부르네
왕 태 : 흰 머리 짧은 옷으로 돌아 오던 날 두고 간 초가는 옛과 같네
노윤적 : 종이 잡고 시 한수 이르니 메아리 같아 각촉하여 재촉할 것도 없네
수파산 자락의 박윤묵은 삶을 초연하게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73세(1843년)로 죽기 6년 전에 쓴 시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낮이
되고 밤이 되는 것과 같다.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반드시 밤이 있다. 이러한 생기의 왕성함은 다함이 없으며 대자연의 이치이다.(중략) 사람의 죽음과 삶도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살면 산 것이요, 죽으면 죽은 것이지 반드시 구차하게 삶에 묶일
것도 없고 죽음을 공허해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일절 모든 것이 천명이라고 들을 뿐이다.”
<존재미필(存齋美筆)첩(帖)>-출처:이택용의 e야기
첩제 그대로 이렇게 수려한 필(筆)이 있다니.
----------------------------------------------------------------------
*참조:한국고전종합D/B, 존재 박윤묵의 한시
연구, 임승낙, 2016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즐겁게 감상합니다.
보통은 약간 북쪽으로 더 가서 찍은 사진이 많은 것 같은데, 산의 뷰포인트를 잘 잡으셧네요.
글도 유려하니 아름답고요.
맨 아래, 존재미필첩.. 글씨 정말 멋있네요.
무슨 글자인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