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리스에 내달 총선을 실시할 때 유로존 탈퇴에 관한 국민투표를 동시에 진행할 것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1 그리스 총리실은 지난 18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리스에 내달 총선을 실시할 때 유로존 탈퇴에 관한 국민투표를 동시에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독일 주간 슈피겔도 메르켈 독일 총리가 카롤로스 파풀리아스 그리스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다음달 17일 2차 총선과 함께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요구했다고 확인했다.
이 제안에 대해 보수.진보를 막론한 그리스 정당들은 '주권 침해'라고 반발했다. 보수 계열로 지난 2일 총선에서 1당을 차지한 신민당 당수 안토니스 사마라스는 "메르켈의 제안은 유감스럽게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으며, 2당인 '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당수는 "메르켈이 그리스를 피보호국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내정간섭을 넘어 사실상 그리스 국민에 대한 협박에 가까운 독일의 국민투표 요구 파문이 확산되자 독일 총리실은 '오해'라며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했고, 독일의 정부 대변인은 "사적 통화로 보도 내용이 부정확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긴축정책에 반대하면서도 유로존 잔류를 원하는 그리스 여론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이같은 독일의 인식은 유럽 선진국 전반의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다. 실제 로랑 파비위스 프랑스 외무장관도 지난 21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리스가 유로존 잔류를 원한다면 투표로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25일자 슈피겔은 메르켈 총리가 그리스 재건 방안으로 사회주의 붕괴 후 옛 동독에 적용했던 구조조정 패키지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패키지에는 국유기업 민영화, 경제특구 건설, 노동시장 개혁, 청년 직업훈련 활성화 등이 포함돼 있다. 국유기업 민영화는 사회주의 붕괴 후 동.서독 통일 때 동독의 자산을 매각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특별기구를 구성해 진행한다. 당시 동독에서 8500개 국유기업을 매각했던 방식을 모방한 것이다.
한마디로 구제금융 대가로 요구하는 재정긴축도 거부하는 마당에 이보다 강도가 높은 노동시장 개혁과 국유기업 민영화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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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총재는 26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인들이 언제든지 탈세하려 든다는 걸 잘 안다"며 "그리스인은 세금을 납부해 스스로 도와 일어서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책상을 나눠쓰고 교실이 모자라 하루 2시간만 공부하는 어린애들이 그리스 사람보다 더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지난 26일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에 대해 강경발언을 쏟아냈다. 라가르드 총재는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조건을 완화할 의도가 전혀 없다"며 "절대 무리한 게 아니다. 그게 IMF가 하는 일이고 나의 업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그리스인들은 세금을 내야한다"며 "긴축 재정으로 공공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으나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라가르드 총재는 "그리스인들이 언제든지 탈세하려 든다는 걸 잘 안다"며 "그리스인은 세금을 납부해 스스로 도와 일어서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책상을 나눠쓰고 교실이 모자라 하루 2시간만 공부하는 어린애들이 그리스 사람보다 더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라가르드의 이 발언에 대해 그리스 제3당인 사회당 당수이자 4월까지 재무장관을 지낸 에반겔로스 베니젤로스 당수는 "라가르드가 그리스를 모욕했다"고 비판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시리자 당수도 "그리스인은 세금을 낸다"면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분개했다.
영국의 권위있는 정치주간지 '뉴스테이츠맨'은 27일 "라가르드 총재가 세계경제의 0.5%도 안되는 그리스 일국의 탈세 문제를 세계경제의 원흉으로 몰았다"며 "머리를 모래에 쳐박은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 잡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한 국가의 국민들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 더 비참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무시해도 좋다는 식의 교활한 발상"이라며 "프랑스를 60년만에 최고수준의 재정적자국으로 만든 전직 프랑스 재무장관이자, 두 건의 금융 사기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있으며, 열대지방에서 선탠을 하고 무거운 보석들과 맞춤형 양장을 입은 라가르드가 할 말은 아니"라고 비꼬았다.
논란이 확산되자 라가르드 총재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밝혔듯이 나는 그리스 국민과 그들이 직면한 도전에 매우 연민을 느낀다"면서 한발 물러섰다. 이에 대해 치프라스 '시리자' 당수는 "그리스는 라가르드의 연민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그리스 노동자들은 매우 무거운 세금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치프라스 당수는 "탈세에 대해서라면 라가르드 총재가 그리스 집권연정이었던 사회당-신민당에 '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던 대기업과 부자들을 건드리지 않고 지난 2년간 노동자들의 세금만 올려왔느냐'라고 물어야 할 것"이라고 반문했다.
라가르드 IMF총재의 발언은 "그리스는 실패한 부패 국가"라는 위르겐 퓌첸 도이체방크 회장의 말은 그리스에 대한 유럽 부국들의 시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요컨대 유럽 선진국 관리들은 그리스의 민주주의나 그리스 국민까지 무시하면서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긴축을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3 지난 1998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야 센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강요된 긴축정책이 "유럽이 지난 수십년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한 민주적인 유럽이라는 최우선을 가치들과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아마르티야 센 교수는 지난 23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유럽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는 말처럼 유럽 관료들의 부적절한 정책 처방이 유럽과 세계경제를 비참함, 혼돈,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유로 통화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긴축정책이 필요하다는 모델은 인과관계도 없고 현명하지 않은 주장이다. 설사 긴축정책의 의도가 타당하고 효과적이라고 해도 그게 과연 유럽의 근본적인 우선순위를 도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한 민주적인 유럽'을 유지하는 게 유럽의 최우선 순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가치들은 유럽이 지난 수십년간 지키기 위해 싸워온 것들이다.
물론 일부 유럽 국가들은 더 나은 경제적 성과를 원해 왔으며, 경제운용에 책임감을 가져야 하지만, 지금처럼 급조된 극단적인 방식의 개혁과 잘 고안된 시간표에 따른 개혁은 구별돼야 한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개혁이 대규모 실업과 생산 감소를 야기하는 야만적인 공공서비스 감축과 같은 일방적으로 강제되는 방식은 옳지 않다. 2차대전 이후 전후복구 과정이나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 등 역사적으로 봐도 효과적으로 재정적자를 줄이려면 적절한 긴축과 함께 빠른 경제성장이 수반돼야 한다.
아마도 현재 유럽이 직면한 문제의 가장 걱정스러운 대목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도출돼야 할 정책결정 과정이 유럽연합(EU)과 유럽중앙은행(ECB) 관리들과 신용평가사 등 금융 독재자들로 대체됐다는 사실이다.
유럽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회생할 수 없다. 첫째로 여론 수렴이나 시민들의 동의 없이 전문가들의 일방적인 관점이나 선의에 유럽을 맡길 수는 없다. 둘째로 정치 지도자들이 강요하는 비효율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정책이 추진될 때 민주주의나 좋은 정책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금까지 강요된 긴축정책의 명백한 실패는 시민들의 참여도 없었고, 효과적으로 작동할 가능성 마저 약화시켰다. 이는 유럽 통합의 선구자들이 추구해 온 '통합된 민주적인 유럽'의 가치와 한참 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