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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8일 [연중 제32주일]
복음: 마태오 25,1-13
지옥까지 가겠다고?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 말씀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는 지금 심판에 관한 복음이 나오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가 준비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얻는 방식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꾸준해야 합니다.
사막 달리기 대회에서 가끔 탈수로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규칙적으로 물을 마셔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마를 때 물을 마시려고 하면 늦습니다.
아플 때 치료하려고 하면 늦는 것과 같습니다.
연료가 다 떨어져 도로에 섰을 때 기름을 넣으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지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쉬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름을 넣으려고 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천국으로 들어가는 현명한 처녀들의 오늘 행동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기름이 떨어진 동료들에게 자신의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행동입니다.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라도 좀 나누어주어 다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면 좋은 일 아닐까요?
기름을 좀 나누어달라는 동료들에게 현명한 처녀들은 이렇게 모질게 말합니다.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현명한 처녀들이 기름을 나누어주어도 기름이 모자라게 될 것이란 확신은 없습니다.
다만 추측으로 그럴 것 같아서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천국으로 들어갈 사람의 자세일까요?
어떤 유명한 스님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랬습니다.
“나는 신이라는 존재가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놓고, 자기는 천국에서 잘 살고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을 모른 체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신이라면 지옥으로 가서라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데려오겠습니다.”
불교에는 ‘지장보살’이 있습니다.
그는 부처가 될 수 있음에도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까지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원한 보살입니다.
그 스님은 이런 것이 사랑이지 지옥을 만들어놓고 그들을 내버려 두는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불교에서는 모기도 조상으로 봅니다.
그러면 모기를 구제하기 위해 모기떼 가운데 가서 뜯기고 있을 스님이 있습니까?
혹은 뱀이 득실대는 곳에서 교화하려는 스님이 있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기가 회개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모기보다 더 그 본성이 모기다워진 지옥의 영혼들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명한 처녀들이 등잔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잘한 일입니다.
자칫 자신의 등잔이 꺼지면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가 되면 나누어주고, 어느 정도가 되면 상대가 지옥에 가더라도 나누어주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상에서 유다를 가차 없이 죄를 짓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거기까지가 그분이 기름을 나누어주실 수 있는 한계였습니다.
우리는 이 한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강의 부탁을 많이 받아서 강의를 많이 하다가 지쳐버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가면 안 됩니다.
이는 수영도 못 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결국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살겠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영화 ‘그랑 블루’(1988)는 프리다이빙을 하는 엔조와 자크, 그리고 돌고래와 바다, 또 자크를 사랑한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엔조와 자크는 친구 사이지만 또한 누가 산소통 없이 가장 깊이 내려갈 수 있는지를 겨루는 경쟁 관계기도 합니다.
자크는 특별한 폐를 가지고 있고 특별히 돌고래와의 소통이 마치 가족과 같습니다.
이 와중에 자크를 사랑하게 된 조안나가 등장합니다.
조안나는 자크를 사랑하지만, 자크는 자신보다 바다와 돌고래를 더 좋아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다와 돌고래와 함께 하는 시간의 1/10 정도만 자신과 함께 하는 자크를 몇 번이고 떠나고 싶지만, 임신까지 합니다.
엔조와 자크의 경쟁에서 엔조는 경쟁심을 못 이기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자크도 무언가 찾기 위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조안나는 자신에게 아기가 있다고 말립니다. 하지만 자크는 막무가내입니다.
결국, 자크는 밤 속 깊고 어두운 곳에서 돌고래의 인도를 따라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립니다.
이야기는 엔조와 자크가 무언가 고향을 찾은 느낌을 주지만 혼자 남겨지는 엔조의 어머니와 임신한 자크의 애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자크는 물속 깊은 곳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 물에 들어가면 항상 나와야 하는 더 큰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자신의 아기를 가진 자신만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사랑보다
물속의 돌고래가 더 좋다면 그 물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지옥에 떨어진 내 친족이 더 좋으면 자신도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이것 때문에 현명한 처녀들은 남은 기름을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음입니다.
저는 대죄를 짓지 않을 정도의 기도시간을 찾아냈습니다.
세 시간 정도는 기도해야 알고 짓는 죄를 간신히 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소 기도시간이고 이것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더 많은 영혼에 도움을 줄 힘이 된다는 것도 압니다.
내가 어느 정도의 기름까지 내어줄 수 있는지 알려면
기도를 통해 죄를 이겨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최소량의 기름의 양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나누어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명한 처녀는 규칙적인 기도를 할 뿐 아니라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되는 그 기도시간도 명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8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마태오 25,1-13
성인(聖人)이란?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세번째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는 교황님께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신 ‘성덕(聖德)에로의 초대장’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성덕’과 관련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핵심 정신인 ‘보편적 성화’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강조하셨습니다.
“성인(聖人)의 길은 주교나 사제, 수도자의 전유물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건조하고 평범한 신앙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성인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덕이란 예수 그리스도 삶의 신비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특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친밀성, 그분의 가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께서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시는 평신도들께 아주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내고 계십니다.
성인이 되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각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각자에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자 고유한 벙법으로 성덕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길입니다.
최선을 다해 도마질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방법에 따라 정성껏 지지고 볶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흡족해하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요리의 달인’이 되는 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거기다 조금 더 보탠다면, 요리할 때 억지로, 짜증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환하고 기쁜 얼굴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드는 요리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요리하고 계신다면 그는 이미 훌륭한 성인 후보자입니다.
저는 가끔씩 우리 형제들 가운데, 성인 후보자가 있을까?
싶어서 형제들을 살펴봅니다.
정말 깜짝 놀란 일은?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몇명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은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늘 자주 차 한잔 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완전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대신 그들은 우리 보다 조금 더 기도에 집중했던 사람들,
그래서 우리보다 조금 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긴 호흡을 지녔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겸손했고, 우리보다 조금 더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1월8일 [연중 제32주일]
오늘 복음을 보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가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하고 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은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빛’의 나라의 ‘문’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혀들고 혼인예복을 입어야 한다(마태 22,11-14). 이 때문에 전례주년 마지막 세 주간의 전례는 신자들에게 항구하게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예수님과 더불어 ‘마지막’ 때가 왔다.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종말론’은 시작되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종말론적’ 기다림 속에 잠겨있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의 비유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는 이러한 기다림의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체에 있어야 하는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으로 신랑을 예우하는 역할을 했던 열 명의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이다(1-4절). 이야기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던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비교이다(6-12절).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등불을 계속 켤 수 있는 기름을 따로 준비하고, 그것이 열 처녀 모두에게는 부족한 양이라는 이유로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다(9절). 실제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나 남에게나 해를 끼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는 처녀들 모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신랑이 늦게 오는 바람에 모든 처녀들은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리고 몇몇 처녀들은 결정적인 방심을 한다. 또한 ‘슬기로운’ 처녀들까지도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모습은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고, 나중의 자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등잔불 기름은 준비해야 하지만, 곧 당도할 것 같지 않은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평온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상황, 즉 초대 교회 시대에 열화와 같던 기다림의 열망이 누그러져 이천여 년 간 교회가 처해오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자세를 잊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평온하게’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그분이 언제 오시든지 더 기다릴 수 있는 기름이 잘 준비된 ‘등불’을 밝혀 들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현실에 열심히 참여하며 현실 도피적이거나 터무니없는 교설이나 몽상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를 충실히 삶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적 삶의 의무에 대해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서도 슬기로움과 미련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행하려고 하는 자세’이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태 7,24-27).
이 비유에서는 종말론적 전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슬기’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 ‘슬기’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목적이 달성되도록 행동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주님, 주님”만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가 없다.
즉 켜진 등불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여정을 위해 충분히 마련된 기름인 사랑의 행위가 필요하다. 행동으로 실천되고 깨어 기다림의 자세로 표현되는 사랑에 관한 주제가 이 비유 전체에 ‘혼인’의 개념을 주축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신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지만,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들이라는 개념 자체에 포함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돌아오심을 혼인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당신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기쁨과 사랑의 표징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혼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기다려야 한다. 당황하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어야지 두려움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두려움을 영원히 몰아내셨기 때문이다(1요한 4,18).
그러므로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13절)는 말씀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 삶으로써 언제라도 당신이 원하실 때,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뵈올 때, 그분께 합당한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산다면 그분이 ‘한밤중에’ 오시더라도 대낮같이 그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등불이 환히 켜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2독서: 1데살 4,13-18: 부활의 희망과 구원
사도 바오로도 우리를 이러한 평온한 기다림의 자세로 이끌어준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모두가 살아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그분을 고대하였지만(1데살 1,10),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 슬픔에 잠겼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상기시킨다. 가)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13절), 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담보이다(14절), 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사람들과 살아 있게 될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더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15-17절). 여기서 ‘살아있는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17절; 15절도 참조)의 의미는 그들 모두가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살아있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대목의 메시지는 ‘위로’(18절)부터의 메시지요, ‘희망’(13절)의 메시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 신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정적인 영광의 만남이기 때문이고, 둘째, 신자들의 공동체는 죽음 뒤에 다시 모여 부활의 기쁨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17절)이다. ‘교회’는 이 지상생활을 넘어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18절).
바오로 사도께서도 항상 신비에 싸여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고 쓸데없는 불안과 지나친 두려움을 제지시키고 있다. 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있지는 못하더라도 다섯 처녀들처럼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슬기로움’이다. 이러한 ‘슬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분은 그것을 제1독서가 말하듯이(지혜 6,12-16 참조), 그것을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주 기꺼이 나누어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오시더라도 기쁨 중에 혼인의 만남과 같이 맞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결실을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