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유표(經世遺表) 15권 夏官(병조)修制 武科
*선생은 무과(武科)의 개선책으로 많은 부분을 제시했지만, 무과 선발인원, 시험과목, 시험방법 등이 눈에 띈다.
선발인원은 각도와 대과에서 급제시키는 정원, 기타 별시(別試)에서 뽑는 인원이 있다.
우선 각도에서 뽑는 정원이 문과와 같이 서북지역 도(道)의 정원이 삼남의 절반이 안 되는데, 문과는 그렇다치더라도 무과는 용맹하고 강한 서북지방 사람들의 장점을 살려서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하였다.
식년 대과 정원은, 문과는 33명인데 무과는 28명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국가 경사에 베푸는 별시의 무과 급제자는 천명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래서 무과 급제자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그런데 거꾸로 등용되어 출세하는 무관은 별시에서 쉽게 붙은 중앙의 문벌귀족에게 돌아가고, 어렵게 붙은 식년시 무과급제자는 평생 별 볼일 없이 지낸다는 것이다. 당연히 식년시 무과 급제자의 정원 늘리고 이들이 모두 관직에 나가도록 해야한다고 한다.
시험과목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일반교양과목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국조보감(國朝寶鑑)》 등 국사(國史)와, 실무이론에서 《비어고(備禦考)》와 같은 우리나라의 실재 전쟁사에서 전략을 검토하는 과목을 넣는 것이다.
시험방법은 일반교양, 무예(武藝) 실기, 실무이론 등을 다 하되, 일반교양 시험은 간결하게 하고, 무예 실기의 경우 날짜를 3일로 한정하지 말고 충실하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도시(회시)를 볼 때는 무예 실기를 중심으로 하고, 실무이론을 없애서 경화자제들이 유리하게 되지 않도록 하였다.
무과 선거법도 모두 문과와 같으나 오직 12성(省)에서 선거하는 정원(定員)은 많이 다르다.
원제에 “무과 식년 초시의 정원은 서울과 지방이 모두 190명인데,[경기 70명, 경상도 30명, 충청도와 전라도는 각 25명, 강원‧황해‧함경‧평안도는 각 10명] 회시(會試)에서 28명을 뽑는다.” 했다.
○신은 삼가 생각합니다.
문과 정원은 문풍의 우열(優劣)을 따지는 것이므로 삼남(三南)에는 많고 서북도(西北道)에는 적게 함이 오히려 가하나, 무력(武力)‧궁마(弓馬)에 대한 재주는 서북 지방이 배나 강한데도 무과 정원마저 삼남이 많으니, 신은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국가는 모든 백성을 한결같이 보아 지공무사(至公無私)해야 하는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고르지 못한 정사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재목과 힘을 요량해서 서북 지방에 정원을 많이 배정하고 삼남에는 적게 배정함이 마땅합니다만, 지금 갑자기 변경할 수 없으므로 오직 8도 정원을 고르게 해서 차이가 없게 함이 거의 이치에 합당할 듯합니다.
○ 또 생각합니다.
문신은 마음을 다하여 내정을 다스리고 무신은 힘을 다하여 외적을 방어하는 것이니 내정을 다스리는 데는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제어할 수 있거니와, 외적을 막는 데는 반드시 많아야만 형세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문과는 적게 뽑고 무과는 많이 뽑음이 마땅한데, 어찌해서 문과는 33명을 뽑고 무과는 28명을 뽑는 것입니까? 식년‧증광은 정원을 이와 같이 간엄하게 하고 정시‧별시는 그 정원을 저같이 많이 하여, 수백명 뽑는 것을 천과(千科)라 하고 수천 명 뽑는 것을 만과(萬科)라 이르는 것은 또 무슨 법입니까? 그 기예의 어려움과 쉬움이 이미 다르고 그 정원의 많고 적음이 또 현저하게 다르니 벼슬길에 오르는 데도 차별이 있어야 마땅한데, 문벌이 한미한 자는 식년시에서 출신(出身)했으나 적은 녹도 받지 못하여 백수로 그냥 늙고, 세도가 흥성한 자는 만과(萬科)로 출신했건만 큰 깃발을 일찍 세워서 젊은 나이로 등단(登壇)하고 있으니 그 법이 어찌 연유한 데가 없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기를 무과 정식도 문과와 똑같이 해서 식년 회시마다 240명을 뽑아 진무(進武)로 삼고, 이에 지나간 세 차례 방(榜)과 합쳐 도시(都試)를 해서 240명을 뽑고, 또 도회(都會)에 시험해서 40명을 뽑아 급제 출신을 주어서 바로 관직에 제수하는 것을 문과와 같게 해야 합니다. 진무(進武)가 된 자도 사은(謝恩)‧유가(遊街)‧도문(到門)‧소분(掃墳)을 진사(進士)의 예와 같이 하며, 도회로 세 식년의 엄선(嚴選)에 맞먹고, 진무로써 정시의 많음에 맞먹게 해야 합니다. 급제한 자는 한 사람도 관직을 얻지 못함이 없고, 진무된 자는 낙척(落拓)을 스스로 편하게 여겨, 명목과 실제에 어긋남이 없어서 백성의 뜻이 평안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인재를 뽑는 법에 거의 하자가 없을 것입니다.
주시(州試)에 뽑힌 자의 명단을 병마절도사의 영문에 올리면, 향거장(鄕擧場)에 시장(試場)을 개설해서 고강하는데 고관은 절도사와 본성의 수령을 임용해서 세 자리를 갖춘다.
무과는 제 솜씨로 결정되는 것이므로 혐의스러움을 피하지 않는다. 만약 본성에 절도사가 없으면, 순찰사가 고관이 된다.
○고강(考講)은 일경(一經)과 사서(四書)가 두 과목, 3감(鑑) 한 과목, 국사(國史)가 한 과목이다.
(중략)
국사란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국조보감(國朝寶鑑)》인데 그 강독하는 법은 3감과 같다.
고강을 마친 다음 3장을 개설해서 총 아홉 가지 무예를 시험한다.
제1장에서는 철전(鐵箭)‧편전(片箭)‧목전(木箭)을 시험한다.
제2장에서는 관혁(貫革)‧유엽전(柳葉箭)‧조총(鳥銃)을 시험한다.
제3장에서는 기사(騎射)‧기창(騎槍)‧편추(鞭芻)를 시험한다.
그 점수를 계산하는 법은 모두 원전(原典)대로 한다.
3장이 혹 6일도 걸리며 혹은 9일도 걸리니 3일로 한정하면 안 된다.
3장을 마친 다음 또 한 장을 개설해서 진법(陣法)‧병법(兵法)‧무비(武備)를 시험하고 산(算)‧율(律) 두 가지 글을 시강(試講)한다.
진법이란 《병학지남(兵學指南)》(*)이며, 시험하는 법은 한결같이 주(州)의 시험대로 한다.
○병법이란 《손무자(孫武子)》‧《삼략(三略)》이며, 시험하는 법은 한결같이 주시(州試)대로 한다.
○무비(武備)란 우리나라를 방어하는 방책인데. 시험관이 《비어고(備禦考)》에서 한 대문을 뽑아서 묻는데 작은 제목을 내고 모두 붓과 종이를 준 다음, 응시자에게 면전에서 조목조목 대답하게 하며, 글은 100여 자를 넘지 않게 한다.[그 式例는 다음에 있음] 세 시험관이 한 추첨으로 한 문제씩 내는 것은 위의 법과 같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비어고》는 신이 편집한 것인데, 위만(衛滿) 이래로 우리나라에 있었던 모든 전쟁과 정벌을 모아서 한 책을 만들고, 관방(關防)‧기용(器用)에 대한 말과, 국조군제(國朝軍制)의 연혁(沿革)을 덧붙인 것이니, 무사라면 이 글을 강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아직은 이 책이 완성되지 않았다]
○묻고 대답하는 방식이다.
시험관이 묻는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 제독(李如松提督)이 평양 전투에서 한 모퉁이를 풀어서 왜놈들이 달아날 길을 터주었는데, 그 득실이 어떠한가?”
응시자가 답한다. “《손자(孫子)》에 ‘돌아가는 군사를 막지 말고, 포위하는 군사는 반드시 한쪽을 터놓으며, 궁지에 빠진 도적은 다그치지 말라.’라고 했는데 제독이 용병한 법은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왜병이 평양에서 나간 것은 돌아가는 군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장차 황주(黃州)를 도륙하고 개성을 짓밟은 다음 한양에 자리잡으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돌아가는 군사이겠는가? 명나라 군사가 처음 압록강을 건널 적에, 한 부분이 살수(薩水)에서 바다로 들어가서 황해도 여러 군사와 합세하고, 복병(伏兵)으로 그들의 돌아갈 길목을 지키게 하여두고, 그런 다음에 대군(大軍)으로써 평양을 압박하며 한 모서리를 조금 풀었다가 황주에서 쳐부쉈더라면 또한 좋지 않았겠는가?”
산학(算學)과 율학(律學)을 강함에는 산학은 오직 매씨(梅氏)의 글만을 이용하고, 율학은 오직 《대명률(大明律)》만을 강하며,[각각 한 책에 불과하다] 면강(面講)에는 60자를 넘지 않고, 문의(文義)는 다만 한두 조목만을 묻는다.
*병학지남(兵學指南) : 16세기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내용 가운데 조선의 처지에 맞는 군대 훈련법을 간추려 엮은 책이다. 조선에서는 진법(陳法)을 시험하는 능마아강(能麽兒講)이나 병법의 내용을 묻는 여러 시취(試取)에서 이 《병학지남》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이 책은 조선 전술의 근간을 이룬다.
이에 여러 가지 기예의 점수를 통계하여 그 중에서 잘한 자를 뽑아 시험정원을 채워서 조정에 올린다.
서울과 지방에서 회시(會試)에 응시하는 자가 480명인데, 그 반을 뽑아서 진무로 삼는다.
도시(都試)하는 법은 문과 시험과 똑같다. 3소(所)에 나누어 세 가지 기예를 시험하여 240명을 뽑아서 도회(都會)에 응시하도록 한다.
3소로 나누는데 무거원(武擧院)이 1소가 되고, 무장(武場)이[營國圖에 있음] 2소가 되며, 모화관(慕華館)이 3소가 된다. 신‧구방(新舊榜)을 배정하는 법도 모두 문과 시험과 같다.
○고관이 5명인 것도 회시와 같다.
○세 가지 기예에는 첫째 철전, 둘째 관혁, 셋째 기추인데 수일이라야 마치게 된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도시(都試) 세 가지 기예에 진법‧병법‧무비 등 조목이 없는 것은 무과에는 무기(武技)를 주로 하는 것이니, 만약 문자로써 하는 기예가 그 사이에 섞이게 되면 경화(京華) 자제가 도시에 많이 합격하고 먼 지방 재략과 역량 있는 사람은 낙방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어찌 한(恨)이 없겠습니까? 도시란 대‧소과의 중간으로서 그 이해가 매우 긴절하니, 이와 같이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