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나이값'이란 게 있다.
이를테면 나이 열살짜리가 일곱살짜리와 싸운다면 큰아이 한테,
"이놈아 나이값을 해라"라고 하면서 야단을 치는 게 보편적이다.
싸움을 하든, 놀이를 하든간에 나이가 그 격의 기준이 되는 셈이다.
미국 살면서 만났던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을 보면 대부분 한국사람만큼이나
상대의 나이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처음인사를 나눈자리에서 내 나이를 미리 이실직고(?)를 해 버린다.
상대가 괜히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지말라는 배려에서다.
그런데 노인이 욕심을 부린다면 노욕(老慾)이라하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노추(老醜) 혹은 노망(老妄)이라 부른다.
나이란 이렇듯 그에 걸맞는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요구되는 것이다.
세상엔 세월만큼 훌륭한 스승도 없다.
젊어서는 꼬장꼬장했던 사람도 노년에는 대부분 부드러워진다.
그 세월 속에서 내가 터득한 것은
인생에서 인연(因緣)만큼 중요한게 없다는 생각이다.
설령 그게 악연으로 비칠지라도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도 있다.
추미애가 윤석렬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말이다.
박원순에게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는
기발한 조어로 매도한 남인순이 다시 민주당 공천을 받았으며
"암묵적 청탁"이라는 죄명으로 박근혜와 삼성을 엮어서
32년의 구형을 때린 한동훈은 지금 상종가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다.
남에게 억울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그 댓가를 치루게 되는 게 새상의 이치이다.
한국사람들은 쉽게 남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좌파들의 선전선동에 잘 넘어가는 이유는
청중들의 열등감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자극하기 때문에 그렇다.
열등감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일례로 조선의 왕 영조는 자신은 임금이었으나
무수리 출신이었던 모친에 대한 열등의식으로
자신의 식솔들에게 지독한 고통을 주었었다.
요즘 한국은 선거열풍이 부는 것 같다.
행여 선거 유세장에서 가슴이 뛰는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이나 신파극같은 측은지심은 안녕하신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인권, 민주주의, 남북통일을 주장했던 대부분의 인간들이
사기꾼이었다는 것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인권변호사라는 문재인이 20대의 북한 귀순어부를
눈가리고 수갑채워서 판문점에 끌고 간 뉴스를 상고해 보시라.
산천초목을 적시는 봄비에 마음은 그져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3/9/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