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 지노 바탈리 이탈리아를 구한 영웅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1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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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지노 바탈리
이탈리아를 구한 영웅
1948년 투르말레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바탈리의 모습
전쟁이 끝나고 바탈리는 다시 투르에 돌아왔다.
"그는 신입니다"
1938년 투르 드 프랑스의 알프스 구간이 시작된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이탈리아의 지노 바탈리(Gino Bartali)는 앞으로 치고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대회 초기 평지 구간에서 펼쳐진 타임트라이얼에서 선두 선수보다 9분이나 뒤졌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지로 디탈리아의 우승자인 이 젊은 선수는 이탈리아의 희망이었다. 이탈리아 기자들은 조바심이 났고 바탈리가 공격에 나서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뭘 기다리는 거야? 언제 공격하겠다는 거지?"
드디어 바탈리가 알로스의 가파른 오르막에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산 정상에서부터 독주를 펼치더니 이조아드에서 경쟁자들을 다 물리치고 브리앙송에서는 구간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결승선에 도착했을 때 열광적인 팬들이 그를 둘러쌌다. 몰려드는 군중들을 막으면서 이탈리아의 체육장관인 안토넬리(Antonelli)가 외쳤다.
"그를 만지지 말아요. 그는 신입니다."
지노 바탈리는 1935년에 등장해 오랫동안 이탈리아 사이클의 최고 선수로 군림했다. 바탈리는 파우스토 코피와 함께 이탈리아의 사이클을 대표하는 선수다. 바탈리는 인내심이 대단했고 아주 강인한 선수였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자전거를 탔다. 바탈리의 별명은 '독실한 지노(il Pio)'였다. 그는 아주 신앙심이 깊었고 투르 드 프랑스 기간에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미사에 참석했다. 독실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런 바탈리를 무척 좋아했다.
바탈리는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그의 고향에서 열리는 경기에서 아주 무서운 존재였다. 그는 가끔 우승 상금을 받고 1등을 경쟁선수에게 넘겨줬고 그 상금은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바탈리는 20세에 프로 선수가 된 뒤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대회인 지로 디탈리아와 지로 디 롬바르디아에서 우승했다.
1938년 바탈리는 무솔리니로부터 투르 드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위해 이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알프스 산악구간에서 독주를 펼치며 구간우승을 차지했다. 산악에서 그의 적수가 된 선수는 없었다. 그는 브리앙송 구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엘로 저지를 입은 뒤로 파리에 이를 때까지 이를 지켰다. 그리고 그해 종합우승과 산악왕을 차지했다. 국제 사이클 계에서 이탈리아의 지위가 높아졌고 바탈리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됐다.
1940년 지로 디탈리아에서 새로운 챔피언이 등장했다. 그는 다름 아닌 바탈리가 발탁한 파우스토 코피였다. 바탈리는 코피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사이클 대회가 열렸을 때 바탈리와 코피의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코피는 떠오르는 스타였고 바탈리보다 조금 우세했다. 그러나 바탈리는 이런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이탈리아를 구하다
1948년 바탈리는 다시 투르에 돌아왔다. 1938년 투르에서 우승한 지 10년만이었다. 그는 서른네 살이었고 사람들은 그가 너무 늙었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공격을 시도했고 첫 번째 구간에서 이겼다. 그러나 그다음 날부터 흔들리기 시작해 첫 주가 끝났을 때는 프랑스의 루이종 보베보다 종합성적에서 20분이나 뒤지고 있었다.
알프스 구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호텔에서 쉬고 있던 바탈리는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 이탈리아 총리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 지도자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가 파시스트 청년 당원들의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이에 항의하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탈리아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상황이 안 좋아요. 지노,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가스페리가 말했다.
"제가 뭘 할 수 있죠? 저는 프랑스에 있고 당장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바로 그겁니다. 당신은 투르 드 프랑스에서 이기면 돼요. 당신이 이기면 사태가 진정될 겁니다."
"저는 마술사가 아닙니다. 투르는 파리에서 끝나고 아직 경기는 1주일 이상이 남았어요."
"지노, 이건 중요한 일이오.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사람 모두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일이란 말이오."
바탈리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영웅이었고 그가 이긴다면 동포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확산되고 있는 폭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알프스 구간에서 역사적인 세 개 구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남부 알프스에서는 선수들을 모두 박살냈다. 여기서 그는 루이종 보베에게서 18분을 빼앗았고 엘로 저지도 차지했다.
그는 모두 일곱 개 구간에서 우승했다. 마침내 바탈리는 종합성적에서 2위 선수보다 16분이나 앞선 기록으로 투르 드 프랑스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승리 덕분에 이탈리아의 소요사태는 잠잠해졌다. 톨리아티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뒤 처음 한 말은 바로 바탈리에 대한 것이었다.
"바탈리는 어떻게 됐어?"
바탈리가 1948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했을 때 자크 고데 투르 드 프랑스 조직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눈보라와 비와 얼음을 뚫고 바탈리는 먼지를 뒤집어쓴 천사처럼 위풍당당하게 떠올랐다. 그의 옷은 비에 흠뻑 젖었지만 내면에는 챔피언의 고결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명성은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에서 스물한 명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1943년 독일 뮌헨 북서쪽에 있는 다카우(Dachau)의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곳에서는 3만 5천여 명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어느 날 경비병이 피렌체 출신인 안토니오 다비티에게 바탈리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경비병에게 바탈리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러자 그 경비병은 가스실이 아닌 공장으로 보낼 사람 스무 명을 골라 명단을 만들라고 말했다.
사이클의 전설
1949년 바탈리와 코피는 같은 팀 동료로 함께 투르에 출전했지만 두 사람 다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두 챔피언은 자존심 싸움을 벌였고 이탈리아 팀에는 긴장과 불신이 팽배했다. 이탈리아 국가 팀 감독인 알프레도 빈다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알프스 구간에서 '늙은 지노'가 서른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생일날 아침 코피는 바탈리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고 바탈리가 구간 우승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제안했다.
바탈리는 뜻밖의 제의에 깜짝 놀랐다. 그날 코피는 약속을 지켰다. 칸과 브리앙송에 이르는 구간 동안 코피는 앞서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바탈리가 이길 수 있도록 같이 달렸다. 두 이탈리아 챔피언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바탈리는 그다음 구간에서는 코피가 구간우승을 차지하고 종합 우승을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코피는 투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48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한 바탈리
그는 10년 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1952년 투르 드 프랑스에 참가한 지노 바탈리(뒤)와 파우스토 코피(앞)가 경기 중 물을 나눠 마시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탈리와 코피의 경쟁관계는 점차 희미해지고 두 사람은 자전거를 떠나서는 친구가 됐다. 두 사람은 함께 사냥을 즐겼는데 한번은 바탈리가 코피에게 토끼사냥을 하자고 토스카나로 초대했다. 바탈리는 계속 토끼를 잡으면서 좋아했는데 코피는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바탈리는 코피 몰래 숲속에 토끼를 묶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코피는 나중에 속임수를 알고 2년 뒤 바탈리에게 복수했다.
코피는 피에몬테로 바탈리를 초대했다. 아침에 코피는 작은 피아트 승용차를 타고 나타났는데 차 안에는 친구 한 명이 타고 탄약상자와 점심 상자가 실려 있었다. 게다가 커다란 사냥개 세 마리까지 타고 있었다. 바탈리는 개들 때문에 뒷좌석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바탈리는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천국에서 그의 적수였던 코피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농담을 했다.
"나는 지옥이 더 좋아요. 거기에는 언덕이 더 많을 테니까요."
바탈리는 투르 드 프랑스와 지로 디탈리아에서 모두 여덟 번 산악왕을 차지할 정도로 산에서 뛰어난 선수였다. 바탈리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지만 85세까지 살았다. 그는 2000년 피렌체에 있는 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