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 레몽 풀리도 엘로 저지 없는 영광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4. 2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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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자전거 이야기
레몽 풀리도
엘로 저지 없는 영광
풀리도는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선수다.
영원한 2등
프랑스의 레몽 풀리도(Raymond Poulidor)는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이클 선수였다. 사람들이 풀리도를 좋아한 것은 그의 승리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와 불운이 거듭될수록 팬들은 그를 더 좋아했다. 그는 투르 드 프랑스에 열네 번이나 출전해 2위와 3위의 성적으로 모두 여덟 차례나 시상대에 올랐다.
이것은 투르에서 가장 많이 시상대에 선 기록이다. 그러나 그는 잦은 부상과 자전거 고장으로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풀리도는 영원한 2등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승한 선수보다 더 사랑을 받았다. 풀리도에 대한 노래를 작곡했던 프랑스의 대중가수 켄트(Kent)는 풀리도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풀리도는 프랑스 정신을 상징한다. 그는 온통 이기는 데만 전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풀리도는 처음에 챔피언 자크 앙크틸과 대결해 유명해졌다. 나중에는 동료 선수가 이길 수 있도록 사심 없이 도와줬는데 이 일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이클 선수들처럼 풀리도도 시골출신이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장에서 일을 하며 자랐다. 풀리도는 자신이 자란 농촌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아무리 힘든 경기라고 하더라도 추수만큼 오래 가지는 않는다."
그는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다 군복무를 하느라 스물네 살이 돼서야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그는 프로 선수가 된 첫 해인 1961년 밀란-산레모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는 스물여섯 살이던 1962년에 처음 투르에 출전했다. 이미 투르 드 프랑스에서 자크 앙크틸의 지위는 확고했고 그의 승리도 거의 확실했다.
팬들은 앙크틸에 맞설 수 있는 선수가 등장하기를 기대했는데 그 선수가 바로 레몽 풀리도였다. 그러나 풀리도는 손가락이 부러져 출발할 때부터 왼손에 깁스를 한 상태였다. 그는 깁스를 제거하고 난 뒤 산악 지역인 열아홉 번째 구간에서 승리를 하면서 비로소 그의 잠재력을 보여줬다. 그는 종합 순위 3위로 경기를 마쳤다.
레몽 풀리도는 투르의 시상대에 여덟 번이나 섰지만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1963년에는 알프스 구간에서 너무 일찍 공격에 나서는 바람에 지치고 말았다. 1964년에는 우승 가능성이 높았지만 운이 없었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넘어져 20초를 잃었고 타임트라이얼에서는 펑크가 났다. 안도라와 톨루즈 구간에서는 앙크틸을 4분이나 앞섰으나 결승선 부근에서 또 펑크가 났다. 체인도 고장이 났는데 수리 도중 엉키는 바람에 더 많은 시간을 잃었다. 그 뒤 앙크틸과 풀리도는 퓌드돔 정상을 향한 고갯길에서 대결했다. 두 사람은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결국 앙크틸은 탈진했고 풀리도는 앙크틸을 따돌리고 구간 우승을 차지했다. 이 구간이 끝났을 때 앙크틸은 겨우 풀리도보다 14초를 앞선 상태였다. 앙크틸은 가까스로 엘로 저지를 지키고 있었다.
마지막 타임트라이얼 경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타임트라이얼에서는 앙크틸이 강했다. 그는 풀리도를 쉽게 이기고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풀리도를 우승자라고 생각했다. 단지 그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1965년에는 앙크틸이 없었지만 풀리도가 다른 선수를 경계하는 동안 펠리체 지몬디가 시간을 벌었고 결국 우승은 지몬디의 차지가 됐다. 1966년 레몽풀리도는 투르에서 가장 강한 선수였지만 경쟁자들이 뭉쳐서 그에게 대항했다. 그는 결국 1위와 2분 차이로 투르의 우승을 놓쳤다. 1967년에서는 넘어져서 시간을 많이 잃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 팀 동료인 호제 팽종이 우승할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했다. 이 일로 풀리도의 명성은 더욱 더 높아졌다.
풀리도는 투르에 모두 열네 번 출전해 열두 번 완주했지만 투르는 그에게 왕관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는 영원히 1등을 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였다. 그는 1976년 마흔 살에 마지막으로 투르에 도전해 3위로 경기를 마쳤다.
프랑스인의 친구 '푸푸'
프랑스인들에게 앙크틸은 위대한 챔피언이었지만 풀리도는 가장 친근한 선수였다. 풀리도의 별명은 '푸푸(Poupou)'였다. 사람들은 그의 인간성을 좋아했다. 그는 아주 온화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부상과 불운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도전했다. 민중들은 그의 그런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꼈다. 풀리도가 속한 팀의 감독이었던 앙토냉 마뉴는 풀리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챔피언의 모든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다른 선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승리하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과 온화한 성품을 가진 데다 끊임없이 공격적인 경기를 펼쳤는데 이런 점 때문에 대중과 젊은 팬들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또 감독은 그가 승리에 대한 야심이 결여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그의 자서전 《엘로 저지 없는 영광》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자신의 불운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가장 큰 행운은 너무 불운이 많이 따랐다는 것이다."
풀리도는 고향에서 가까운 곳에서 부인과 함께 살면서 가끔 산악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기도 한다. 그는 동료 선수들보다 오래 사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중용을 지키고 무리하지 않은 덕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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