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096) - 보증수표와 부도수표
화창한 봄날, 주민센터의 학습프로그램 참여자들과 한 시간여 주변의 쓰레기 줍기에 나섰다. 곳곳에 예상보다 많은 쓰레기들이 널려 있다. 우리 모두 합심하여 청결한 공동체를 가꾸자.
쓰레기줍기에 나선 회원들
쾌적한 아침, 신문의 칼럼에서 읽은 문장이 마음에 꽂힌다. ‘인생은 백마가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보는 것처럼 빨리 지나간다. 지난날과 남은 날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회한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 몸을 추스르고 책상 앞에 다가 앉는다.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데 돌아보면 인생이 참 빠르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중에 온 아들의 전화, 지금 뭐하시느냐 묻는다. 글 쓰는 중이라니 흐뭇한 듯, 열심히 운동하고 꾸준히 배우고 때로 글 쓰며 스스로를 다그치는 날들이 소중하다.
즐겨듣는 아침 교육TV 프로그램의 이번 주 주제는 약속, 섣부른 약속이나 다짐을 경계하는 내용이 시의적절하다. 장부의 한 마디가 천하보다 중하다(丈夫一言重千金)고 하거니와 위정자는 물론 남녀노소 모두 새겨야 할 삶의 도리 아니런가!
결혼에 즈음하여 편지글로 다짐한 결혼생활의 여러 지표가운데 ‘약속의 실현’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 결혼 50주년을 맞아 정리한 이 부분의 내용,
‘이글을 쓰는 목적 중의 하나는 우리가 구상하고 계획한 것들이 하나의 약속이 되어서 그 실천에 박차를 가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나님께 맹세하지 말 것과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마태복음 5장 33~36절)고 명하는데 우리가 실천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여긴다. 나는 약속의 효험을 체험하였다. 대학시절 친구와 대화 중 한 다짐, 졸업 전에 고시에 합격하겠다는 것과 총장과 악수하겠다는 두 가지를 대학에 다니는 동안 늘 상기하면서 그 실현에 힘을 쏟았다. 다행이 둘 다 성취, 결혼생활을 통하여 이루고자 한 목표들도 이 같이 실현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서로 다짐한 것들을 지키는 습성을 기르고 힘쓰자.
이에 대한 회고, 나는 대학 평균 성적이 A학점에 근접할 만큼 우수하였는데 우리의 여러 설계와 다짐의 성적도 비슷하리라 여긴다. 결혼생활의 설계와 구상을 구체화하고 이의 실현에 힘을 기울인 서로의 노고에 박수. 여러 차례 함께 받은 상처럼 혹 보이지 않는 면류관이 예비 되었을지도. 결혼 당시의 약속을 지킨 사례 한 두 가지, 머지않은 날 가기를 기약한 알프스구경은 훗날 기대보다 알찬 탐방이 되었고 체코의 자유화운동에 앞장 선 얀 팔라흐의 무덤을 찾기로 한 다짐은 30여 년 후 충실하게 이루어졌다. 뒤 이어 아들까지 찾아갈 만큼.'
2002년 여름에 찾은 얀 팔라흐의 묘소
오래 전 신문에 ‘약속이 지켜지는 사회’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그 요지,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신용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신용사회의 요체는 서로간의 약속이행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수표는 한 낱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불이 약속되는 보증수표는 현금이나 귀금속과 똑같은 소중한 물건이 되지만 지불이 거절되는 부도수표는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다. 똑같은 표기가 이처럼 엄청난 가치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 약속이행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교훈적이다. 우리는 신용이 있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보증수표라 부른다. 따라서 신용이 없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부도수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지난 여름방학에 육군 00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 학교를 졸업한 제자들이 훈련을 받는 곳인데 입소하기 전 인사차 들렀을 때 훈련 중 한 번 방문하겠다고 한 말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일부러 간 것이다. 예기치 않은 스승의 방문에 제자들이 반가움과 고마움의 뜻을 표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이 방문은 그들 못지않게 아무도 그 약속을 촉구하지 않는 스스로의 다짐을 실천에 옮긴 자신에게 더 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게 현실이다. 정부와 국민간의 신뢰관계는 정부의 약속이행에 의하여 결정된다. 우리는 정부수립 후 두 번씩이나 그 임기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례를 경험하였다. 사회생활에서 두 번의 약속불이행은 치명적인 것이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두 차례 했던 소년이 세 번째 정말로 늑대가 나타나서 구조를 요청했을 때 앞서 속은 마을주민들이 세 번째의 진실한 구조요청을 외면했음은 약속의 파탄이 가져다주는 불행한 결과를 교훈적으로 암시해주는 것. 무릇 개인이나 국가나 자신 없는 청사진을 제시하여 주변이나 국민을 실망시키지 말고 언행일치의 약속이 실현되는 사회를 구현하도록 힘쓸 일이다.(광주일보 198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