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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엔드리커스 크루이프는 세계 2차 대전이 종지부를 찍고 2년이 흐른, 1947년 4월 25일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가 근무한 아약스 암스테르담 경기장과 훈련장 그늘 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크루이프가 12살 되던 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어린 시절부터 크루이프의 꿈은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7살이 되던 해부터 정식 축구 훈련을 받기 시작했고, 13살이 되던 해에는 축구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여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전설적인 감독 리누스 미셸스는 어린 크루이프의 가능성을 일찍이 감지하였고 약한 그의 체력을 단련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거친 프로 경기에서 견뎌 낼 수 있도록 하였다. 크루이프는 자신의 첫 팀인 아약스에서 곧 주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살이 되던 1966년 네덜란드컵에서 우승하는 감격을 맞보았다. 그는 그로부터 8차례나 더 네덜란드컵을 거머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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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는 경주마와 같은 빠른 발과 누구도 태클하기 힘든 우아하고 정교한 축구 기술을 선보이며 곧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크루이프는 플레이메이커, 볼 배급, 스트라이커 역할을 모두 해내는 선수였으며, 이전 그 어느 누구도 선보이지 못한 절묘한 패스를 선보였다.
그는 경기장 밖에서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크루이프는 자신만만하고 고집이 세었고, 자신의 의견을 꺾는 일이 없어 적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이 항상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1972년 아약스 주장 투표에서 그는 13 대3으로 주장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다음과 같은 인터뷰 내용은 그의 거만함에 대한 비난을 더욱 부채질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을 크루이프와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거나 "한 번 실수하면 똑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등과 같은 그의 말은 유명하다.
너무 솔직하다고 할 수도 있고 거만하다고 할 수 있는 크루이프의 말은 언어학적으로도 유명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문법적으로 엉터리인 그의 말은 언어 학술지에서 주제로 다룰 정도 였다. 장황한 그의 말은 논리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얘기는 결국 자신이 옳다는 것으로 결론 났고 그를 반박하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한 저명한 문학 비평가는 그의 말을 "가장 순수한 에세이"라고 평했다. 네덜란드에는 그의 어록이 책으로 출간되어 있고 경영 세미나에 사용된다.
세계 최고의 선수였음에도 그의 국제 무대 인생은 상대적으로 짧았다. 그는 1966년 헝가리와의 경기에 네덜란드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국제 무대에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1977년 10월까지 "오렌지 군단"으로 48 경기에 출전했다. 그가 대표 선수로 네덜란드에 마지막으로 공헌한 것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지역 예선이었다. 그나마 중요한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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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가 국제 무대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것은 1974년 독일 FIFA 월드컵 본선 대회였다. 네덜란드는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본선 대회에 출전했다. 지역 예선을 가까스로 통과했을 뿐 아니라 리누스 미셸스 감독의 전술에 아직은 선수들이 완전하게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퍼즐 조각은 본선 경기에서 딱 맞아 떨어졌다. 1라운드가 끝난 뒤 세계 언론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쥘 후보국으로 네덜란드를 서슴없이 꼽았다.
토탈 축구가 베일을 벗고 세상에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토탈 축구는 크루이프의 플레이로 더욱 빛을 발했다. 포지션은 센터 포워드였지만 그는 전 경기장을 누비며 기회가 있는 곳이면 어김 없이 나타나 상대를 위협했다. 다른 선수들은 크루이프 주위에서 정기적으로 위치를 바꾸면서 플레이하였다. 이것은 한 포지션을 한 선수가 맡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수가 유동적으로 맡는 전술이었다. 이런 혁신적인 전술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오렌지 군단과 크루이프가 이루어 난 것이었다. 2라운드에서 그는 득점 대열에 가담했다. 4-0으로 승리한 아르헨티나 전에서 그는 두 골을 성공시켰다. 이 경기는 네덜란드에게 최고의 경기였다. 2-0으로 이긴 동독 전에서도 네덜란드는 압도적으로 경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2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네덜란드는 브라질을 만나 사실상 준결승전을 벌였다. 엎치락 뒤치락하던 경기는 2-0 네덜란드의 승리로 돌아갔다. 크루이프는 이 경기에서 오렌지 군단의 2번째 골을 성공시켰고, 이 골은 그가 국제 경기에서 보인 최고의 골로 기억되고 있다. 65분 크롤의 센터링을 받은 그는 발리 슛을 쏘았고 방향을 잘못 잡은 브라질 골키퍼 리아오는 왼쪽 골대로 빨려 들어가는 골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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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이프의 눈부신 플레이는 결승전에서도 다시 볼 수 있었다. 경기는 그의 킥 오프로 시작되었고 네덜란드는 볼을 돌리기 시작했다. 14명의 네덜란드 선수 발을 거친 볼은 크루이프에게 다시 돌아왔고 크루이프는 질주하였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있던 회네스의 태클로 그는 포그츠 옆에서 미끄러 넘어졌다. 이렇게 얻은 페널티 킥을 네스켄스가 성공시켜 네덜란드가 한 점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독일 선수들이 볼을 채 만져 보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이런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독일에게 경기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 홈팀 독일은 전반전 종료 2분전 게르트 뮐러가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면서 동점을 만들었다. 후반전에도 네덜란드는 제프 마이어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우승을 놓치고 말았다. 크루이프는 대회 최우수선수상 수상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독일 월드컵 중에 크루이프는 다음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이유는 가족들과 오랜 시간 떨어져 있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네덜란드축구협회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그는 대표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대신 크루이프는 클럽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1971년에서 1973년 사이에 그는 아약스 암스테르담과 함께 유러피언컵 우승을 연속 세 번 일구어 냈다. 1973년 그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첫 시즌부터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78년 크루이프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1979년 5월 미국 프로리그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두 시즌을 보내고 스페인 2부 리그 소속의 레반테에서 12 경기를 뛴 다음, 1981년 여름 아약스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돌아왔다. 1983년 아약스의 최대 라이벌 팀이 폐예누르드 로테르담으로 이적한 그는 네덜란드 국내 우승을 휩쓸면서 선수로서의 마지막 영광을 누렸다. 30대 중반에 들어섰음에도 크루이프는 놀라운 실력을 보이면서 그의 축구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했다. 그는 1983년과 1984년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1984년 선수 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네덜란드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정식 감독 수업을 받지 않은 크루이프는 1985-86 시즌이 시작될 때 아약스 암스테르담의 기술 코치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이미 1980년 미국프로리그 오프 시즌 중에 네덜란드에서 아약스와 훈련을 가졌을 때 이미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보인 바 있다. 그는 네덜란드 리그 경기 중 스탠드로 내려가서 당시 아약스 감독이었던 레오 벤하커에게 충고했다. FC 트웬터에 1-3으로 뒤지고 있던 아약스는 5-3으로 승리했다. 라이벌 팀에서 3년 동안 활동한 이후였지만, 크루이프는 아약스를 도와 팀의 1987년 유러피언컵위너스컵 우승을 이끌었으며 데니스 베르캄프, 아론 윈터, 브라이언 로이, 로브와 리처드 위츠게 형제 등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해 내었고, 그들은 모두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다.
선수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약스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크루이프는 감독 겸 기술 코치를 맡았다. 독일 출신의 번트 슈스터를 포함한 12명의 선수를 방출하고 새로운 스타들을 영입하는 데 1500만 달러(약 200억원)를 들이는 등 팀을 재정비하였다. 이런 그의 노력은 곧 결실을 맺어 바르셀로나는 유러피언컵위너스컵, 챔피언스리그, 스페인컵에서 우승했고, 스페인 국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연속 우승했다. 크루이프가 이끄는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드림팀"으로 통했다.
크루이프는 이렇게 감독으로서 화려한 전적을 쌓았고 어느 누구도 그가 명장임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팀을 맡아 이끌었다. 크루이프에게 월드컵 감독의 기회가 왔지만, 네덜란드축구협회와 마지막 협상 단계에서 계약이 무산되어 결국 1994년 월드컵에 오렌지 군단의 감독직을 맡지 못하게 되었다.
1996년 크루이프는 8년 동안 맡았던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크루이프는 1991년 수술로 담배를 끊어야 했다. 1997년 심장 질환이 재발하자 그는 다시는 감독직을 맡지 않는다고 맹세했으며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맹세를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에 새로운 감독 영입 소식이 흘러나오면 항상 그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 하지만 그는 지금 누 캄푸 시절을 추억하며 살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크루이프는 장애 스포츠인을 후원하고 스포츠 의약품 개발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요한 크루이프 재단과 은퇴한 스포츠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1998년에 설립한 요한 크루이프 국제 대학에 정성을 쏟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개인 수상 경력
1971,1973,1974 올해의 유러피언 축구인상, 올해의 네덜란드 스포츠인상 1983,1984 올해의 네덜란드 축구인상
선수 경력
클럽
1964-1973: 아약스 암스테르담(네덜란드) 클럽 수상 경력:
1966-68,1970,1972,1973,1982-84 네덜란드 챔피언십 우승
국가대표 경력:
48 경기 출전(33득점), 33회 주장 감독 경력: 감독 수상 경력:
1986,1987 네덜란드컵 우승
1973-1978: FC 바르셀로나(스페인)
1979: 로스앤젤레스 아즈텍스(미국)
1980-1981: 워싱턴 디플로매츠(미국)
1981: UD 레반테(스페인)
1981-1983: 아약스 암스테르담(네덜란드)
1983-1984: 페예누르드 로테르담(네덜란드)
1967,1970-72,1983,1984 네덜란드컵 우승
1971-73 유러피언챔피언스컵 우승
1972 월드클럽컵 우승
1973 유러피언수퍼컵 우승
1974 스페인 챔피언십 우승
1978 스페인컵 우승
1974 독일 FIFA 월드컵: 2위, 대회 최우수선수상 수상
1985-1988: 아약스 암스테르담
1988-1996: FC 바르셀로나
1987,1989 유러피언컵위너스컵 우승
1990 스페인컵 우승
1991-94 스페인챔피언십 우승
1992 유러피언수퍼컵우승
1992 유러피언챔피언스컵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