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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80
11월20일[연중 제3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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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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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3YstDUG9aY
[한국외방선교회 최정열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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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 역시 산산조각난 인생일 뿐입니다!>
언젠가 시각 장애인 야외 행사 때 한 형제님의 도우미 역할을 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전혀 앞이 안 보이는 분들도 계셨지만, 어느 정도 윤곽이 보이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왕초보인 저에게는 그나마 봉사하기 쉬운 시각 장애인 형제님이 배당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입장에서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세상 모든 대상들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들이었습니다. 언제 어디를 가든 그저 조심 또 조심, 몸을 사려야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시각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의료 수준으로 회복이나 치유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사회 분위기상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나 복지 혜택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가족들도 나 몰라라, 공동체도 그들을 소외시켰습니다. 더 억울한 일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시각 장애를 죄에 따른 벌로 여겼습니다. 앞을 못 보는 불편함에 죄인 취급까지 받으니 그 삶이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한 마디로 두 사람의 삶은 산산조각 난 것입니다.
산산조각이 났으니, 더 이상 내려설 곳도 없었습니다. 부끄러워 하거나 체면 차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두 예리코의 눈먼 사람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동원해서 크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복음 18장 38절)
이윽고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 난 그의 인생을 측은지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가엾은 마음이 든 예수님께서 산산조각난 눈먼 이의 인생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모으셨습니다. 마침내 산산조각난 인생을 당신 뜨거운 사랑의 용광로 속에 넣으셔서,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키셨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 역시 산산조각이 난 인생일 뿐입니다. 주님 크신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제 발로 서 있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그저 주님 자비만 바랄 뿐입니다. 주님 뜨거운 사랑만 기대할 뿐입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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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ZmohtmqO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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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원에 필요한 믿음이 다 들어있는 가장 짧고 강력한 기도문>
오늘 복음에는 우리가 매 미사 때 하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가 나옵니다. 예리코의 눈먼 이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해도 멈추지 않고 청합니다. 불의한 재판관에서 올바른 판결을 해 달라고 청하는 과부와도 같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거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이들도 하느님이 있는 줄 알고 그 아드님이 예수님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저주합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알았습니다. 온갖 기적들을 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을 자신이 이겨 먹는 기쁨을 선택하고 지옥에 갔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을 믿었지만,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나를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할까요?
‘우와한 비디오’에 ‘쓰레기로 가득 찬 트럭에서 먹고 자는 남자’ 사연이 나왔습니다. 한 아저씨가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일하며 고물을 모아 팔며 생활합니다. 그러나 이틀에 밥 한 끼 먹기 힘들 정도로 벌리는 돈은 없습니다. 차 기름값이나 수리비도 나오지 않습니다. 잠도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자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원룸이 있기는 한데 전기세와 수도세 등을 내지 않아 집은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저씨는 한 시간 정도 차에서 앉아서 눈을 붙이고 하루 종일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없는 삶을 3년째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산 이유는 힘들게 번 돈을 원룸에 숨겨 놓았는데 도둑이 들어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격이 오를 것 같은 쓰레기들을 차에 그대로 싣고 다니며 폐지를 주워 하루 몇 천 원 정도 벌어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작진이 아저씨를 동사무소로 모시고 가서 도울 방법을 찾습니다. 보조금을 받게 하여 집에 다시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게 합니다. 그러고는 차에 있는 오래된 쓰레기들을 처리해줍니다. 기분이 어떠냐는 말에 아저씨는 “속이 후련하죠!”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제작진이 없었다면 아저씨는 언제까지 그 고생을 하며 살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제작진을 믿었습니다. 무엇을 믿었을까요? 제작진이 자신을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능력’이 있음을 믿었고 또 제작진이 자신을 이용해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도울 것이라는 ‘자비와 사랑’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움을 청하면서도 자기가 잘해서 도움을 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도 수많은 핑계를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도와주면 자신이 그렇게 꾸준하게 청하고 말을 잘해서 도움을 얻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저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얻어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더 자주, 더 많이 청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저는 그들에게 주는 도움을 멈춥니다. 그 도움이 그들에게 이익이 아니라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지은 죄를 주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잘해야 에덴 동산에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려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에덴 동산에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러니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그분께만 ‘능력’이 있고 그분은 ‘자비’로운 분이라는 두 믿음의 본질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기도에는 주님의 능력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 들어가야 하기에 모든 기도의 바탕에는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끊임없는 호소가 동시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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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믿음은 하느님의 좋으심을 묵상함으로써 커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기저기 버려진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한 들판에 유난히 코스모스가 응집되어 피어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 보니 코스모스들은 어떤 병사의 몸에서 피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군번줄로 신원을 확인해보니, 그 병사는 전쟁터에서 아무도 묻어줄 수 없는 병사들을 위해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휘날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자신의 몸에 한 움큼의 코스모스 씨를 안고 전쟁에 출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어 썩어진 몸에서 코스모스가 피어 바람에 향기를 휘날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묵상해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썩은 시체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 가득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도 이러한 자세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한다는 분들에게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느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에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여러분 가방에서 돈을 훔쳤다고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냐고 물으면 웃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자비로우면서도 하느님은 과일 몇 개 먹었다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모진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비를 더 잘 알기 위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서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옷을 만들어 입고 숨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라고 한 것 하나에만 집중하며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판단해버렸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하느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몹쓸 종이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셔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 25,24-25)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긴다면 공부만 한 것이지 기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묵상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다는 믿음을 줍니다.
저의 어머니도 저에게 매우 모질게 대하신 적이 있습니다. 혼낼 필요가 없는 것도 혼내시고 학용품 살 돈도 안 주셔서 울려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붙잡고 부모는 자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엄한 훈육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중하면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분과 사는 것은 고통 자체가 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의 어머니인 것을 믿기 위해 어머니의 손과 발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굳은살이 박이고 관절이 휘어져 있었습니다. 생선의 어느 부위를 드시는가도 살폈습니다. 언제나 머리 부분만을 드셨습니다. 몸통을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맛있는 것을 나에게 먼저 주시는가도 살폈습니다. 새참으로 받으신 우유와 빵을 당신은 안 드시고 저녁 때 저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께서 좋으신 분임을 묵상할 때 어머니가 나의 참 어머니가 맞는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성장시키지 않는 성경공부는 무익함을 넘어서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소경이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데도 큰 소리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그는 비록 소경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에 자신에게 좋은 것만을 주실 것임을 오랜 시간 묵상해온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묵상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 믿음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기도가 끝나건, 성경 읽기가 끝나건 항상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며 끝나야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증가한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증가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믿음을 증가시키는 데 쓰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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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뉴욕에 살면서 이러 저런 인연으로 ‘손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손님이 3명 왔습니다. 한분은 제가 제기동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을 때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때가 1997년이니 어느덧 26년 전입니다. 고등학생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사제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분은 수도회 사제인데 알고 보니 동창신부님이 있는 본당에서 신학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온 자매님은 20년이 넘게 ‘한국 틴스타’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자매님은 세검정 본당에 다니는데 저는 1995년에 세검정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었습니다. ‘틴스타’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았는데 손님들과 함께 지내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틴스타 홈페이지에는 틴스타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틴스타는 우리 몸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변화를 경험적으로 발견하게 함으로써 성의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지성적, 영성적인 가치를 전인적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으로 부모의 협조와 담당 교사의 철저한 신뢰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손님들은 뉴욕에서 며칠 머물다가 ‘국제 틴스타’회의가 있는 워싱턴 DC로 갔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도와 실천을 함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리고의 소경은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앞서가던 사람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예수님께서는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소경은 기도했고, 실천했습니다. 그의 신분과 능력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도했고, 실천했기에 구원받았습니다.
예전에 엘리베이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르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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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하였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절).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는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준다. 그 누가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가?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뿐 아니라, 마음의 눈이 먼 상태에서도 벗어났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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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번 주는 제1독서로 마카베오기 상권을 읽습니다. 이 책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마카베오기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기원전 176년부터 134년까지 펼쳐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계 왕조 셀레우코스 4세 통치 말기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의 즉위까지 해당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짓밟았던 비유다계 출신 왕조의 통치부터 유다계 왕조가 재정립되는 역사적 종교적 과정을 서술하기 때문에, 교회 전통은 이 두 책을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한편 마카베오기 상권은 그리스계 왕조에 대항하였던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두 형제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 드라마입니다.
오늘 제1독서(1마카 1장)는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 곧 이교 풍습을 강요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불경한 작태를 고발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장부터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세 아들(유다 마카베오, 요나탄, 시몬)의 반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과 율법을 수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방 출신 왕조의 핍박과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계약의 수혜자가 되는 길은 철저한 율법 준수와 폭력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이교 풍습의 거부로 제시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율법 준수’처럼 다른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복음 정신과 반대되는 현대의 ‘이교 풍습’은 모든 것을 돈과 실적으로만 환산하려는 세속적 유혹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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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35-43).”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어떤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ㄴ-36ㄱ)
어떤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바르티매오가 앞을 못 보는 몸으로 구걸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마태 4,16)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그분을 메시아로, 또 ‘구원의 빛’을 주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여’라고 부른 것은 그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갈망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직접 찾아갈 수 없는 상황이니, 예수님께서 지나가시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의 앞을 지나가신 일은, 하느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주신 기회였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기회’라는 말은, 수난 전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뜻일 뿐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뜻은 아닙니다. ‘마지막’을 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다 끝났다.”라고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포기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어떻든 바르티매오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일이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기회’였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께 간청한 ‘자비’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것, 새 인생을 사는 것, 구원을 받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 등.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은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그 말은 당시에는 공공연하게 사용하기에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은 바르티매오가 몇 푼의 돈을 달라고 청하는 것으로 오해하고서 조용히 하라고 꾸짖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앞의 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루카 18,3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나신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길을 걸으시면서 그 두 제자를 가르치셨습니다.(루카 24,15) 예리코에서도 길을 걸으시면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한다면, 바르티매오의 입장에서는 더욱 간절하게, 또 더욱 큰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시고, 그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일은, 분명히 ‘부르심’과 ‘응답’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는 질문은,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바르티매오 자신이 ‘능동적으로’ 청하라는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능동적으로’ 청해서 얻는 생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안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바르티매오의 말은, 단순히 시력 회복만을 청하는 말이 아니라, 시력 회복을 포함해서, ‘새 인생’을 청하는 말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다시 보게 해 주겠다. 이제부터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일은, 그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신 일이기도 하고,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갈 ‘힘’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바르티매오가 참으로 원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루카 18,31-34)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따른 일은,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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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신부님]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18,39)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 군중들의 웅성거림에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큰소리로 외친다. “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자 앞서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러댄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볼 수 있게 하셨다는 이야기다.
앞을 못 보기에 유일한 생존 방법으로 구걸을 선택했던 사람의 간절하고 절박한 처지는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남들의 윽박지름에 아랑곳 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소문으로만 듣던 그분께서 자신이 구걸하고 있는 곳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 알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처지에서는 그저 큰 소리를 내어 자신의 존재를 그분께 알리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말 그대로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이들은 왜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 했을까? 그리고 그 앞서가던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모르긴 해도, 예수를 따르던 제자 중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아직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이었다면, 그 걸인에게 윽박지르기보다는 그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 걸인을 윽박질렀던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잘못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을 위해 하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일 때가 적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다가서려는 이들을 이끌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막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먼저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그분을 위한 행동이라 말해야 한다. 가진 것이 없다 해서, 내세울 것이 없다 해서 교회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소리가 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몇몇 영향력 있는 이들이 중심이 된 사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과 기도가 없는 사회봉사단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단체의 규칙을 운운하면서 배타적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건강한 비판이 들리지 않도록 사목자의 귀를 멀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최선을 다해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교회는 누구나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먼저 힘들 때 찾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또한 기쁨을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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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이었습니다. 마음이 심란하셨을 것입니다. 아직도 당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고독과 절망감이 몰려들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절박한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그가 온 힘을 다하여 청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늘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자비송을 바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얼마나 정성을 다해 주님께 기도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에 예수님께서도 응답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늘 새롭고 의미 있는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실제로 얼마나 노력하고 하느님께 간청하는지, 아니면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새롭게 눈을 뜬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것도 수난을 향해 길을 가시던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내 몸과 마음이 힘들다 하더라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눈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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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운전하다가 터널에 진입하였는데, 갑자기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조등도 켜져 있었고, 터널 안에 전등들도 이상 없이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알고 보니 강한 햇빛에 눈이 부셔 썼던 선글라스 때문이었습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만 벗으면 될 일을 기계의 오류나 터널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창피하고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판단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처럼 어떤 상황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보다는 세상과 주변의 문제점을 먼저 생각합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거나 내 생각을 받아 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고 짜증을 부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하지요. 볼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예고(루카 18,31-34 참조) 바로 다음에 예리코의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곳 예리코는 갈릴래아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루카 9,51─19,27 참조) 중 마지막 장소입니다. 이렇게 루카 복음사가는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거치며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삶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예리코의 눈먼 이를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을 본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욕심과 욕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과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예루살렘에서의 비극은 발생합니다. 그 색안경을 벗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세상이 달라지려면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자신의 색안경이 어떤 색깔인지 바로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 제가 제대로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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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이탈리아의 ‘시모네 아레나’라는 사람은 시력이 6.0이라고 합니다. 800미터 거리에서 20센티로 쓴 글씨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더욱 고귀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알았다고 하는 이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못 만나게 하였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났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습니다.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영적인 소경입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인 바리사이들에게도 눈뜬장님이라고 하셨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간절한 심정으로 절박하게 매달렸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받은 은총에 머물지 않고 감사의 삶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여러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 소외된 사람들, 장애인도 있습니다. 남모르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나보다 죄가 커서, 또는 나보다 천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대신 져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해서 짊어지고 사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편견 없이 바라봐야 하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지만 연약함을 지닌 피조물입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충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필요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에 공감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적인 시력을 키워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적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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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딱히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불안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 우울증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불안감과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고통스러워할 만한 특별한 일을 체험한 것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불안감과 우울감에 당황스럽게 됩니다. 왜 이런 감정이 생겨날까요?
영국 심리학자 멕 어럴은 이를 ‘스몰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이유 없는 우울감과 불안감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스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을까요?
멕 어럴은 우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그러나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경험들을 계속해서 떠올려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떠올렸을 때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스몰 트라우마의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원인을 알게 되면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 입 밖으로 나가면서 편안한 마음이 생기고 갑작스럽게 찾아오던 불안과 우울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별것도 아니라면서 나를 우습게 여길 것 같고, 자신의 이런 나약한 모습이 알려질 것 같은 또 다른 불안감도 생길 것 같습니다.
또 누군가에게 말해서 오히려 문제가 더 커졌던 적도 많았기 때문에 망설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찰하면서, 또 고해성사를 보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찰과 고해성사를 통해 편안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체험하는 중요한 순간이 됩니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도 이 눈먼 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사람들의 가만있으라는 말을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사람의 해결책은 문제를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해결책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최고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실제로 이 눈먼 이는 예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함으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해결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해결책을 굳게 믿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해결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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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열린 길>
루카 18,35-43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열린 길>
“어떤 눈먼 이가
… 듣고
… 부르짖었다.”(루카 18,36.38)
설렘으로
한걸음 또 한걸음
힘차게 길을 걷다가
이내 모든 길 막힌 듯
하릴없이 멈춰선
지친 벗이여
그대 앞의
수많은 갈래길
모두 닫힌 적 없으니
굳은 믿음과
벅찬 희망과
뜨거운 사랑으로
애타게
그대 기다리는
열린 길 찾아내어
그대
다시 일어나
힘차게 걸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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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다시 보고, 달리 보고, 달라지는>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오늘 눈먼 이가 자비를 청하는데 자비의 내용은 다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도 다시 보게 되는 자비에 대해 묵상해봤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본다는 것은 복음의 눈먼 이와 다릅니다. 저는 그와 달리 눈먼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전에는 이렇게 보다가 다르게 보게 될 때 이르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옷차림이 후줄근하고 초라하여 우습게 보았는데 선뜻 큰돈을 희사하는 것을 보면 다시 보게 되지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그가 달리 보이는 것인데, 그는 변한 것이 없고 나의 눈이 바뀐 겁니다.
첫째로 그것은 교만의 눈에서 겸손의 눈으로 나의 눈이 바뀜으로써 다시 보는 차원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눈은 남을 대체로 얕잡아 보고 심하면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사실 무시한다는 한자어나 업신여긴다는 우리말은 같은 뜻입니다. 무시(無視)한다는 말은 없을 無와 볼 視가 합쳐진 말이고, 업신여긴다는 말은 ‘없이 여긴다’는 말의 변형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말 다 엄연히 있어도 없다고 보거나 없이 여기는 것이니 얕잡아 보는 것 곧 나보다 낮게 보는 것보다 훨씬 잘못 보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미움의 눈이 사랑의 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미움의 눈으로 보면 그의 잘못만 보이는데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의 고통이 보입니다. 사랑을 하면 이해하려는 눈으로 보게 되고 그가 그런 것은 그가 큰 고통을 겪고 있어서 그런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르게 하면 그의 겉만 보지 않고 그의 안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것만 보던 눈이 신비도 보는 눈으로, 육의 눈으로만 보던 것이 영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땅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이 됐는데 단풍도 못 보고 한해가 지난 적도 있습니다. 땅만 보게 하는 육의 정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다가 그런 자신을 자각하고 하늘을 봐야겠다고 작정하면 그때부터 서서히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늘 보던 것만 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보기 시작하고, 늘 보던 것을 보더라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고, 복음의 눈먼 이와 군중처럼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라고
오늘 복음이 얘기하듯 우리도 그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주님을 따르는 너와 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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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날로 좋아지고 지혜로워지는 삶-
“이 몸과 이 마음 다한다 하여도,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시편73,26)
오늘 따라 만추의 밤하늘의 별들이 초롱초롱합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오늘 복음의 예리코의 눈먼 걸인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우리가 주님을 만나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새삼 우연은 없고 모두가 주님의 구원 은총의 섭리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밤하늘의 별하면 그립게 떠오르는 두편의 시입니다.
“삶은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
외로움 중에도
묵묵히 꽃들 피어내는 것
하늘이
별들 피어내듯
땅이
꽃들 피어내듯”-2001.8.17.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이런 이들이 좋고 지혜로운 분들입니다. 좋고 지혜로운 분들과 만남 뒷맛의 여운이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어제는 참 좋고 지혜로운 여러분들을 만났고 메시지도 주고 받았습니다. 좋은 분 주변에는 좋은 분들이 두루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날로 좋아지고 지혜로워지는 느낌의 따뜻한 분들의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어제 고등학교 반 친구들 모임(반창회)가 있었어요. 저의 환갑 축하 겸 이른 송년회, 반장이었던 친구가 요절하여, 부반장인 제가 25년 정도 계속 모임 대표를 맡았네요. 어제 받은 행운의 열쇠 선물에 쓰인 문구가 너무 고마웠습니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신부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서... <치양, 그대의 선한 에너지가 우리 모두에게 왔다 3반 일동>”
25년 동안 계속되는 우정의 모임이 참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말 그대로 “우정의 여정” 중인 도반들입니다. 많은 좋은 분들과 좋은 관계의 사랑 속에 행복하게, 결코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지혜롭고 멋진 도반의 메시지입니다.
어제 방문했던 옛 교대 동문들과의 좋은 만남도 향기처럼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네분 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고 한 부부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도 수도원 주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함께 수도원에서 찍은 사진도 참 맘에 들었고 메시지도 나눴습니다.
“좋은 분들,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참 좋은 분들의 수도원 방문 축일’이었습니다. 내일 모든 분을 위해 생미사 봉헌합니다.”
한동안 제주도에 머물던 좋은 영적도반도 수도원에서 하루 머물며 고백성사를 보고 미사 후 떠났으며, 올해 전반기 6개월 동안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재활훈련 후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2학기부터 대학 강의를 하는 분의 예화도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힘겹게 온 힘을 다해 강의후 수강생들 수십명이 우렁찬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중에서 최선을 다하는 교수의 모습이 마음 짠한 감동을 줬음이 분명합니다. 역시 주님의 은총 중에 최선을 다해 날로 좋아지고 지혜로워지는 여정을 살아가는 분입니다.
또 열두 명의 제 가족 친지들이 제부(弟夫) 칠순 축하모임 후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얼마나 밝고 좋고 유쾌한 분위기였는지 역시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선(善)한 사람들의 선(善)한 향기입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결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깊이 각인된 여정에 대한 기억입니다.
개안(開眼)의 여정,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 복음은 영적 상징들로 가득하며 “소복음서”라고 할 만큼 참 의미들이 풍요롭습니다. 참으로 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삶은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의 여정이요, 날로 너그러워지고 지혜로워지는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계속된 만남이 이런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입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눈먼 이’가 상징하는 바 무지에 눈먼 가난한 인간 실존입니다. 그가 눈뜨고 싶은 갈망이 얼마나 컸던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에 전광석화,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갈망 중에 늘 깨어 있었던 영혼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한결같은 갈망으로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오십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유명한 자비송 기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칠 단 하나의 기도를 꼽는다면 자비송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 삶의 내적 여정에 끊임없이 바쳐야 할 참 좋은 기도가 자비송입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거듭 도움을 청하는 갈망의 사람, 눈먼 걸인에 대한 주님의 응답입니다.
다음 주님과의 문답은 우리 모두의 깊은 갈망을 대변합니다. 소망이 절실하니 주고 받는 말마디 역시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예전 선사(禪師)를 찾았던, 사막수도교부를 찾았던 제자들과의 문답을 연상케 하는 예수님과 눈먼 걸인과의 대화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참으로 주님을 찾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영적인간이라면 답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좀더 심안이, 영안이 열려 잘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혜안을 지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는 즉시 눈이 열려 다시 보게 됩니다. 개안의 여정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 믿음의 여정과 함께 감을 봅니다. 한두 번 주님과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만남의 여정 중에 날로 마음의 눈도 밝아져 더욱 주님을 닮아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 눈먼 걸인은 하느님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르니, 이제 그의 여정은 찬양의 여정, 따름의 여정으로 변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얼마나 풍요로워진 내적 여정의 삶인지요! 주님과 더불어, 만남의 여정, 개안의 여정, 믿음의 여정, 찬양의 여정, 따름의 여정 등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인지요! 이래야 진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주님을 찬양하라 있는 입이며,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두요 존재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세상에 동화되어 속화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성화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인들이 이민족의 문화에 접함으로 처절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일부 유다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할례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림으로 동화에 박차를 가하니 정체성 상실 위기가 풍전등화입니다.
반면 순교적 열정의 치열함으로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고, 이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어가는 순교를 택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정체성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누군가는 오늘날 지옥은 텅 비어 있다고 말합니다. 악마들이 해방되어 활개치며 준동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물질만능주의, 대량 소비주의, 인명 경시주의, 광신의 믿음과 이념갈등, 생존경쟁, 약육강식, 승자독식, 각자도생, 차별과 혐오등 “야만의 시대”(?)에, 무수한 악마들과 우상들이 우리의 내면을 세속화와 폐허화로 이끌어 감으로 방심하면 어느새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 때요, 날로 심안이, 영안이 밝아져 가는 개안의 여정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래야 눈 밝은 분별의 지혜로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삼 좋고 지혜로운 도반들과 더불어 사랑으로 연대하여, 개안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봅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좋고 지혜로운 도반들과의 개안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다음 같이 고백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쓰는 강론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하느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시편 73,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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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18,41)
<마음의 눈!>
오늘 복음(루카 18,35-43)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리코에서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던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 지나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나?"(루카 18,40)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그러자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도 예리코의 소경처럼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우리도 '마음의 눈인 영적인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예리코의 소경처럼 간절하게 매달려 봅시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우리 안으로 은총이 쏟아집니다.
구상 세례자요한 시인(1919-2004)은 만년에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라는 시집에서, 그 은총(신앙)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오늘은 중산리 코스로 지리산 천왕봉 등산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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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QFOHN1J6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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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 42)
부끄러운 제 믿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다시 보게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올바른 믿음입니다.
믿음 안에
자비는 구체화됩니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며
진정한 자유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믿음은 경계와
한계를 무너뜨리며
아름답고 빛나는
사랑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
다시 보게 되는 치유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절박한 목소리로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치유와 구원 사이에
믿음이신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생명의 향기는
분명 믿음의
향기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먼저 주님을 찾고
먼저 주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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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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