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세기_4부_에필로그 : 서양의 몰락
겁쟁이 게임
(771) 세계 전쟁의 종지부는 한국 전쟁의 휴전 협정이 맺어진 1953년 7월 27일 것이다. 1952년이나 1953년에도 원자폭탄을 이용한 공격 가능성이 배제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일명 쿠바 위기로 1962년 10월 27일 토요일, 온 세계는 파멸 직전까지 갔었다. ‘극한 정책’은 철없는 젊은이들의 ‘겁쟁이 게임’과 같다. 단순한 사고들이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뻔했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무기를 제공받는 대신 소련 블록에 가담하면서 위기가 발발했는데 이는 실제로 터기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케네디 형제였기 때문였다.
당시 후르시초프가 케네디에게 두 가지 거래를 제안했는데, 첫 번째 거래는 미국이 쿠바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보장과 미사일 철수를 맞바꾸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안은 터키의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하면 쿠바 미사일도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타협안을 모색하는 중이었지만 여전히 주말에는 전쟁이 터질 수도 있었다. 터키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핵심이었다. 옛 독일의 수도에 대한 4개국 지배권, 베를린 장벽 사건 이후 겨우 1년 만에 쿠바 위기가 발생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제3세계의 전쟁
1961년에 세워진 베를린 장벽은 독일의 분할뿐 아니라 유럽의 분할까지 기정사실화의 결과를 가져왔다.
분쟁이 발생한 두 번째 이유는 경제와 관련이 있다. 세계 대전은 경제적 변동성에 의해 촉발됐다. ...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호황, 불황, 이 모든 경제적 변동은 유럽과 동아시아의 불안이 가중됐고, 기존 제국들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새로 들어선 민주주의 국가들을 위협했고, 인종 간의 반감을 고조시켰다. 또한 터키, 러시아, 일본, 독일 같은 제국 국가의 등장에 길을 열어줬는데, 각국은 민족 동질성과 위계질서를 병적일 정도로 갈망했다. 자본의 국유화와 자유롭지 않은 노동을 기초로 한 일종의 신생 노예 국가였던 스탈린의 계획경제 체제에 정당성을 제공한 것도 경제적 변동성이었다. 무엇보다 ‘생활공간’, 즉 영토 확장을 통한 경제 회복이라는 매력적인 개념에 기초한, 새롭고 무자비한 제국주의가 발생한 것도 경제적 변동성 때문이었다.
1950~1960년대는 상당히 달랐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제 성장률이 유례없이 치솟았다. (785) 경제 분야의 경쟁이 전략적 충돌보다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변화는 두 체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관한 문제였다.” 문화와 스포츠만이 아니었으며, 자신들이 체스 시합이나 피아노 대회, 아이스하키 시합에서 늘 우승 후보라는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은 전혀 손상받지 않았다.
세 번째 요인은 제국들이 소멸할 때, 독립 과정이 원만하게 진행된 곳에서도 머지않아 폭력 사태가 발생하곤 했다. 이런 현상은 사라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전역에서 나타났다. 20세기 후반기는 전반기만큼이나 폭력적이었다. 미국은 설혹 자본주의 독재가 이루어진다 해도 그런 인사를 지원(CIA)했고 미국국무부가 허가한 납치와 고문, 즉결 처형을 수행했다. 냉전 시대 미국의 대외 정책은 “그가 개새끼라고 해도 우리의 개새끼라면 괜찮다.”라는 말이 탄생한 곳도 바로 중앙아메리카로, 이 표현은 일부 시사비평가들이 현실주의라고 부른 대외 정책의 요체였다. CIA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이 사람들을 처형했다는 사실은 발표되지 않을 것이며, 과테말라 정부는 이들을 잡아들였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CIA가 생각한 대청소(‘실종’ 수법)였다. 냉전기 내내 제3세계를 괴롭힌 사회적 갈등은 종종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일 뿐 아니라 민족 갈등이기도 했다.
과테말라 계층 구조는 상대적으로 유복한 정복자들의 후손 라디노(Ladino, 라틴아메리카에서 백인가 인디언 사이의 혼혈을 가리키는 말-옮긴이)와 그들의 원주민 아내들이 맨 위에 있고, 토착민들이 맨 아래다. 따라서 CIA가 과테말라에서 지원한 대리전은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전쟁이(796) 뿐 아니라 라디노 대토지 소유자와 마야족 농민들 간의 전쟁이었다. (…) 총사망자는 20만 명에 달했다. 따라서 소련이 해방을 위해 한 일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미국 역시 남반구에서 자유를 위해 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 냉전의 진실이었다.
미국의 정책은 이탈리아, 프랑스, 서독 같은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의 방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와 맞서는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량 학살을 초래했다. 그 공산주의는 때로 실재했지만, 때로는 상상된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냉전의 ‘오랜 평화’는 미소 양국을 비롯해 그들과 가까운 북반구 지역 사람들에게만 제공되었다는 얘기다. 나머지 숱한 사람들에게 그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제3세계의 전쟁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만큼 인종적인 갈등이 수반되었다.
중국의 닉슨
미국 내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닉슨은 북베트남의 요구대로 전쟁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당근과 채찍이라는 정교한 전략을 채택했다. 즉, 강대국 외교 수단으로서 대리전 전략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두 공산주의 정권의 한쪽은 소련, 다른 한쪽(폴 포트 정권)은 중국의 지원을 받았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략하자 미국은 크메르루주 편을 들었고, 이들은 다시 게릴라전을 감행하기 위해 후퇴했다. 닉슨과 그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중국과 소련의 적대 관계를 이용하여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키신저에게 외교라는 대규모 체스 게임에서는 희생당한 인질은 걱정하지 않고 왕을 저지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중국과 미국의 국교 회복은 키신저가 바란 대로, 소련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므로 냉전은 부분적으로만 경쟁하는 두 경제 체제 간의 싸움이었고, 부분적으로만 미국과 소련의 전략군 사이에 벌어진 ‘겁쟁이 게임’이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강대국 간에 벌어진 키신저의 체스 게임이었다.
캄보디아의 운명은 무너지는 제국과 대리전이 광신자들에게 기회를 준 지역에서 냉전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예이다. 집단 증오, 즉 계급적, 종교적, 인종적 증오가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동만을 모아진 듯했다. 대량 학살 의도가 뚜렷이 드러난 전쟁이었다. 결국 1970년대를 통틀어 확실히 미국이 승자가 되는 상황은 결코 아닌 듯하다.
------------------------------------------------------------------------------------------------------- 1기 킬링필드는 1969년에서 1973년 베트남 전쟁중이던 미군이 퍼부은 폭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캄보디아에 쏟아부은 포탄의 양은 무려 54만 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했던 16만 톤의 세 배가 넘고,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49만 5천 톤마저 능가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불법 폭격이었다. 죄 없는 수십만 민간인들이 숨지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평생 불구가 됐다. 2기 킬링필드는 1975년에서 1978년 사이, 민주 캄푸차시기에 캄보디아의 군벌 폴 포트(본명 살로트사르)가 이끄는 크메르루주(Khmer Rouge: 붉은 크메르)라는 무장 공산주의 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말한다. 원리주의적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루즈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 중 1/3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강제노역을 하게 하거나 학살하였다. 1989년 이후 베트남군이 철군하였고, 1991년에는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고 유엔의 임시 관리안에서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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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1989년의 혁명(1980~1990년대 동유럽의 공산정권 붕괴)을 20세기 이데올로기적 서양 세계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발칸반도는 평소대로 도살장으로 되돌아갔다. UN인권위원회는 보스니아의 강간 사건을 민족 집단 전체를 욕보이고 목욕하고 겁주기 위해 실행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규모” 행위였다고 지적했다. 대량 학살을 유발한 요인은 이제는 익숙해진, 인종 이데올로기와 민족이 서로 뒤섞인 사회 현실 간의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대량 학살은 이웃 그리고 때로는 친척을 상대로 이루어졌다.
프로이트의 분석은 비과학적인데다 명백히 사색적인 특징을 갖고 있지만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죽음의 의인/자연인이 아닌 것에 법률상 인격을 부여함)라는 증오심의 본질적인 양면성, 즉 성적인 면과 병적인 면의 결합을 포착해 냄으로써, 증오심 자체의 교묘한 성질을 짚어냈다. 강간과 살해라는 포그롬에서 대량 학살로 확대된다. 경제적 불안정 때문에 민족 간의 차이가 정치적인 문제로 불거지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그리고 대개 제국 간의 경계선에서 그 폭력이 전이된다.
따라서 1989년에 서양 세계가 승리를 거뒀다는 생각은 착각으로 드러났다.
극동 지역은 제품을 수출한 반면, 근동 지역은 사람을 수출했다. 즉 종교학교는 자유시장경제의 세계화만큼 의미심장하게 세계를 변화시킬, 아주 특이한 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들은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세계 전쟁 경험상의 문제뿐 아니라 개념적인 문제도 있다.
희생된 수백만 명의 사람 중 다수는 ‘직접적인’ 폭력 행위(수탈과 이주)가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기근이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또한 칼 대신 폭탄 등의 파괴적인 기술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체계적인 폭력이 저질러졌다. 이는 내전을 양산하는 제국주의적 질서의 문제이며 두 번째 특징은 겉으로 보기에 문명화된 사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원시적인 살해 본능을 폭발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여전히 20세기의 역설로 남아있다.
세계화의 두 번째 시대에도 비슷한 운명이 닥칠 것인가?
1950년 영국 인구는 이란의 세 배였다. 1995년, 이란 인구는 영국 인구를 따라잡았다. 과거 유럽의 관대했던 국가 연금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금은 누가 낼 것인가? 실제로 UN은 동유럽 인구가 2050년까지 25%가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유럽에 이슬람 노동자 이민이 늘면서 갈등과 충돌을 예측할 수 있다. 중국은 언제나 대만을 반역자들의 소굴로 취급했고, 정식 독립을 선언하려는 대만의 시도는 군사 개입의 정당한 이유가 될 거라고 누누이 주장해 왔다. 중동에서의 미국의 위치는 불안하고 아시아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에너지 패권에 대한 갈등도 심화되고 있다.
100년 전, 서양은 세계를 지배했다. 100년 동안 유럽 제국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거듭한 뒤, 서양은 더 이상 세계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연약한 문명 체계가 급속히 무너질 수 있다. 20세기는 경제적 불안정이 빈부의 차가 커지면서 소수민족 집단들을 적대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제 20세기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을 한데 묶는 공통 요인들을 분명히 짚어 내야 한다. 우리 인간은 같은 인간에게 최악의 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린 지난 세기에 전쟁을 야기한 동인을 이해할 때 다음 세기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