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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묵상글 ( 성녀 모니카 기념일. - 속된 기준과 천상 기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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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속된 기준과 천상 기준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세속적 기준으로 지혜롭고, 유력하고,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당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어리석고, 힘없고, 비천한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속된 기준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나오기나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모든 능력과 지혜는 다 하느님께서 주신 건데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능력과 지혜와 출신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세속의 기준에서 지혜롭고, 유력하고, 고귀한 사람은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나는 그 후 세속을 떠났습니다.”라고 할 때처럼 세속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
세속 가운데 있는 사람인데 세속이란 말 자체가 하느님이 아니 계신 세상을
말하고 그런 사람은 세속 한가운데 있지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세속과 세상은 같은 듯 다릅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하느님 보시기에 선하고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계시지만 세속은 하느님이 아니 계신 세상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아무튼, 세속적인 사람은 하느님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여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죽었거나 안 계십니다.
우선 세속적인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하느님은 무시합니다.
무시無視라는 말은 한자어로는 없다고 보는 것이고 우리말로는 업신여기는 겁니다.
저는 우리말에 자주 감탄하는데 업신여긴다는 말은
거의 틀림없이 ‘없이 여긴다.’는 말의 변형입니다.
엄연히 있는데도 없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있는 자, 없는 자를 얘기하지만, 우리말에서도 있는 자, 없는 자를
얘기하고, 단지 돈이 없을 뿐인데 그런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을
세속에서는 없는 자로 취급하고, 아예 없는 존재인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인 사람은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도 무시합니다.
그러면 이런 세속적인 사람을 하느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오냐오냐하고 내버려 두실까요?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에게는 또 어떻게 하실까요?
성모 찬가에 잘 나와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세속적인 사람의 또 다른 본보기가 오늘 복음에서 한 탈렌트 받은 사람입니다.
앞서 본 세속적인 사람이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에서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의 뿌리에 ‘하느님 오해’와 ‘하느님 모독’이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은총의 하느님을 모질고 악한 분으로 아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또 어떻게 하실까요?
하느님께서는 그를 게으르고 쓸모없는 종이라고 하실 뿐 아니라
악한 종이라고 하시며 그를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은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세상에서 지혜롭고, 유력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내치시고,
세상에서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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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3)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의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믿음의 표시’인 이 달란트는 주인의 선물이요,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에 따르는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선물은 잘 보관하라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잘 쓰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선물은 이미 맺혀진 열매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종자돈과 같이 씨앗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와 셈을 할 때에 선물에 따라서 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어떻게 썼는지, 곧 그 소명을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따라 대가를 지불합니다. 결국, 선물에 따른 응답이 바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경기의 규칙인 셈입니다.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6)
사실, 은총의 선물은 항상 충만히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주는 대로 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만큼만 받습니다. 곧 비워진 만큼만 받게 됩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어야 비워지기에, 결국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선물을 움켜쥐고 있으면 움켜쥔 것마저도 잃게 됩니다. 사실, 그 선물은 애시 당초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선물을 받은 이가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충실하게 열매 맺는 이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은총’ 곧 하느님의 사랑, 먼저 주신 사랑이요, 둘째는 은총에 따른 ‘소명에 응답하여 충성을 바치는 일’ 곧 은총을 열매 맺기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은총의 열매를 맺을 힘도,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은총’과 ‘십자가’야말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이 지상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규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은총 그 자체보다도, 은총을 실현하는데 따르는 십자가 그 자체보다도)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아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5)
주님!
당신은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제게 탈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크신 당신의 사랑을 제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선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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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인과 함께 기쁨을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그릇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기반으로 나의 정성을 더 하여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합니다. 때때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댑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 것을 스스로 비교하여 놓고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둘은 자기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능력대로 주었으니 할 수 있는 만큼 활용하면 되는데 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탈렌트를 주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기대가 있었을 터인데 그 바람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처음부터 주인의 동기를 오해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더 벌지 못한 것에 대해 잘못하였다고 고백하면 될 것을 오히려 뻔뻔스럽게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마태25,24). 하고 주인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구제불능입니다. 주인님에 대해서 올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안에 가둬놓은 안다는 것이 병이었습니다. 자기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뭔가를 기대만 하는 사람은 불평불만, 합리화를 꾀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투덜댈 여유가 없습니다. 노를 젓는 사람은 배를 흔들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허락하신 각자의 탈렌트를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각자는 자기가 받은 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는 말씀은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뻔히 잃을 것을 알면 어떻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 성실하며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큰일을 맡으면 그야말로 큰일을 내고 맙니다. 매사에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량에 따라 귀한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며 적게 받은 사람에게서는 적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정해진 일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무엇인가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충실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증가시킬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에 충실함으로써 주님과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탈렌트가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많고 적고는 물론 크고 작음에도 상관치 않고 그저 최선을 다해 유용하게 쓸 뿐입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쓸 뿐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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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젊은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간 젊은이의 장례미사에 꼭 가고 싶었습니다. 오후 3시에 연도가 있고, 3시 30분에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오후 3시에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2시에 갔더니 다행히 예약시간이 아닌데도 서류를 받아 주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일이 10분 만에 끝났습니다. 미리미리 일을 하는 저의 성격 때문에 장례미사엘 갈 수 있었습니다. 장례미사를 하는 동안 아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신앙으로는 더 이상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하느님의 품으로 갔음을 믿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에 괴로워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성당을 가득 메운 교우들과 함께한 사제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그러기에 순간을 살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달란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능력을 존중하고, 업적에 따른 보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보험사는 고객을 많이 유치한 직원에게 특별 수당을 주기도하고, 휴가를 보내 주기도 합니다. 회사에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직원에게는 진급을 시켜주기도 하고, 특별 포상금을 주기도 합니다. 그만큼 회사에 기여한 공이 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능력과 업적을 세상의 기준으로 보상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성당을 많이 신축한 사제라고 특별 수당을 주는 경우가 없습니다. 선교를 많이 해서 세례를 많이 주었다고 더 큰 성당으로 보내는 경우도 없습니다. 수도자들은 장상을 했었지만 다시 평회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능력과 업적이 있다고 해서 특별한 보상이나 특혜를 주는 경우가 없습니다.
오늘 문득, 달란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길이는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100세까지 장수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한참 일 할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불의의 사고로 일찍 하느님의 품으로 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닙니다. 오래 살았다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일찍 죽었다고 하느님께 가지 못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25년을 살았지만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유대철 베드로는 13년을 살았지만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간의 길이가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채워 넣느냐 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채워 넣어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원망, 불신, 탐욕을 채워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겸손, 순명, 청빈입니다. 희생, 자선, 기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채워 넣는다면 짧은 삶이었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나는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채우려 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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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4kg의 회백질 덩어리인 뇌의 습성을 알려면 ‘멍게’를 보면 된다고 합니다. 멍게는 유충일 때는 뇌가 있어서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한군데 자리를 잡고 살게 되면 아주 특이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글쎄 자기 뇌를 먹어버린다고 하네요. 이제 움직일 일이 없으므로 뇌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뇌의 에너지 소비율은 아주 높거든요. 따라서 에너지 소비율을 줄이기 위해 자기 뇌를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뇌는 몸의 움직임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덕분에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몸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도록 뇌가 진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힘도 없고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또 날지도 또 물속에서 헤엄도 못 치는 너무 약한 몸을 가지고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뇌가 성장했습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키우도록 합니다.
이런 생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능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이에게 또 다른 길을 열어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인이 돈을 맡기고 떠나간 다음 능력에 따라 돈을 맡은 부하들의 활약상을 소개합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또 다른 다섯 탈렌트로 늘렸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두 탈렌트를 받았고 역시 두 탈렌트를 늘렸습니다.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는 주님의 일을 맡은 사람의 능력의 차이이며, 주님이 일을 맡길 때도 그 능력에 따라 은총을 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능력의 차이는 본인의 잘잘못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대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면 됩니다.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로 늘린 사람에 대한 주인의 평가를 보십시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땅에 묻어둡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인이 무서워서 한 행동이 아니라, 일하기가 싫어서 게으름을 부리는 직무 유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능력 차이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으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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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에스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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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성녀 모니카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하고 슬기로운 구원의 삶
-인생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이다-
끝은 시작입니다. 오늘로서 피정6일차 피정은 끝나지만 진정한 삶의 피정은 이제 시작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 파스카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성녀 모니카 기념일입니다.
제가 그리스도 예수님 다음으로 좋아하는 분들이 성인들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경축하는 성인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간절한 바램도 우리 모두가 본연의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이요,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습니다.
성인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확인하는 것이 생몰生沒연대요 저보다 많이 사셨나 적게 사셨나 확인하게 됩니다. 저보다 많이 산 성인들에게는 아직 노력할 시간이 있다 자위自慰하지만 적게 산 성인들에게는 더욱 분발奮發하게 됩니다. 모니카 성녀는 만55세를 살았으니 저는 20년을 더 살고 있는 셈입니다.
어제는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새출발하는 마음으로 온힘을 다해 강론을 썼고 온종일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마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또렷이 부각되는 제 내적 삶의 요약과도 같은 두 단어, ‘아픔’과 ‘목마름’이었습니다. 저절로 예전에 썼던 고백글이 떠오릅니다.
“아프고 목말라
눈떴고,
눈뜨면
아프고 목말랐다.”
주님으로 인한 아픔이요, 주님을 향한 목마름입니다. 이런 아픔과 목마름이 영적 삶의 원동력이요, 새벽 일찍 일어나 강론을 쓰게 합니다. 여전히 계속될 근원적 아픔이요 목마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을 벌써 몇 년째 매일 확인하며 읽어 봅니다. 아직까지 이런 공감과 깊이와 진정성을 지닌 강론이나 글을 본적이 없습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얼마전 읽은 영문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영어가 더 강력한 느낌을 줍니다.
“Christ is alive!”(그리스도는 살아계시다!)
“You are the ‘now’ of God”(여러분은 하느님의 ‘지금’이다)
지난 주일 삼종기도후 강론중 한 대목입니다.
“Therefore, this door is narrow, but is open to everyone! Do not forget this. The door is open to everyone!”(그러므로, 이문은 좁으나,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평범한 말마디이지만 은혜롭고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 비유중 유난히 애착이 가는, 연민의 마음을 갖게하는 세 번째 한탈렌트 받았다가 한탈렌트 고스란히 주인에게 돌려 주는 소심하고 위축되어있고 의심 많은 종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부정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자존감도 극히 낮고 열등감도 컸을 종입니다. 종과 주인의 대화가 실감나게 전개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이래서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님으로 상징되는 주님을 너무 몰랐습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정말 주인을, 주님을 사랑하여 알았더라면 한탈렌트 은총의 선물을 최대한 활용하는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성취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충실성, 성취의 질을 보십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절대 평가지 상대 평가가 아닙니다. 남과 비교할 것 없이 자기 받은 몫에 최선을 다하면 될뿐입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님을 몰랐고 자기를 몰랐습니다. 주님을 몰랐기에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우리가 하느님의 “지금”임을, 구원의 문은 좁으나 모두에게 열려 있음을 알았다면 이렇게 태만하고 무책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평상시 주님을 항구히 열렬히 사랑하여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았다면 앞서의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받아 최선의 노력을 다해 좋은 성과를 낸 종처럼 분투의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런 주님의 칭찬을 들으며 매일 미사에 참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앞서의 두 착하고 성실한 종과의 대조가 너무나 극명한 후자의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해 노력한 착하고 성실한 종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주님을 알았고 자기를 알았던 종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다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 탈렌트에 감사하여 힘껏 활용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평생 주님 사랑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 평생 공부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 때 비로소 나를 알아 은총의 선물을 활용하는 평생과제를 충실히 실행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읽은 교황님의 권고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먼발치에서 삶을 관조하지 마십시오. 행복은 안락의자가 아닙니다. 화면 앞에서 여러분의 삶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마치 버려진 차량처럼 비참한 상태가 되지 마십시오. 주차된 차량처럼도 되지 말고, 자유롭게 꿈꾸고 좋은 결정을 내리십시오.
비록 실수를 할지라도 위험을 감수하십시오. 무기력하게 근근히 살아가거나 마치 구경꾼처럼 세상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진취적으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을 무력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미라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활기차게 살아가십시오! 최상의 삶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을 내어 주십시오! 새장을 열고 밖으로 나가 날아오르십시오. 제발, 조기 퇴직자처럼 되지 마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말씀 역시 큰 힘이 됩니다. 내 받은 탈렌트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의욕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리석다, 약하다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선택의 은총에 감사하고 받은 탤런트를 최대한 활용하고 선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하나될수록 우리는 우리의 탤런트의 선물을 잘 발견하여 최대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착하고 슬기로운 종의 모범이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모니카입니다. 객관적으로, 세상 눈으로 볼때 출신도, 가문도 참 보잘 것 없는 모니카였지만 자신의 받은 탤런트를 100% 발휘한 성녀입니다. 참으로 눈물로 기도하며 집요하게 아우구스티누스를 돌보았기에 우리는 불세출不世出의 위대한 교회학자를 지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들 아우구스티누스 때문에 노심초사 눈물의 기도를 바치던 모니카가 타가스테의 주교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주교의 “안심하십시오. 그런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에 큰 위안을 받았다 합니다. 성녀의 임종 전 아우구스티누스에 한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는 것!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과분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내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내 몸뚱이사 어디다 묻던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한가지만 너한테 부탁한다. 네가 어디 있던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 다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내 받은 탤런트, 은총의 선물을 최대한 활용으로 평생과제를 잘 실행한 이들이 성인들이요, 우리 모두 이런 성인들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앞에서 우리의 탤런트 활용을 점검해 보는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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