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보면서 걷는 길로 농로, 임도, 숲길 등 다채로운 길들로 이어진 길이다.
조림현상과 산불로 깊게 데이고 다친 지리산의 상처를 만난다.
아름다운 길에서 만나는 상처는 더욱 아프고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생각하게 한다.
남한의 3대 길지 중 한 곳으로 알려진 운조루도 이젠 기운이 다한 느낌이다.
송정마을–송정계곡(1.8km)–원송계곡(1.4km)–노인요양원(2.7km)–오미마을(4.5km) 《총 10.4km》
지난 달에 걸음을 멈추었던 송정마을에 다시 왔다.
이 마을은 소나무 정자가 있어 소정, 솔정이라고도 불렀다.
송정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금령 김씨가 피난을 내려와 자리를 잡은 곳이라고 한다.
들머리부터 가파른 비탈길이 나타나서 긴장하였다
9월의 15구간에서 어찌니 땀을 많이 흘렸던지 걱정했지만....^-^
여기저기 산불에 그을린 소나무들이 애처롭다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서도 희망은 자라고 있었다.
지리산은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중이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의승재란 푯말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사과와 대추를 나누어 먹으며 쉬어갔다.
16구간은 갈림길이 많아서 길을 잘못 들 염려가 많은 곳이다
누군가 이렇게 표시를 해놓아서 큰 도움이 되었다.
산꾼들은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기에 인색하지 않다
정유재란 때 의병들이 백병전으로 계곡물을 피로 물들여 석주곡수라 불리던 원송계곡이다
이 길은 역사엔 결코 아름답지만 않았던 고난의 길이며, 통한의 길이였다.
토지면 송정리 석주곡에서 발원하여 칠의사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올해는 감이 풍년이다
감나무 밑에 떨어진 감만 주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진실로 고백컨데...나무에 달린 감은 절재 손대지 않았다.
꾸지뽕도 먹음직스럽게 여물어가고 있었다.
꾸지뽕이라는 이름이 참 재미있다.
'굳이 따지자면 뽕나무'라고 하여 '꾸지뽕나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꾸지뽕 열매는 항산화작용을 하고, 혈액을 깨끗하고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풍경을 버리고 떠나서
머뭇대다
마침내 구부러지는 길처럼
저마다의 생각에만
골똘히 빠져 있는
도로 표지판처럼
문 닫은 겨울의 해수욕장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에
이마 찡그린 낮달처럼
더듬더듬 몇 마디 말마저도 삼켜버리는
흐린 밤의 별들처럼
차창 가에서 서성대다, 두드리다
울다가 돌아서는 비처럼
가슴 안 컴컴하게 고여 오는 말들이 긁어대는
절망에서 노래 사이
아슬아슬 걸쳐 있는
너라는 이름의 현(絃)들처럼.........................................................한국현 <첼로처럼> 전문
둘레길은 구례군 노인전문 요양병원을 돌아서 간다
국비와 군비를 들여 만든 노인전문 요양병원이다.
치매와 같은 중증 노인성 질환으로 고통받는 노인들에게 다양한 복지혜택을 주고 있다.
노인요양병원을 돌아가면 매우 가파른 오름길이 나타난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올라 고갯마루에 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중간중간에 이렇게 낭만적인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과 자그마한 마을들이 정겨웠다.
쉼터에서 내려다보이는 파도마을은 약 300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바더리, 바다리라고 불리웠는데 배를 대는 곳이라는 뜻이다
지리산 왕시루봉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는 명당터다.
단풍나무도 서서히 가을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처럼 생긴 씨앗을 바람에 날려 자손들을 번성케 할 것이다.
솔까끔마을은 근래 새로 조성된 전원주택단지다.
이름이 유별난 솔까끔 마을은 왕시루봉 아래 해발 200m에 자리하고 있다.
'솔'은 소나무, '까끔'은 ‘동산’의 전라도 방언이다.
솔까끔마을을 지나 내죽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문수저수지를 만난다
문수저수지는 1995년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도 둑 높이기를 통해 저수량을 늘리고 있다고 한다.
문수저수지 아래에 아늑하게 들어선 내죽마을을 지나간다
대나무와 문수천의 시냇물을 따서 ‘대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죽마을과 하죽마을은 서로 이어져 있다.
'하죽'은 대나무골의 아래쪽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누군가가 멋지게 꾸며놓은 테라스가 길손들의 시선을 끌었다.
내죽마을과 하죽마을을 지나서 오미마을로 들어선다.
본래 오동이라 불리다 조선 중기에 유이주가 이주하면서 '오미리'라 개칭해 지금에 이른다.
오미(五美)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담았는데, 월명산. 방장산. 계족산. 오봉산. 섬진강이 그것이다.
오미슈퍼에서 막걸리잔을 돌리면서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
운조루(雲鳥樓)는 조선 영조 때 류이주 선생이 구례 오미리에 지은 양반가옥이다
당시 99칸이었던 운조루는 현재 73칸이 보존되고 있다.
오미마을에 지은 이유는 오미리가 남한의 3대 명당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길지이기 때문이란다
행랑채에 있던 뒤주는 유물전시관으로 옮겨져 옛 정취가 사라져 버렸다.
굴뚝을 마루 밑으로 내어 밥 짓는 연기가 높이 날리지 않도록 했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밥 짓는 연기는 큰 고통이라는 것까지 주인은 헤아렸다.
동학혁명과 여순사건,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도 운조루가 건재했던 이유다
유씨 가문의 후손인듯한 노인이 입구에서 입장료를 천원씩 받고 있었는데...을씨년 스럽다
섬진강 자락 타고 내려온 물줄기
시나브로 젖어드는 밤
어디서든 꽃 피고 지고 반복되지만
나의 꽃은 단 한번
붉은 기운 속에 혼절한 사랑이었으면 한다
한 페이지 차르르 또 한 페이지 차르르
쉼표 없이 꽃향기 지리산 허리를 타고 넘어갈 때
불현듯 새떼 울음 매달고 사라지는 구름.......................................................항구하 <운조루의 봄밤> 부분
운조루 유물전시관에서 ‘타인능해(他人能解)’라 쓰인 뒤주를 만났다
‘타인능해(他人能解)‘란 '아무라도 마개를 풀어 쌀을 가져가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품의 정신을 알려주는 본보기다.
오미마을 끝에 있는 '오미정'이란 정자에서 깃발을 펼치었다.
오늘의 트레킹이 수월해서 그랬는지 모두의 표정이 여유로워 보인다.
이곳은 16구간의 끝이면서 17구간의 시작점이다.
아직도 황보회장님을 흠모하는 여인네들이 많아서 질투가 난다 ㅋㅋ
첫댓글 둘레길도 세번이면 종착역에 도착합니다
많은 추억 쌓아준길 역순으로라도 한번 더 걷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