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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풀숲
도오루는 아까부터 자신의 방 소파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도오루는 오늘 오랜만에 아사히가와의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에 저녁 햇살이 비치고 시험림 쪽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7월에 접어들어 뻐꾸기 울음소리가 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흰색으로 회칠을 한 천장에 나 있는 엷은 얼룩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였다. 그 얼룩은 도오루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그 얼룩이 숨을 쉬며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았다. 도오루는 그 얼룩을 바라보면서 미쓰이 게이코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후 열흘이 지났다.’
열흘 동안 게이코의 몸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도오루는 게이코가 걱정이 되었다.
게이코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카기 어머니의 장례식 다음날 아침이었다. 무심코 전날 석간 신문을 펼쳐 보고 미쓰이 게이코의 사고를 알게 되었을 때, 도오루는 너무도 놀랐다. 사고를 당한 시간은 도오루와 헤어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정차해있는 트럭을 게이코가 뒤에서 들이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게이코의 심리 상태를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사고 원인은 너무나 명백했다.
도오루는 신문을 집어 던지고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외과 병원의 현관 앞에 섰을 때 그제서야 도오루는 들어가야 할지 어쩔지 망설여졌다. 자신이 찾아온 것이 게이코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렇다고 문병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고는 어젯밤에 일어났다. 아마도 게이코의 가족들이 병원에 와 있을 것이다. 도오루는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게이코의 병실을 찾아갔다.
게이코의 병실은 3층 독방이었다. 도오루는 또다시 망설여졌으나 용기를 내어 노크했다. 남자의 대답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도오루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오타루의 이로나이 거리 언덕에서 만났던 그 친절한 청년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좀 어떠십니까?”
도오루는 게이코의 침대로 다가갔다. 게이코는 창백한 얼굴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 옆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의자에 앉아 도오루를 바라보았다.
“많이 걱정하셨죠? 부상은 심하지 않습니까?”
도오루는 공손하게 청년에게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무릎 관절이 골절되었대요. 깁스를 하고 석 달쯤 입원해 있어야 한다나 봐요.”
청년은 그 언덕에서 만났을 때처럼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문득 미심쩍은 듯이 도오루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뵌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름을 잘모르겠군요. ……실례지만 누구시지요?”
청년은 도오루를 기억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은 도오루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자신의 집 근처를 서성거렸다는 걸 알고 있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이다. 도오루는 얼른,
“전 다카기 씨 댁……”
하고 말긑을 흐리고는 머리를 숙였다. 감수성이 예민해 보이는 소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 다카기 선생님 댁의……선생님 어머님께서 갑자기 그렇게 되셔서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청년은 도오루를 다카기 병원의 의사로 보았는지 싹싹하게 말했다. 그때 게이코가 눈을 떴다. 도오루는 게이코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죄송합니다. 전……”
다시 소년의 눈이 빛났다. 게이코는 도오루를 지그시 바라보고 나서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것은 염려할 것 없다는 뜻 같기도 하고 잠자코 있으라는 뜻 같기도 했다. 소년이 말했다.
“죄송하다니 무슨 말이죠?”
소년은 날카로운 눈으로 도오루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오루는 움찔했다.
“다쓰야, 못써. 그런 말버릇이 어디 있어. 다카기 선생님의 집안 사람이시기 때문에 죄송하다고 하신 거야.”
소년은 머쓱한지 잠자코 있었다.
“죄송해요. 제 동생은 원래 얌전한데, 어머니를 끔찍이 생각하는 아이라 사고 이후로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졌어요.”
청년이 변명했다. 게이코가 입을 열었다.
“기요시, 쓰지구치 씨에게 의자를 갖다 드리렴!”
가냘픈 목소리였다. 도오루는 한시름 놓았다. 게이코는 도오루를 원망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게이코의 말과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게이코의 눈을 바라보면서 도오루가 말했다. 게이코는 다시 고개를 가볍게 옆으로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 어제 석간을 보고 너무도 놀라……”
게이코는 세 번째로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다쓰야는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복도로 나온 도오루의 콧등에 담이 맺혀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게이코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좋았다. 신문에는 중상이라고 보도 하고 있어 도오루는 산소 마스크를 쓴 피투성이의 게이코를 연상했었다. 어쩌면 한평생 불구의 몸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도오루는 겁에 질려 뛰어왔었다.
그때 병원 현관 복도 쪽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다카기를 만났다.
“아니, 어디가 아픈 거야, 아니면 장례식으로 지친 거야?”
도오루는 잠시 방설이다가 말햇다.
“아저씨, 방금 그분을 만나 뵙고 오는 길이에요.”
“그분?”
다카기의 짙은 눈썹이 여덟 팔자를 그렸다.
“저, 오타루의 그분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왔습니다.”
다카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로 문병을 온 거야?”
“…………”
“도오루, 신문에 났다고 해도 너와는 관계없는 일 아니냐.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마.”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사고의 원인이었어요.”
“사고의 원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다카기는 복도 의자로 도오루를 데리고 갔다. 도오루는 불공드리던 날 밤 산아이 호텔에서 게이코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다카기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엄한 눈빛으로 도오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코에 대해 이야기하고 돌아가던 길이었어요. 아니, 그 직후였어요. 제 탓이에요.”
다카기는 잠시 말없이 도오루를 바라보고 있다가 내뱉듯이 말했다.
“바보 같은 녀석 같으니……너도 운전을 하니 알겠지만, 운전하는 사람에게 술을 먹여서는 안 되잖아. 네 얘기는 술보다 독한 거야. 그러니 사고가 난 게 당연하지.”
“죄송해요!”
“아니, 미안한 건 오히려 내 쪽이지. 미안하게 됐다. 누가 나쁘다고만도 할 수 없겠군. 게이코 씨도 말하자면 자기가 뿌린 씨를 거둔 셈이야. 뭐 인간 세계의 일은 어느 한 사람만이 나쁘다고 잘라 말할 수 없는 거야. 헌데 이거 야단인걸.”
“죄송합니다.”
“이제 그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 좀 해. 난 그저 어머니 장례식 때문에 늦게 돌아가다가 당한 사고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뭐 할 수 없지. 근데 도오루, 설마 병실에서 허튼 소리는 하지 않았겠지?”
“네. 그냥 선생님의 집안사람인 것처럼…….”
“그래, 잘했어. 이제 다시는 문병 올 것 없어. 귀찮아지니까.”
다카기가 이렇게 말하고 일어났을 때 도오루는 움찔했다. 5,6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저쪽 벽에 팔짱을 끼고 기대 서 있는 다쓰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방금 다카기와 나눈 얘기를 모두 들업머린 건 아닐까하여 도오루는 불안한 마음으로 총총히 현관을 나왔다. 그때 다쓰야가 뒤쫓아와서 말했다.
“어머니는 15년이나 차를 운전해 왔지만 한 번도 사고를 낸 적이 없어요.”
이 말만 하고 다쓰야는 몸을 홱 돌려 가버렸다.
도오루는 다쓰야를 생각하면서 다시 천장에 있는 얼룩을 쳐다보았다. 도오루는 외곬으로만 생각하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순수해 보이는 다쓰야가 왠지 두려웠다.
“아직 자고 있니, 도오루?”
나쓰에가 방으로 들어왔다.
도오루는 말없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휜 바탕에 감색 소용돌이 무늬가 있는 유카다 차림의 어머니가 오늘은 부드럽게 보였다.
“밥 먹어라, 도오루.”
“아까 기차 안에서 먹어서 괜찮아요.”
“저런….모처럼 새우 튀김을 했는데…..근데 왠지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네, 좀 피곤해요. 새우 튀김은 나중에 먹을게요. 오랜만에 맛보는 어머니의 요리 솜씬데…..”
도오루는 오늘은 어머니에게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나쓰에는 기쁜듯이 도오루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그럼 좀더 쉬어라.”
하고 도오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어머니…..”
“응?”
“아니, 아무것도 아녜요.”
도오루는 게이코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너 오늘 어딘지 이상하구나…..아참, 도오루, 오타루의 미쓰이 씨 말이야, 교통사고를 당한 모양이야.”
도오루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모르고 있었니, 도오루? 다카기 아저씨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던 길이었대.”
“…………”
“얼마나 다쳤는지 걱정이구나.”
도오루는 창가로 눈길을 돌린 채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이 장례식에서 돌아가는 게이코를 만난 것과 문병을 간 것을 다카기는 언젠가 부모님께 말할지도 모른다. 도오루는 엎드린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누구한테서 들었어요, 어머니?”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차 안에서 신문을 봤어. 많이 놀랐어, 엄마도.”
“요코도 알고 있어요?”
“아니, 알리는 게 좋을까?”
“아뇨. 알려도 별 수 없잖아요?”
“하지만 도오루, 만에 하나라도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요코에게는 어떻게 해야 되지?”
“………그쪽에서 만나자고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렇지 않으면……그러고 보니 역시 낳기만 한 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묘한 관계군요.”
나쓰에는 생긋 웃었다. 도오루가 자신의 곁에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의 도오루에게서는 가시 돋친 듯한 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나쓰에는 도오루가 자신의 곁으로 완전히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럼 천천히 쉬어라.”
나쓰에는 문가에서 다시 한 ㅂ먼 돌아보고 방을 나갔다.
‘만에 하나라도 죽었다면?’
도오루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요코를 낳은 사람을 자신이 죽인 것이 된다.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햇다. 다행히 3개월만 입원해 있으면 된다고 들었지만 어떤 후유증이나 합병증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도오루는 불안했다.
도오루는 피곤하여 얼마쯤 잠을 잔 것 같았다. 꿈속에서 도오루는 요코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요코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안해, 요코. 미안해, 요코.”
도오루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사과했으니, 요코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도오루는 견딜 수가 없어,
“요코, 요코!”
하고 끊임없이 외쳤다. 그리고 분명히,
“요코!”
하고 부르고 나서 잠을 깼다. 방안은 캄캄했으나, 하늘은 이제 겨우 저물어 가고 있어 노란 하늘이 창문을 통해 보였다. 도오루는 전등을 켜고 계단을 내려갔다. 요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목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등을 밀어 준다. 도오루는 부엌에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은 냄비, 윤기 나는 마룻바닥, 그런 것들이 오늘은 이상하게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언제나 한결같이 깨끗한 부엌이 괜히 쓸쓸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상했다. 도오루는 물을 마시려고 하닥 그만두고 요코의 방으로 갔다.
“요코, 안에 있니?”
미닫이가 열려 있고 레이스로 만든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 레이스를 통해 유카다 차림의 요코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왔어, 오빠?”
요코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험림 쪽에서 방충망을 친 창문을 통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좀 나아졌니?”
도오루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응, 좋아졌어. 배고프지 않아, 오빠?”
“아니, 웬일인지 요즘은 입맛이 없어.”
“그래? 더위를 타서 그런가?”
요코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도오루는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방금 요코 네 꿈을 꾸었어. 너한테 자꾸만 ‘미안, 미안’하고 사과하는 꿈을 말이야.”
“어머, 어떡해. 오빠가 사과할 일이 뭐 있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나란 인간은 누구에게나 사과해야 해.”
도오루는 게이코를 생각했다. 요코의 긴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오빠, 무슨 일 있었어?”
진지한 목소리였다.
“응, 있었어.”
“무슨 일인데?”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언젠가는 말할 때가 오겠지만. 어쨌든 말이야, 요코, 난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활태도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어. 어쩐지 아주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잘못 살아왔다고? 왜? 오빠가 그랬다고는 절대 생각되지 않는데…..”
상쾌한 저녁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아냐, 요코. 난 잘못 살아왔어. 왜 모래사장이나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말야, 난 분명 똑바로 걸어온 줄 알고 있는데 돌아보면 ㅂ말자국이 삐뚤삐뚤나 있는 경우가 있잖아?”
“맞아. 마치 비틀거리며 걸은 것 같은 경우도 있었어.”
요코는 자살을 하려고 했던 날의 겨울 아침을 회상했다. 제방에 올라가 돌아보았던 자신의 흐트러진 발자국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인간이란 그런 거야. 자기 딴에는 올바르게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어. 나도 나 자신을 참으로 올바른 인간으로 알고 있었어.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 요코.”
“하지만 오빠는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봐.”
미쓰이 게이코가 차를 운전하여 돌아가야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은 충격적인 말을 했었다. 그것은 다카기의 말대로 ‘운전하는 사람에게 술을 마시게 한 것보다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 ㄴ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건 다름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남을 탓하는 생각이 아닐까. 어머니를 탓하고 아버지를 탓해 온 생각이 게이코도 탓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남을 탓하는 마음이 그런 사고를 내게 한 것이다.
“오빠, 정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아무래도 걱정 돼.”
“아니야, 다만 나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태도에 자신을 잃은 것뿐이야.”
“어머,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오빠도.”
“그래? 요코는 스스로 죄가 많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겠지? 난 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나라는 인간이 왠지 천박하고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도오루는 게이코에게 말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창백한 얼굴을 생각하면 도오루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요코는 문득 도오루가 여자 문제로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오루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
“오빠, 나도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요코는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나도 그걸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어.”
도오루는 난생 처음으로 요코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었다.
“난 말이야, 오빠, 강변에서 죽으려고 생각한 그 이전까지는 나 자신을 올바르다고 생각했어. 죄가 많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난 스스로를 너무 긍정하고 있었어. 긍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으려고 생각했던 거야.”
“요코는 죄가 많지 않아. 깨끗한 인간이야.”
“그건 거짓말이야. 나도 혐오스러운 인간이야, 무척.”
요코의 격렬한 말투 속에서 도오루는 요코의 깊은 슬픔을 느꼈다.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요코, 넌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을 탓하거나 하지 ㅇ낳는 인간이잖아.”
“그래, 오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어. 난 분명히 남을 탓하는 게 싫었어. 부드러운 말로 남을 대하려고 생각해 왔어. 하지만 인간이란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있어도 어쩔 수 없이 혐오스러운 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
“아버지는 꿈속에서 한 일도 자기 책임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 무의식의 자신도 있다고 하셨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신이 있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지만, 인간이란 그런 무책임한 존재인가봐.”
도오루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빠, 오늘 나 고아원에 갔다 왔어.”
“고아원에? 뭣하러 갔냐고 묻는다면 어리석은 질문이 될까?”
“실은 유아원에 가보고 싶었어. 나 자신을 찾아보기 위해서. 나한테는 아무래도 그러는 게 필요할 것 같아서, 하지만 아사히가와에는 유아원이 없잖아.”
“그렇지. 그래서 고아원에 갔었니?”
“응……..아이들이 이렇게 물었어. ‘누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했어?’ 하고,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나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말이야. 맨 먼저 그런 말을 물었어. 그 애들에게는 그게 가장 큰 문제였던 거야. 결혼했다고 말했더니 ‘그럼 됐다’고 하잖아 . 그 애들은 자기들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은 것 때문에 슬픔을 느꼈던 과거를 갖고 있었어.”
“음, 3,4학년짜리 아이들이 말이지…….”
“나도 결혼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지 않았잖아.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된다는 건 무책임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절대 무책임한 기분으로는 말이야.”
“그렇고말고.”
“나도 참 나쁜 인간이야. 그 애들을 보니 그 애들의 부모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어. 그리고 나를 낳아 준 사람도 말이야. 난 한평생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낳아 준 사람만은 만나고 싶지 않아. 참 무서운 말을 하지, 나?”
도오루는 팔짱을 끼고 요코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요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옛날의 요코였다. 그러나 어딘지 다른 데가 있었다.
“그래? 오타루의 어머니는 평생 만나지 않을 거야?”
도오루는 약간 엄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있어.”
요코는 딱 잘라 말햇다.
“그럼 요코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거야?”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오루는 이마에 손을 얹고 잠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얼굴을 들고 말했다.
“내가 아까 내 생활태도에 자신을 잃었다고 말했지?”
도오루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응, 그렇게 말했어. 난 그게 마음에 걸렸어.”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넌 모를 거야.”
“…………”
“난 말이야, 요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어.”
요코는 깜짝 놀라며 도오루를 바라보았다. 역시 여자 관계일 거라고 생각했다.
“실수?”
“응, 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혔어.”
“어머, 큰 상처를?”
“응. 상대방이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요코?”
“몰라.”
요코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말이야, 이 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 말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지금 요코의 말을 듣고 있다보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요코, 내가 다치게 한 사람은 말이야, 미쓰이 씨야.”
“뭐?”
요코는 깜짝 놀랐다.
“그분을 어머니로 생각하지 않는 요코에게는 관계가 없는 얘길 테지만.”
요코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도오루는 미쓰이 게이코를 만나게 된 경위며 교통사고에 대해 간단히 말했다.
“나도 요코와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무심코 그분을 비난하고 말았어. 하지만 그분은 아주 침착했어. 그런데 그 직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어. 결국 내가 경솔했던 거야.”
도오루는 자신을 비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분 역시 몹시 괴로워했어. 그런데도 난 칼로 도려내는 듯한 말을 해 버렸어……”
“…………..”
“밖으로 나갈까? 난 오늘 너하고 좀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
요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오루의 뒤를 다라 뜰로 나왔다. 시험림의 어두운 나뭇가지 사이로 불그레한 반달이 낮게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게이코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은 요코의 심정은 착잡했다.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려 해도 역시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풀숲에서는 뭔지 모를 벌레가 울고 있었다. 멀리서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도오루와 요코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키 큰 슽트로브소나무 숲 속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조용하구나.”
도오루는 팔짱을 끼고 나뭇가지를 쳐다보았다.
“정말 조용하네, 숲 속은.”
요코가 벤치에 걸터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숲 속의 풀숲이 차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풀숲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요코, 난 말이야, 오타루의 그분을 만나보고 여러 가지 일들을 알게 된 것 같아. 나카가와 미쓰오라는 남자가 유부녀인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그분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도 말이야.”
“………..”
“나도 그분이 좋아졌어. 너랑 닮지 않은 면도 많았지만 역시 비슷했어. 그분은 남편이 있는 몸으로 사랑을 한 거야. 하지만 그 사랑은 아름다웠다고 생각되었어.”
부채로 발치의 모기를 쫓던 요코의 손이 멎었다.
“아름다울 것 없어, 오빠.”
가로막듯이 요코가 말했다.
“왜? 요코도 그분을 만나보는 게 좋을 거야. 그럼녀 반드시 이해하게 될 거야. 그분은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분이야.”
“오빠,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 어떻게 남편을 배신하고 자기 자식을 버릴 수가 있어?”
요코의 격한 말에 도오루는 잠자코 요코의 곁에 앉았다.
“오늘 내가 만난 고아원 아이들도 서로 사랑하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애들을 난 결코 아름다운 열매라고 생각할 수 없어. 너무나 비참해.”
요코다운 결백한 분노였다.
“네 심정도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말이야, 내가 너무 단순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역시 난 요코에게 자신을 낳아 준 친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다움이 있었으면 해.”
“그럼 오빠, 내가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남편을 배신하고 자식을 버린 사람에게 조금도 화내지 말고 무작정 그리워하란 말이야? 싫어, 난. 난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어. 지금부터 그런 어른을 미워할 수 없다면 슬퍼.”
“미안해, 요코. 네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냐. 하지만 그분은 앞으로 3개월 동안 입원해 있어야 할 만큼 중상을 입었어. 그렇게 된 원인이 내 경솔한 행동에 있었던 만큼 난 요코가 그분을 용서해 줬으면 싶어.”
요코는 차츰 기울어 가는 달을 소나무 가지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한 점이 달을 스쳐 지나갔다.
“난 사람 관계가 무서워.”
“사람 관계가 무섭다고?”
“두려워. 사람을 알게 되고 친해지는 것도 모두 무서워.”
“그럼 나도 무섭니?”
요코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무서워, 오빠도.”
“왜? 어째서 내가 무섭지?”
요코는 부채로 쉴 새없이 발치의 모기를 쫓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내가 무서운 거야?”
도오루가 다시 물었다.
“오빠만이 아니야. 아무튼 난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무서워. 어떤 방법으로 어울린대도 결국은 상처를 입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인연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무서워. 오빠가 제일 무서워.”
도오루는 불현듯 숨을 죽였다. 그렇다면 요코는 기타하라보다 자신을 인연이 더 깊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가?
“난 말이야, 오빠. 그래서 경솔하게 움직일 수 없어, 어떤 일로든. 오타루의 그분에게도……”
도오루의 감정을 누르는 듯한 조용한 목소리였다. 도오루는 요코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그런데 말이야, 요코, 나 아까부터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뭔데, 오빠?”
요코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미쓰이 게이코와 비슷했다.
“요코, 너한테 가장 소중한 게 뭐야? 목숨?”
“글쎄, 그럴지도 몰라.”
“난 말이야, 지금까지 네가 남이 보내 온 선물을 언제나 고마운 마음으로 받는 것을 볼 때마다 늘 감탄하곤 했어. 꽃 한 송이를 받고도 아주 기뻐해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오빠. 옷보다도 반지보다도 소중한 목숨을 준 분에 대해 좀더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래, 요코. 그분은 적어도 요코를 낳아 준 사람이야.”
“낳고 싶었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 못써, 요코. 그건 너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니까.”
“하지만 낙태수술이 허용되는 시대였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날 낳지 않았을 거야.”
“아냐. 얼마든지 없앨 방법은 있었어. 그 당시에도 말이야. 약 같은 것도 있었던 모양이야. 아, 지금 갑자기 생각났은데, 우리 병원에서 올해 두 발이 없는 아기가 태어났어. 그 어머니가 약을 여러 번 먹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렇게 된 거지.”
“어머, 무서워.”
“무서운 일이지. 게다가 가엾게도 손가락은 세 개뿐이었어.”
“어머. 끔찍해라!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아이 일생은?”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그 애의 부모는 그런 애를 키울 수 없다고 했어. 남 보기도 부끄럽고 부부 사이도 나빠질 거라면서 말이야.”
“정말, 자기 멋대로야. 너무해. 그런 약을 먹은 건 아기가 아니라 어머니 아냐. 자신이 한 일에 아무 책임도 느끼지 않나봐.”
“지우려고 작정했을 정도니까.”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사지육신 멀쩡하게 낳아 준 부모님께 우린 무조건 감사해야 해.”
요코는 잠자코 있었다.
“가장 소중한 목숨을 준 사람은 어쨌거나 부모니까.”
“오빠, 난 사람에게는 목숨보다도 소중한 게 있다고 생각해.”
조용하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낳고 싶어서 낳았는지 낳을 의사가 전혀 없었느데 낳았는지 그런 건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 태어났어. 하지만 그런 출생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
“요코는 너무 엄격해.”
도오루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엄격한 걸까, 내가? 난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빠, 인간의 출생은 아주 소중한 거야. 그건 오빠도 내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만일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유아원에 맡겨지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쓰지구치의 어머니에게 구박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사이시의 달로 오인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자살을 기도할 만큼 궁지에 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응, 잘 알고 있어.”
“아니, 모르고 있어. 알고 있다면 오빠도 오타루의 그분을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오빠, 우린 젊어. 난 적어도 우린 결백한 분노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요코, 너한테 지금 중요한 것이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일까? 사람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상황에 어떤 결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는 거야, 오빠. 불의의 씨로 태어났다는 것이 내 마음에 얼마나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지 알아? 난 시궁창 속에 태어난 셈이야. 그래도 난 쓰지구치 가에서 맡아 길러주었느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