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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날씨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낮 기온도 30도를 넘어가기 힘들어합니다. 거참, 한 주 사이에 이런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무튼 절기로 보아 처서도 지났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빠른 것 아닌가요? 보통 9월 초나 중순까지도 더운데 말입니다. 추석이 조금 빠르기는 합니다. 어쨌거나 금년 8월에는 햇빛보다 빗방울을 많이 맞은 것 같습니다. 농작물이나 과수에 탈은 없을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이제 곧 9월입니다. 모두 물가 걱정하고 있는데 그다지 나아질 기미는 없는 듯합니다. 어쩝니까, 그냥 버텨야지요. 여태 그렇게 살았습니다.
면허증 갱신, 적성검사를 받아야 한답니다. 문의하였더니 병원에서 발급한 시력검증서와 여권사진 한 장을 가져오랍니다. 그곳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찍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사진으로 한 장 가져와야 한답니다. 거참, 모두 디지털화해 가는데 경찰서만 제자리걸음하고 있나? 아무튼 준비하여 갔습니다. 서류를 보더니 시력이 0.7/0.7이네요. 안 됩니다. 1급 보통은 0.8이상이 되어야 한답니다. 세상에! 그러면 안경 쓰고 시력검사를 해도 됩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0.8 이상을 만들어오랍니다. 몰랐네요, 거참! 다시 안과에 가야겠습니다. 안경 쓴 0.8보다 멀쩡하게 0.7이 훨씬 나은 거 아닌가요? 하지만 공무원과는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법대로’에 눌립니다.
짜증나는 하루를 지냈습니다. 아무튼 주말은 즐겁게, ㅎㅎ!! 환경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2년 8월 27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욥기 26 : 7 - 8)
<놉>
우리는 왜 두려워할까요? 아마도 대부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입니다. 물론 아는 대상도 많습니다. 요즘이야 거대한 공룡 같은 두려운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도 두려운 대상들은 주변에 많습니다. 종종 사고가 나고 있지만 길에서 도사견을 만난다면 주인이 줄로 제어를 하고 있다 해도 지나가기 두렵습니다.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무섭지요. 크지 않더라도 숲에서 갑자기 지나가는 뱀을 만나도 두렵습니다. 잘 아는 대상도 두려운 존재는 많습니다. 특히 늦은 밤 어둑한 골목길을 지나며 사람이 마주 다가올 때도 은근한 두려움을 가집니다. 어른들 말로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잖아요. 사람은 배고파서가 아니라 단순히 욕심을 채우려고 또는 방어본능이 아니라 그냥 장난삼아 해칠 수도 있는 동물입니다.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대상을 맞닥뜨리면 두렵습니다. 우선 나를 해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물론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서로가 경계하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 그냥 스쳐지나간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서라도 해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것을 모르니 경계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대상, 지구상에도 아직 많겠지만 저 무한한 공간, 우주 밖에는 어떨까요? 지구를 벗어나본 것은 겨우 한 세기도 되지 않습니다. 물론 상상으로는 오래 전부터 그려왔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우리에게 우호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적대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적대적인 이야기로 상상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것은 이 무서운 것 또는 두려운 대상에 대하여 우리는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알고 싶은 호기심도 발동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이기도 합니다. 하기야 알고 나면 두려움도 사라지겠지요. 물론 알려고 꿈도 꾸지 않고 도망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먼저는 살고 봐야 하니까요. 그러나 단순한 호기심을 지나 그것의 정체를 확인함으로 세상에 알려주는 첫 번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구 중에는 ‘최고’도 있지만 ‘최초’라는 것도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루는 사람, 제일 먼저 발견하는 사람은 그 대상과 함께 세상에 이름이 알려집니다. 소위 유명해지는 것이지요. 유명인이 되면 그에 따라오는 이득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특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원인을 찾으려는 사람도 있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모아 돈을 벌려는 사람도 있고, 세상에 소위 특종으로 보도하여 거액의 보상과 더불어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체가 무엇일까? 그런데 호기심을 좇아가는 과정에서 위험을 맞습니다. 이제는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이제는 해치워야 할 적이 됩니다. 호기심 충족이 아니라 살기 위해 맞서야 합니다.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대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적이라 해도 약점은 있게 마련이지요.
매일 보는 하늘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모양이 이상하다 여겨집니다. 생각해보니 며칠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모양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구름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가끔 구름 사이로 아니면 그 속으로 이상한 물체가 등장하고 빠르게 지나갑니다. 갑자기 집과 주변의 모든 등불이 이유도 없이 꺼집니다. 통신이 절연됩니다. 핸드폰도 인터넷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말을 타고 가는데 때로는 말 잘 듣던 말이 그 자리에 멈추어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분명 근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의 지식보다 동물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하는데 더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사람을 먹이로 삼으려는 외계인의 침공, 이런 소재의 영화를 몇 개 보았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이 많이 모인 대도시가 적격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런데 아주 한적한 농장 하늘에 숨어있습니다. 그냥 은신처로 두고 활동하려는 건가? 아니면 사람의 심리를 알고 불러들이려는 것인가? 어떻게 감히 소수로 침공하여 헤집고 다닐 수 있는가? 무슨 근거로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덤벼드는가 말입니다. 순전히 우리 식으로 생각하고 만든 이야기 아닌가요? 글쎄 그냥 만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전문 영화평론가처럼 깊고 넓은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그냥 제가 보고 느낀 대로입니다.
근데 참 IMAX로 보아야 맛이 난다는 말이 맞는 듯합니다. 넓은 하늘과 또한 대조적으로 농장과 더불어 펼쳐진 넓은 들이 아마도 보다 멋지게 화면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SF 영화가 이제는 그다지 입맛을 당기지 않습니다. 아무튼 다른 요란한 것들과는 조금 다른 묘미는 있었습니다. 2시간이 넘었지만 그다지 지루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퇴치하는 장면은 뜻밖이기는 했어도 엉뚱하게 해결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끝내지요. 사실 세상사나 인생이란 것을 생각해봐도 요란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아주 단순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영화 ‘놉’(Nope)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뜻이 그냥 ‘No'와 별 차이가 없네요.
<오늘날 우리의 우상>
우리 모두 사오정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데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를 우스갯소리로 만든 것이지요. 가령 갑이 사과를 이야기하는데 을이 복숭아로 듣고 대답을 한다면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겠습니까? 직장에서 상사가 A라는 회사와 거래를 성사시키자고 하는데 직원이 B라는 거래처와 상담을 한다면 그 회사가 제대로 운영되겠습니까? 택시를 타고 신촌에 가자고 하는데 기사가 잠실로 간다면 손님이 가만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누차 경고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간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 자식이 그런다면 부모가 가만있겠습니까? 한두 번은 참고 용서할 수 있으나 반복되면 혼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많이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 이스라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이제 그 예를 보겠습니다. 하도 말을 듣지 않으니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 32 :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목이 곧은 백성’ 이 말씀을 누차 반복하십니다. 한 번 더 봅니다. 출 33 :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오죽하면 일단 약속한 땅에 보내주겠는데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하십니다. 말 안 듣는 고집쟁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한 것도 결국은 그 고집대로 하나님을 등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통상 유대 민족이라 하는 육적 이스라엘을 폐하시고 영적 이스라엘로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즉 혈통 중심의 하나님 백성에서 믿음을 따른 하나님 백성으로 바꾸셨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백성을 바꾸었는데도 그 영적 이스라엘은 괜찮은가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다시금 경고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로 세상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요 1 :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렇지요. 엡 2 :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그 은혜를 생각하면 마땅히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해야 하겠지요. 옛날 육적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 앞에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우리는 그들의 사건을 거울삼아 그런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바라심도 바로 그것이고 당신의 백성이 그 뜻대로 영생의 길로 즉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분별도 해야 합니다.
잘 아는 대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으로 매우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도 그만큼 매우 제한되어 선포되었습니다. 넓지도 않은 가나안 땅 그곳에 12지파가 흩어져 살고 있었지요. 하나님은 때마다 선지자를 택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제는 그 규모가 다릅니다. 예수님 다녀가시고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은 세계를 일주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 성경이 그 백성 가운데 함께 주어집니다. 여기 저기 목자들이 일어섭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한 해 배출되는 목회자가 수 천 명이 넘습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의 양식 즉 말씀을 먹이는 목자가 세계적으로 따진다면 엄청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러 가지 교통이나 정보의 교류 속도와 그 양이 대단하기 때문에 조금 유명하다 싶으면 지구 반대편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도 금방 우리 손안에 들어옵니다. 목자도 많고 전해지는 말씀도 많습니다. 일반적인 우리 성도라 해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 한번 이상이라도 말씀을 먹을 수 있습니다. 육의 양식처럼 끼니마다 먹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시간을 낼 수 있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분량의 영의 양식이 우리 주변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마 24 : 4 -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미혹케 하리라”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에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누가 미혹합니까?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 전에 예수님이 이미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7 :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우리와 똑같이 주님을 부르며 말씀을 전하며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합니다. 누가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알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23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를 통해 다시 한 번 경계를 해야 합니다. 요1서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 얼마 전에 배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악령에 속하여 거짓 진리를 선포하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다 전합니까? 세상에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마 13 : 24 - 25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여기 좋은 씨는 하나님 말씀 즉 진리입니다. 그런데 어디 뿌립니까? ‘제 밭에’ 즉 하나님 백성이 모인 곳 교회에 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또 다른 씨가 뿌려집니다. 무엇입니까?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이니 그것을 먹으면 영생이지만 마귀가 전하는 거짓 진리를 먹으면 사망 즉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이 양식이 먹어야 하는 양식인지 먹지 말아야 하는 양식인지 가늠해야 합니다. 행 17 :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렇습니다. 진리인지 거짓인지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오직 성경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꺼리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그랬고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또 열심히 특심하기로 유명합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면 치를 떨며 아우성을 칩니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세간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상숭배였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초기에 핍박과 순교를 많이 당했습니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제사를 드리는 문제에 대하여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당연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유지해오던 관습이고 문화였는데 사회적 나아가 정치적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알고 있지만 조선 후기 천주교가 들어올 때 많은 신자들과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가 껴있었지만 문화적 충돌이 빌미가 되어준 것입니다.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는 숙제였습니다. 더구나 제1 계명이니 그 힘이 대단합니다.
자 이제 가장 많이 잘못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인 우상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깨닫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을 엉뚱하게 겁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우리가 여러 번 겪어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족이 흩어지고 가정이 파탄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사회적 물의가 발생하고 다른 선량한 하나님의 사람들조차 엉뚱한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그런 거짓말에 넘어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껏 배워왔지만 하나님은 육적인 세상을 빗대어 영적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씨 뿌리는 비유가 그것입니다. 농사 이야기를 하시지만 실제로는 농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육적 이스라엘을 빗대어 영적 이스라엘을 말씀하십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 영적 이스라엘에게 거울이 된다고 앞에서 말씀하였지요. 육적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육적인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은 그것을 그대로 육적으로 받아서는 안 되겠지요. 왜냐하면 육적인 것을 빗대어 영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에게는 육적인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영적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영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육적인 사건이 영적인 경계가 될 것입니다.
우선 육적인 우상을 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누누이 경계시킨 것은 바로 우상입니다. 제1 계명이 무엇입니까? 출 20 :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그 구체적인 예로 말씀하시는 것이 제2 계명입니다. 4 - 5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 요약하면 세상 그 어떤 모습으로도 형상을 만들지 말라, 그 앞에 절하지 말라, 섬기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딴 짓을 합니다. 사실 사람은 일반적으로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보이는 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으니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뭔가 구체화 되어 있어야 설명해주기도 편하고 섬기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자꾸 형상화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실례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제 그 예를 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율법을 받으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올라있는 동안 산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출 32 :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래서 만든 것이 바로 금송아지입니다. 4절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뭐라고 선포합니까?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앞에 제사를 지냅니다.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그들이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배운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보다는 보이는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뭔가 하는 기분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그 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계속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왕을 세우고 정식으로 나라를 시작한 후에도 이어집니다. 하다못해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 솔로몬까지도 똑같은 죄에 빠집니다. 우선 솔로몬은 주변 여러 나라들에서 많은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그리고 후궁으로 데려옵니다. 물론 정치적 목적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몸만 온 것이 아니라 자기네 땅의 우상까지 다 들여옵니다. 그래서 왕상 11 : 4 - 5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결국 9 - 11절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경고하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분열되지요.
잘 아는 대로 육적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멸망당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지요. 육적 이스라엘의 종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당신의 종 선지자를 보내 말씀하십니다. 사 41 : 21 - 24 “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후래사를 진술하라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과연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우상이 무엇입니까? 시 115 : 4 - 7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이것이 실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우상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우선 목석이나 금은으로 만들어진 우상이 말을 알아들을 수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게다가 소송을 일으키라고요? 증거를 보이라고요? 장래사를 진술하라고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우상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 이 우상을 설명해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합 2 :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우상은 거짓 스승’이랍니다. 우리 예수님 식으로 말을 바꾼다면 ‘거짓 선지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지도 않은 목자가 자기 멋대로 하나님 말씀이라고 떠들고 있음에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증거를 대봐. 장래사를 말해봐. 아마도 떠들어봐야 모두 거짓말일 것입니다. 모두 쓸데없는 것들이고 특히 하나님 백성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자들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목석으로 아니면 금은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섬겼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떤가요? 속아서 아니면 미혹되어서 거짓 선지자에게로 몰려듭니다. 우상처럼 섬깁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 목자의 말을 더 신뢰하고 따라갑니다. 어쩌면 교회를 가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러 가기보다는 목자를 만나러 가는 겁니다. 목자가 이리저리 지시하면 그대로 하나님 명령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합한 말인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아멘입니다. 좀 과하게 말한다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다른 말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목자들이 그렇게 되도록 힘주어 지시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일절 성경을 배우지도 말라고 하지요. 그러면 자신이라도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문제는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도 먼저 여기저기 다니며 찾아보고 알아보고 배우고 깨우쳐야 합니다. 시대가 어떠한 때인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디에 선각자가 나타났는지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분명 마지막 때 예수님이 교회들을 위하여 당신의 사자를 보내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계 22 :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정리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 가운데 모세라는 목자를 세워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요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기에 세상에서는 신처럼 보였습니다. 출 7 :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사람들이 우상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출 32 : 4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말합니다. 자기들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신 구실을 하는 우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거짓 스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인 진리를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계명을 가르칠 수밖에 없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아닙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은 거짓 진리입니다. 그것을 전하는 자나 그것을 먹는 자나 결과는 똑같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세우고 따라갈 때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 모세가 외쳤습니다. 출 32 : 26 - 27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그렇게 하여 우상을 따르던 자들이 멸망하였습니다. 거짓을 따라가면 그 결과는 사망이요 멸망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생명에 관계된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영생의 길로 들어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 속에 가라지를 뿌리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가짜를 진짜로 알고 따라갑니다. 결과는 마찬가지 멸망입니다.
오늘날 우상을 목석으로 만든 어떤 형상 정도로 알고 있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신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젖을 먹는 어린아이입니다. 예를 들어 단군상을 훼손하는 열혈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딱하지요. 구약시대를 사는 사람도 아니고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시대를 분변치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당연히 선악을 분변치 못하겠지요. 미안하지만 천국도 구원도 상관없는 신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 5 : 13 - 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이 때가 어느 때인지 알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줄 아는 하나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성경에 무엇이 젖이고 무엇이 단단한 식물인지도 모른다면 언제 장성한 자가 되겠습니까? 섬기는 목자에게 물어 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목자인지 우상인지 분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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