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4月 ☞정직과 순종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말 복사해갑니다. 창3:8-15절) 죄의 결과(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셔서 질문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즘 에덴동산이 더러워진 것 같군. 동물들 중에서도 좀 마른 동물들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되었지?* 하고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질문하신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곧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겼느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며, 하나님을 가장 중요한 분으로 모시고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제쳐 놓은 채, 자기 기분과 생각에 따라 많은 일을 벌여 놓은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표현되는 장(場)이 되고, 그 관계의 연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 관계없이 벌이는 많은 일들은 하나님 앞에 무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가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소환되었고, 그 앞에서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오늘 말씀이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만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 중요성은 이 정도로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미래에 있을 한 사건에 귀결시켜 놓으셨습니다. 최초에 인간이 범한 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신 것은 최종적인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서 활동하게 된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공(功)은 사람의 손을 떠나서 하나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일이 미래에 있을 한 사건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죄를 지은 인간은 그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죄를 지은 인간들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심문하신 것은 지금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그들이 살 수 있는 소망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Ⅰ.하나님의 방문 오늘 첫째로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죄를 지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한 은혜와 일반적인 은혜*로 구분해서 이해하는데, 이러한 구분이 유익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을 직접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기쁨을 나에게 주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를 택하셔서 자녀로 삼으시고, 변화시키시는 것을 특별 은혜라고 합니다.
반면 *일반 은혜*는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누구든지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일반 은혜*라고 말합니다. 공공시설 같은 것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일반 은혜에 속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자 하나님이 나누어주시는 특별 은혜가 금방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3:7절)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지금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옷 입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받아서 그것을 옷처럼 몸에 두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자 금방 이 영광이 사라져 버리고, 알몸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것은 실제로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환한 빛 속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앞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물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는 *눈이 밝아졌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눈이 적응(適應)한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존귀한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몸의 변화가 너무 급격했기 때문에 아담과 그 아내는 두려웠고, 수치감에 떨었습니다. 나뭇잎으로 대충 가리긴 했지만, 몸의 아름다움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3:8절)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니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 말씀이 너무나도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즉 신인동형론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정말 하나님께서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서 산책하면서 아담을 부르고 계신 것처럼 생각하기 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표현을 보고, *뜨거운 낮에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서늘한 때, 찾아오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낮에 바람이 불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께서 이 동산을 방문하시는 때를 알았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 동산을 방문하실 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을 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동산에 부는 어떤 바람이었습니다.
물론 그 동산에는 다른 바람도 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으로서의 바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소리였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소리를 듣고, 또 그 현상을 보고, 달려 나가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이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바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성령(聖靈) 또는 영(靈)을 다같은 *바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하고 있다고 해서 저녁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마치 사람인 것처럼 동산을 산책하시면서 아담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임재하시고, 방문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꼭 바람이 불었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낮의 바람*이라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이들이 붙인 명칭일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표시가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을 알았고. 또 느꼈습니다. 그것이 여기에 나오는 *낮의 바람*입니다.
우리도 예배드리는 중에 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특별하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우리의 자세가 말할 수 없이 진지해지고, 내 마음이 감동과 기쁨으로 충만해질 때가 있습니다. 즉 *참으로 내 영혼이 예배드리는 이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서 있구나.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있구나. 오늘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하시는 말씀이구나*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여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느끼고. 체험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방문입니다.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내가 지금 어디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즉 지하인지, 지상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을 만나며, 그가 나를 특별하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느끼는 예배, 이것이 곧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낮의 바람*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그들에게는 가장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동산에서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다른 동물들을 보살펴주고. 같이 놀기도 했습니다.
농사 지으며, 땀 흘리는 것도 적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는 이 모든 것보다 더 기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낮의 바람* 즉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찾아와 주셔서 만나시는 그때였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난 후에는 그 시간이 가장 두려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즉 지금까지는 그 시간이 가장 기뻤는데, 이제는 가장 낮선 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장 어색한 시간, 가장 두려운 시간, 가장 싫은 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마음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너무나 흉측하게 변해 버린 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흉측하게 변해 버린 이 몸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마음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마음이 하나님 만나는 것을 낮 설고. 어색하고. 거북하게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소리를 들었고. 특별한 임재를 알았으면서도 마음을 닫고 숨어 버렸습니다.
Ⅱ.하나님의 질문 오늘 둘째로 나타나는 것은 아담을 만나서 질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시139:7-8절)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울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에도 숨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스올(陰府)에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소리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즉 어디를 가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3:9절)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존전(尊前)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에 거부감과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마음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현상을 알고,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을 알면서도 숨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소리를 못들은 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속 아담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 숨은 자리에서 나오기까지 *아담,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하고 계속 찾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찾으셨습니까?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서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이 모양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오늘은 날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내버려 두지 않고.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 아담은 거기서 영원히 멸망(滅亡)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뿐만이 아니라, 모든 아담의 후손들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는 영원히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숨어 있는 아담을 찾으셔서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시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소망을 보여 주기 위해 아담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신 것은 그를 책망하고.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멸망(滅亡)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숨어 있게 내버려 두면, 아담은 자동적으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영원히 죽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대로 멸망(滅亡)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숨어 있는 곳에서 나올 때까지 계속 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말씀으로 내 마음을 두드리실 때에는 반드시 내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 대책도 없이 *너 어디 있어? 정말 신경질 나는데 좀 나와 봐!* 하면서 화풀이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요. 어떤 아버지는 화가 나면, 막 자식들 이름을 불러댑니다. 즉 *큰 애 어딨어? 작은 애는? 다 집합해!!* 그리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화풀이를 합니다. 자식들은 죽을 노릇이지요.
그래서 후회를 합니다. 즉 *내가 왜 빨리 집에 왔던고? 치명적인 실수다. 그냥 밤새고 오는 건데, 괜히 집에 와가지고.....*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풀이를 하거나.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실 때에는 분명히 나의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슨 문제를 제기할 때에는 분명히 그 문제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고, 그에 대한 대책이 있기 때문에 질문하는 것입니다. 대책 없이 여기저기 쑤시는 것은 교만(驕慢)입니다.
내가 이만큼 잘났다. 이만큼 똑똑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질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문제를 제기할 때에는 분명히 답이 있고,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아담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3:10절)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의 대답은 핵심적인 대답일까, 주변적인 대답일까? 이것은 본질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왜 아담이 핵심을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아담은 핵심보다는 나타난 현상이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할 때. 나의 가장 중요한 문제 핵심적인 문제로 기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타나는 현상을 더 두려워합니다.
즉 *하나님, 저는 이번 시험을 망쳤습니다. *이번 사업이 너무나도 힘듭니다. *선을 봤는데, 또 깨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지금 먹을 것이 없습니다. *빚을 갚아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항상 이런 주변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보다는 그 뒤에 나타난 신체의 변화, 곧 벌거벗었다는 사실, 영광의 옷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훨씬 더 무섭고, 두려운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몸이 너무 이상해졌어요. 갑자기 춥고 오그라들면서, 빛나던 모습은 없어져 버리고 알몸이 드러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알몸도 괜찮지요. 그러나 아담이 볼 때, 이 몸은 몸이 아닙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담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몸에 병든 것이 중요한 문제이고, 사업이 어렵게 된 것이 중요한 문제이고, 먹고사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사를 해야 하는데, 돈이 없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죄였습니다. 즉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교만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3:11절)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는 *혹시 누가 네가 벗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느냐? 입이 가벼운 동물이냐? 천사가 일러주었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은 것은 아니겠지?* 하고 물으시면서 전혀 상황을 모르는 것처럼 접근해 들어가십니다. 그것이 곧 핵심적인 문제였습니다.
몸에 생긴 변화는 부수적인 현상이었습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였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고, 내 영역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 멋대로 하려고한 교만이 문제였고, 몸이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은 거기에 따라오는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자고 했을 때, 그것을 제지하지 않은 것은 남편의 책임입니다. 아내가 하는 말이라고 해서 다 들어서는 안 됩니다. 아내가 범죄하려고 할 때, 막지 못한 책임이 아담에게 있었고, 아담도 동일한 마음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죄 문제를 두고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남의 물건을 토개공처럼 빼앗을 때, 그것은 그 사람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남의 아내를 탐낼 때, 우리는 그 남편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결합시키신 하나님께 상처를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속건제*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했어도 반드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계를 주시고, 아주 작은 영역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게 하셨는데, 내가 남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그 영역을 뛰어넘음으로써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타난 증세만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고 싶어 하십니다. 즉 *지금 너의 마음속에서 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 너의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가 누구냐? 나 하나님이냐, 아니면 그 일이냐? 나는 명목상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일은 네 멋대로 하고 있지 않느냐?
명목상으로는 좋은 교인입니다. 흠잡을 데가 없어요. 그러나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제멋대로 살고 있어요. 그러다가 병들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벌거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합니다. 그러나 벌거벗은 것은 결과입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헌신하고, 그 다음에 일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일을 먼저 생각하고, 말씀은 적당하게, 점치듯이, 필요할 때, 고전을 읽듯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따지고 싶으신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씀을 줄 때, 이런 식으로 네 멋대로 대하라고 주었는지 아느냐? 나의 뜻과 말은 무시하고, 네 아내와는 의견이 맞는 모양인데, 아내하고 의견이 일치한다 해서 그것을 나의 뜻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아담을 윽박지르면서 몰아붙이지 않으셨을까? 즉 *아담, 이놈아! 네가 정말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내가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열매를 따 먹었느냐? 그러고서도 나를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점점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방식입니다.
마치 내 사정을 전혀 모르시는 것처럼 *왜 그렇게 안색이 안 좋으냐? 오늘 피곤해 보이는데.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냐? 오늘 예배드리는 네 얼굴이 아주 굳어 있구나. 아침을 거른 모양이지?*하면서 점점 접근해 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진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진노는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화를 내고, 공격하는 진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드러내시고, 분명히 거부하시며, 그 책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즉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자에게서 그 은혜를 분명히 빼앗아 가시는 것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방식입니다.
마침내 아담은 본질적인 부분을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3:12절)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는 말은 *나는 너를 남자를 돕는 배필로 주었는데 어떻게 해서 남자를 죄에 빠뜨리는데 돕는 자가 되었느냐?* 는 뜻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책임을 정직하게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뱀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이미 여자의 양심 안에도 죄의 독소(毒素)가 퍼져 가고 있습니다. 즉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가 없고, *옳은 것을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와 본질적인 문제를 두고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별 관심이 없이 다른 이야기들만 잔뜩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먹고살기 힘들어서 교회에 올 시간이 없습니다. *이 바쁜 세상에 성경 읽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이 세상이 너무나 경쟁적이어서 하나님을 오래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형편이 어려워서 부득이 거짓말을 하고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말은 정직한 변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안에서 하나의 진실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저버린 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확인하려고 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세타령을 듣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핑계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그 하나만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충분히 확인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하나님을 그들의 영역에서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확인되었습니다.
Ⅲ.하나님의 조치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간들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신 것은 뱀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왜 이렇게 했느냐?*고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저주하셨습니다. 이것이 특별합니다.
3:14절)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여기서 뱀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의 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魔鬼)의 도구로 사용된 뱀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래서 뱀은 다른 짐승들보다 훨씬 더 낮아져서 배로 기어 다니게 되었고,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
*흙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뱀이 흙을 집어먹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어 다니다 보니까 티끌에 뒹굴게 되고, 그러니까 입에 먼지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뱀의 지위가 낮아졌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파충류가 그렇게 낮은 짐승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뱀도 고개를 꽂꽂이 들고 걸어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나서 뱀은 다른 짐승들보다 훨씬 더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뱀을 통해서 *사람을 유혹한 사탄을 영원히 저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영원히 멸망할 대상으로 규정하시고, 사탄은 절대로 존귀해질 수 없고, 회개할 수 없으며,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인간을 유혹하기 전에도 사탄은 멸망이 정해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유혹하고 난 후에 하나님은 사탄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과 어느 누구도 사탄에게 기대를 걸거나 희망을 가지거나 사탄의 도움을 받거나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온 세상에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사탄은 영원히 저주받은 영(靈)입니다. 사탄에게서는 절대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사탄을 저주하고, 사탄을 멀리 하고, 죄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협박하고, 달콤한 것으로 유혹한다 하더라도 사탄의 일에 빠져들면 안 됩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저주요, 영원한 멸망입니다. *사탄은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게 만들고. 사탄은 다 책임지겠다고 해놓고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의 말을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가장 구별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상(思想)이 *사탄에게서 나왔는지*의 여부입니다. 사탄에게 나온 말을 들으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고, 저주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어 있습니다.
점쟁이를 찾아가면, 분명히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 점쟁이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족집게 같다* 하더라도 무당이나 점쟁이가 하는 일은 사탄의 일입니다. 또 *남을 해치고 죄 짓는 일에 참가하거나, 그런 집단에 가입하는 것은 사탄의 일*입니다.
나중에 그 결과가 비참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저주해야 합니다.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협박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사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저주해야* 합니다.
사탄은 영원히 흙을 뒤집어쓰고, 배로 기어 다니도록 하나님께서 선언하셨기 때문에 사탄은 영원히 성공하지 못하며, 영원히 회개하지 못하고, 거기에서는 절대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탄을 따라가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오늘 본문의 핵심이며,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3:15절)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여자에게서 나올 모든 후손은 뱀이나 그 후손과 영원히 원수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역사 대대로 뱀을 싫어해서 뱀을 볼 때마다 저주하고, 미워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뱀탕을 만들어 먹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의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누어졌습니다. 하나는 뱀의 후손이고, 하나는 여인의 후손입니다. 거의 대부분은 뱀의 후손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 이후에는 사람이면서도 행동과 태도는 비틀려 있는,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을 해치고, 빼앗는 철저하게 사탄을 닮은 뱀의 후손이 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중에서 실낱같이 가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특별한 후손이 있을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두 후손은 연합해서는 안 됩니다. 즉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은 연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두 후손이 연합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노아 때, 결혼으로 연합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결혼했다*고 하는 것은 이 저주받은 뱀의 후손과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예비 된 후손들이 연합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결혼으로 연합하고, 사상적으로 연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끝장을 내버리셨*습니다.
연합하면 안 됩니다. 구분되어야 합니다. 에녹이나 노아 같은 의인들은 다 이 거룩한 후손들입니다. 이 실낱같이 가는 여인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체화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타락했을 때에는 *남은 자*로 표현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교회로 연결되었고, 계시록의 14만 4천 명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는 영원한 적대 관계입니다. 합쳐질 수가 없습니다. 즉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은 같아질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영원한 갈등 관계에 있게 될 것이고, 세상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인류의 운명이 한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곧 단수로 지칭되고 있는 여인의 후손이 와야 합니다.
여인의 후손은 단수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 안에 집합적인 개념이 있습니다. 또 집합적인 개념이 있지만, 단수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곧 *한 사람*이 올 것입니다. 사탄은 그의 발꿈치를 물어서 독소(毒素)를 퍼뜨려서 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후손은 죽음 중에서 일어나서 사탄의 머리를 깸으로써 아담이 끌어들인 이 모든 죄의 후유증을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할* 것입니다. 이 여인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이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누군가가 여자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와서 사탄의 머리를 깨기 전에는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누군가가 와야 합니다. 그는 여자의 아들로서, 분명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와서 사탄의 독소(毒素)를 맞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영원히 죽을 수 없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 사탄의 머리를 깸으로써 죄의 모든 결과와 죄책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식을 낳아야 합니다. 그 후손 중에서 구원자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놀랍게도 전부 모계(母系)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낳고. 낳고....*라고 되어 있지만, 진짜 중요한 핵심은 하와의 아들들에게, 특히 자식을 낳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아들을 낳았던 사라나 마노아의 부인이나 한나 같은 여인의 아들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처녀지만, 성령의 능력이 임했던 마리아의 아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하는 말씀으로 압축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즉 여인의 후손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그가 어떻게 발꿈치를 독사에게 물렸고, 어떻게 살아났는지, 신약 성경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복음입니다. 즉 율법이지만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 주셨고,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사탄의 역사를 영원히 저주하고, 사탄과 분리되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여러 핑계와 신세타령 중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몰아냈고, 무시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고, 내 교만과 방종한 삶을 통해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께 상처를 드렸으며, 하나님 앞에 회복해야 할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고통의 원인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닙니다. 몸이 이상하게 변해버린 것이 아닙니다. 병든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몰아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장 중요한 하나님은 놓치고, 주변적인 것들만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셨던 존귀한 선물들은 다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공공시설이 마치 영원히 자기 것인 것처럼 공공시설에 신문지 깔아놓고, 거기서 왕 노릇 하면서 영원히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지내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돈이나 학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공기물입니다. 나누어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나누어 주시는 그의 존귀한 성품, 그것만이 진정한 나의 것이며, 특별한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낮의 바람처럼 특별히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서게 하시고,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역사와 능력으로 임하셔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가 본질적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리스도를 더욱더 의지하고, 붙들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율법서(모세 오경) 셀보고서 정직과 투명케 하는 습관▣예배 4월 3일(주일)결과는 6월30일 복사하면 결정됩니다.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감동 받았던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재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 설립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농협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알림 ◈4월1일-5월31일 춘계 대심방(세례겸)과 셀(cell)현장 점검을 위해 장소, 날짜,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신청해야 심방이 가능하며. 또 6월 말 셀(cell)보고서 결과로 소속이 결정됨니다. 그 이유는 연구원 유지 및 생명의 양식 보급을 위해 무관심과 비협조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