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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지요. 아픔을 딛고 함께 나누며 좋은 날로 맞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참으로 오랜 만에 거리두기 없이 당하는 명절입니다. 이동량도 어마무시하네요. 아무튼 사고 없이 즐겁게 지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뎌도 평안히 가고오고 복된 만남과 행복한 시간들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언제 그랬나는 듯 날씨도 가을을 빚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모처럼 웃음꽃을 피어내는 추석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좀 이르기는 합니다. 아직 한낮의 햇볕이 아주 따갑습니다. 어제 잠시 인천으로 지인 심방을 다녀오는데 차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여간 따가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좋기는 하지요.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햇볕으로 들과 밭에 작물들이 잘 익어갈 테니 말입니다. 피해가 난 지역도 있지만 잘 익은 과실을 수확하는 시간이 남아있기는 합니다. 아무쪼록 잘 이겨내고 다시 좋은 날들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연휴가 지나면 어느덧 중순입니다. 9월이 그리 멀지는 않군요. 우리 모두 행복한 명절을 지내기 바랍니다. ^)^
2022년 9월 10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3 : 5)
<코코순이>
오늘 비행기로 여행한다 해도 그다지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물론 시간의 간격이 있지만 긴 세월 속에서 긴 여행입니다. 그러나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 아닙니다. 어쩌면 뜻하지 않은, 아니 결코 바라지 않던 삶의 여행입니다. 목숨 붙어있으니 살고자 한 여행이지요. 그런 삶을 꿈꿔본 적도 없습니다. 희망으로 시작하였을지는 몰라도 절망으로 이어지는 삶이고 여행이었습니다.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노리개가 되어 짓밟힌 인생입니다. 그러니 고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선뜻 나서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꿈을 꾸며 기나긴 시간을 버텼습니다.
조선 사람, 그것도 군인으로 징발된 남자가 아니라 어린 여성들이 어떻게 미얀마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전쟁은 특히 어린아이들과 여성에게 가혹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으며 그 사실은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이 자그마한 지구촌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나 싶게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역사 속에 ‘백년전쟁’이라는 사건도 있었지만 일제 36년을 배경으로 한 우리네의 전쟁도 꽤나 오래 지속된 사건입니다. 대한제국을 합방하기 위한 작업부터 시작해서 해방의 그 날까지 이어져온 크고 작은 전쟁들을 지나며 특히 젊고 어린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이렇게 표현해도 저렇게 기록해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1944년 8월 일본의 강제 동원으로 미얀마 미치나에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0명은 연합군에 체포돼 조사를 받은 뒤 이후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미치나의 조선인 위안소 현장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귀국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미얀마 미치나와 인도 레도 등에서 현장답사와 증언 확보 등을 통해 귀국 행적 파악에 들어갔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스위스 국제적십자위원회 등을 찾아 미공개 자료 발굴을 통해 이름과 출신 지역을 바탕으로 실제 강제 동원됐을 할머니 한 명의 존재도 확인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그 추적과정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두 시간이 넘어가도록 적은 분량이 아니지만 최대한 압축한 이야기입니다.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기야 전쟁 중이었으니 부상병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봐주면서 다른 한편 돈도 벌 수 있는 일이니 특히나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젊은이들에게는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고국을 멀리 떠나 하는 일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돈 좀 벌고 나서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창 젊은 때인데 무슨 일은 못하랴 하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식민지 하에서 많은 백성이 어렵게 살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생활의 돌파구를 찾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봉사와 돈벌이가 병행할 수 있으니 이래저래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여 과감히 고국을 떠났습니다. 긴 여행을 마치고 당도한 곳은 기후도 환경도 전혀 다른 낯선 곳입니다. 무엇보다 언어가 달라서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해야 하는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대했던 일이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날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 다음부터는 물리적 강제력이 따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에 힘이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고, 그러니 탈출해도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릅니다. 어쩌겠습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단 살아야 궁리를 해보지요.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연합군에 의해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심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통역을 붙이는데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일본어를 하는 미국군 장교가 맡아서 심문을 진행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영어를 알 턱이 없고 일본어도 서툽니다. 그러니 우리 젊은이들을 관리하던 ‘마마상’이나 ‘파파상’(우리 식으로 하면 ‘포주’일 것입니다)을 상대로 심문을 진행합니다. 우리의 아픔을 대변해줄 리가 만무하지요. 자기네 측 변명으로 일관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러나 심문자는 그런 것에 관심 가질 리도 없습니다. 그 보고서가 후일에 어떤 효과를 나타낼지도 상상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고서가 나중에 이 위안부를 왜곡시키는 자료가 됩니다. 그들이 사치스런 생활을 누렸고 매우 이기적이라고요? 좋아서 시시덕거리며 살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한 마디로 ‘매춘부’였다니, 당한 것만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데 불명예까지 덮어씌웠습니다. 그것을 미국의 유튜버가 이용하였고 유명 대학교 교수까지 논문으로 썼습니다. 누구를 위한 짓거리입니까? 아마도 일본 우익단체의 후원을 받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 많은 우리 백성이 이국땅에까지 가서 삶을 짓밟혔습니다. 사진 속의 딱 한 사람만이 파악이 되어 이렇게 추적하였지만 얼마나 많은 백성이 피눈물을 흘리며 먼 외지에서 삶을 마감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집니다. 기록영화 ‘코코순이’(KOKO SunYi)를 보았습니다.
<빛과 어두움>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3 가지만 뽑는다면 공기와 물과 빛입니다. 때문에 이 세 가지는 값을 받지 않습니다. 요즘은 하도 오염이 되어서 물을 사먹는 세상이 되었지만 본래 사먹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다가도 아무 데서나 떠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자랄 때만도 그랬습니다. 아무 집이나 하다못해 어느 가게를 들어가서라도 물 한 그릇만 주세요 하면 군소리 없이 내주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 없습니다. 가게 들어가면 500원 주고 물이 담겨 있는 패트병 하나 사서 먹으면 됩니다. 앞으로는 신선한 공기라고 통조림해서 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면 빛도 담아서 팔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등불이나 가스 불이야 물론 돈 주고 사서 쓰고 있지만 저 무한정한 햇빛을 사서 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모든 생물에게 빛 또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빛은 또한 어둠을 밝혀줍니다. 그럼으로써 사물을 분별하게 해줍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길 때 우리는 이런 비유를 잘 사용합니다. ‘나라를 빛낸 사람,’ ‘역사에 길이 빛날 사람’ 등등입니다. 그리고 빛은 낮을 상징하고 어둠은 밤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또한 사람의 지식을 빗대어 쓰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듣습니다. ‘컴퓨터라면 깜깜해.’ 무슨 뜻입니까? 컴퓨터가 까맣게 칠해져 있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고 내가 컴퓨터를 다루는 지식이 없다는 뜻이지요. 컴퓨터를 다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는데 그 답을 모른다면 뭐라고 말합니까? 앞이 캄캄하다고 합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문제 해결을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전 찬송가 259장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그러면 이 사자들은 천사들처럼 몸에서 빛이 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는 빛을 비추려고 나타난 사자들이라는 말입니까? 그런 게 아니지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오실까요? 낮에? 아니면 밤에? 도적 같이 온다고 하셨으니 밤에 오실까요? 그러면 대한민국에 밤에 오시면 그 시간 저 반대쪽 미국은 낮인데 어쩌지요? 거기는 하루 기다렸다 오셔야 합니까? 그런 게 아닌 줄 압니다. 이게 다 비유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낮이나 밤 또는 빛이나 어두움 등 이것이 다 육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비유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빛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해봅니다. 살전 5 :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낮에만 다니고 밤에는 안 다닌다 그런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아니면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나타나는 연예인들만 빛의 아들인가요? 그런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우리는 태양이 하늘에 있음으로 해서 이 땅에 밤과 낮이 생기고 춘하추동 4 계절이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가 측정이 되고 시간과 날짜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해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었습니다. 밤이 있고 낮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창 1 :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된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 19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그렇지요, 넷째 날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빛이 창조된 첫째 날 이렇게 말씀합니다.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미 낮과 밤이 있고 빛과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여기서 말씀하는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말하는 육적인 빛이나 어두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요 1 : 1 - 5절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또한 빛이라 말씀합니다. 시 119 :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면 그 말씀이 곧 빛이 되고 등불이 되어준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그 반대 되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즉 마귀 사단입니다. 하나님 말씀 밖에 있으면 곧 사단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이며 빛이 아니라 어두움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빛이지요. 우리가 그 안에 곧 하나님 말씀 안에 있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 밖으로 나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을 떠나면 어두움이고 사망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 8 : 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 자신이 곧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빛의 영적인 의미는 첫째 생명의 말씀이고 둘째 그 말씀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라가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께로 생명을 공급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떠나자 예수님이 걱정스러워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요 6 :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베드로가 매우 믿음직스러운 고백을 합니다.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빛의 자녀들과 어두움의 자녀들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빛의 자녀들은 예수 믿는 자들 즉 신자들 어두움의 자녀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말씀을 보겠습니다. 요 1 :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랬지요?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이 어두움이 인격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빛이 세상에 오기는 왔는데 어디입니까? “자기 땅”입니다. 바로 뒤에 해석이 나옵니다. “자기 백성”이지요. 그리고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두움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자기 백성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예수님 당시로서는 유대인들입니다. 자기네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알고 있었겠지만 하나님 앞에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깐 돌아봅니다. 그 전체를 요약해본다면 이 한 마디로 족하리라 봅니다. 삿 6 :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이것은 비단 사사기 때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늘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신 9 :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즉 이스라엘 너는 내 백성이라고 하지만 고집불통 말 안 듣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띠르려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밀고 나갑니다. 그래서 그 벌을 받아 나라가 반쪽으로 나뉘었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다 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 말씀을 전하는 목자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담 때부터 그랬습니다. 최초로 택함 받은 아담부터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의를 무시하고 생명나무가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택하였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배도로 점철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로 다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신약의 역사입니다. 당연히 육적 혈통으로 이루어지는 백성이 아니지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요 1 : 11 - 13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늘날 우리가 바로 이 약속, 이 말씀 덕분에 택함 받은 줄 믿습니다. 물론 육적 이스라엘 백성도 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빛으로 오신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우리와 똑같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깨달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으로 생명의 말씀을 전하였지만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빛을 비추었지만 거부하였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어두움이라 칭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볼 것은 사실 그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세상 그 어디서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는 성경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뭐 하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까막눈이고 어두움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이 그랬고 내노라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역시 똑같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그러니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나 따라가는 백성이나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를 신자와 불신자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잘못 아는 것입니다. 똑같이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가르치고 배워도 하나님 뜻과 전혀 다르게 나간다면 세상의 불신자와 똑같은 까막눈일 뿐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들을 어두움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을 가리켜 어두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말해주어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 1 :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당시의 실상이었습니다. 빛이 하나님 백성 가운데 먼저 왔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비추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럼에도 고집 하나는 끝내줍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도 못 말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신 것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빛 된 생명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런 사역은 이미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사 9 : 1 - 2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아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어딥니까? ‘스불론’이나 ‘납달리’ 모두 옛날 야곱의 12 아들의 이름이고 여기서 이스라엘 12지파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땅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이방인에게 짓밟힌 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큰 빛이 온답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의 땅에 빛이 비칠 것입니다. 언제요? 마 4 : 12 - 13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왜 스불론과 납달리로 오셨다고요? 그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 14 - 16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그렇지요? 앞에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 어두움의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오셨던 때 그곳 즉 당신의 백성은 어두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즉 목자라는 사람들이 어두움에 처해 있으니 그 가르침을 받는 백성이 모두 어두움에 처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 때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요 3 : 18 - 21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빛이 왔는데 당신의 백성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빛은 예수님이고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두움은 누구이겠습니까? 말씀을 깨닫지 못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곧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도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들이 말씀을 가지고 백성을 가르친다고 하나 깨닫지 못하고 자기 고집에 매여 있었습니다. 어두움에 속하여 사단 마귀 짓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질타하셨습니다. 마 15 :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장로들의 유전이 먼저였습니다. 이것도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또한 그 예언의 이루어진 것을 말씀하십니다. 7 - 9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사 29 : 13절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니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가르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그들은 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을까요? 답은 바로 그 말씀 속에 나와 있습니다. 요 3 :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예 그것입니다. 바로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악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의롭다고 믿는 것입니다. 안타깝고 딱한 일이지요. 마치 알콜 중독자가 자기는 알콜 중독자가 아니라고 고집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편에서 일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6 :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자기네만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오늘 하나님의 종들이라 하는 목자들을 보시면 어떻게 평가하실지 궁금합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알아는 볼까요? 당시 목자들이 못 알아봤는데 오늘날 목자들은 알아볼까요?
우리가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였습니다. 빛을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목자 중에 대표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7 :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제자들은 분명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요 14 :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이것이 이해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자기가 말하면서 그게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야?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전하는 말은 누구 말씀인가요? 자기 말이라고 전하는 겁니까,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하는 겁니까? 오늘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는 목자들도 똑같습니다. 자기들이 말하고 있지만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사람의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계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유대의 목자나 지금 신자들의 목자나 자기가 전하는 말씀이 사람의 계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어두움에 처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백성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던 하나님 말씀, 구약성경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비밀이 무엇이었습니까? 골 2 : 2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의 백성이었지만 어두움에 처해 있었기에 성경을 가지고 읽고 배우고 가르치면서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대적한 셈이지요.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셨는데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두렵고 떨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이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면 주 재림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이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도 지적하셨습니다. 눅 18 : 8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빌 2 : 12).
그렇다면 신약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감추어 두셨습니다.(마 13 : 11) 그리고 우리 신자들 속에서 이것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갈라지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3 :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천국은 비밀이고 그것은 비유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가르치면 이단이라고 말하는 목자들은 도대체 누구의 목자입니까?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속하였기 때문이지요. 빛을 비추어주어도 싫어합니다. 예수님 때도 그랬고 다시 오셔도 그럴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하든 겸손히 듣고 아무쪼록 빛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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