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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서쪽 西)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에 다른 현상들을 본 거예요. 해가 질 무렵에 있는 그쪽이 서쪽일 거 아니에요? 그 부분에서 뭔가를 계속 고민해 오겠죠. 이걸까? 이걸까? 이걸까? 하다가 마침내 가장 문학적인 결론에 도달해요. 해가 질 때는 새가 둥지로 들어가잖아요. 새가 둥지로 들어가는 것을 해가 지는 것으로 간주해요. 그래서 이 모습입니다.
남쪽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이건 옛날 움집이던 집과 관련이 있어요. 그곳 집에서 나와요. 집에서 나오면 자기 나름의 지도가 문 앞에 걸려 있어요. 지금도 원시 부족들, 남미나 일부가 남아 있죠. 아프리카는 더 이상 없어요. 그 다음에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 원시 문화가 아니라 원시의 성격까지 유지하고 있는 발전된 현대 문화라 할 수 있죠.
그들의 집에 가면 남아 있어요. 집 앞에 이렇게 십자가 비슷하게 뭐가 걸려 있어요. 그리고 그 일정한 자리에서 봐요. 걸려 있는데 제일 꼭대기에 해가 딱 도착해요. 나머지 어느 각도에서 봐도, 걸렸으니까 바른쪽에서 볼 수도 있고 왼쪽에서 볼 수도 있겠죠. 나중에 그 버릇이 그 방향에 새장을 놓고 새 키우는 버릇으로 나와요.
(그림 5: 남쪽 南)
지금은 남(南)자가 어떻게 쓰는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원래 남(南)자는 달랐어요(그림 5). 羊(양)처럼 생긴 이것은 앞에 보이는 집 앞에 보이는 풍경이에요. 그리고 이것 大 자처럼 생긴 이것은 문 앞에 걸어놓은 그거예요. 여기 꼭대기에 해가 닿는, 이제 거기에 맞춰가지고 모든 집에 걸어놓는 거죠. 원래 새장의 새 키울 때 새장의 꼬리가 닿는 부분이 거기에요. 새장이 달려 있으면 새장 꼬리에 해가 걸리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정해져 있겠죠. 거기서 봤을 때 해가 거기에 걸리면 남쪽인 거예요. 아무튼 남쪽은 그걸 갖고 그렸어요.
(그림 6: 북쪽 北)
그런데 위치는 당겨놨어요. 7천 년의 고민 끝에 북쪽은 그걸로 표현해보는 거예요. 북두칠성 자리에서 이렇게 5배만큼 자리를 이용해서 별을 찾아가는 것으로 그려놓은 거죠. 물론 문자화시키고 간단화시켜야 되니까 5배를 벌릴 수가 없죠. 그냥 붙였죠. 그분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북쪽을 찾아 간 거예요. 이렇게 하면서 북(北)자가 나온 거예요. 원래 이 북쪽을 가리키는 글자는 국자 모양을 마주보게 그려놓았는데, 하단으로 내려가는 선 흐름을 직전으로 그냥 그어서 지금의 北이라는 글자로 만들었죠.
북쪽의 북(北)자를 그분들도 그렇게 찾아왔어요. 우리가 현대에 와서 천문학이 어쩌고 하는데 그분들이 훨씬 더 하늘을 많이 보고 살았어요. 훨씬 더 많이 보고 마침내 그 별자리를 이용해서 당시에 누구나 다 인정하는 북(北)자를 만든 거예요.
문자의 방향성 4-공통성(보편성)
이럴 때 조건이 필요해요. 이렇게 문자를 만든 것을 보면 누구나 개념적으로 인정하는 공통점을 찾아낸 거잖아요. 그러면 어디까지가 공통 범위인가? 나만 보고 있는 현상이면 안 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인정할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현상이고,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고, 꾸준히 일어나는 현상이어야 하잖아요. 웬만하게 비 오지 않는 이상 북두칠성은 뜨잖아요. 그런 걸 선택해서 해요. 다른 북쪽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있었겠죠.
지속 가능하며, 더 넓은 영역에서 확인되며, 꾸준히 확인되며 그리고 미래에도 확인될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가지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공통점을 찾아가는, 공통의 상형을 찾아가는 문자 만들기인 거죠. 7천 년 동안 버리기만 한 게 아니라, 공통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보편성의 범위, 즉 공간적 보편성의 범위와 시간적 보편성의 범위 그리고 늘 확인할 수 있는 예외성이 아주 적은 근접성, 가령 나만 보는 게 아닌 거죠. 그래서 이렇게 문자를 만들면 이 과정 속에서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인간 속에 자리 잡는 거죠.
‘널리’라는 개념이 나오는 거죠. ‘널리’라는 것은 공간적으로 널리지만 시간적으로 길 게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널리 이롭게 하시며, 뿌리 깊은 나무도 생각하시는 거죠. 그래서 오래! 넓게! 그리고 언제나! 날마다의 생활에! 한글에 나오는 그 용어들이 바로 그런 보편성을 앞에 다 이유로 들고 있는 거잖아요. 보편적이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북극성과 북두칠성도 다 보편적이죠.
어떤 정도의 보편성인가는 만들어진 문자를 보면 나와요. 만들어진 문자를 보면, 이 북쪽을 나타내는 北의 보편성은 뭐죠? 북반구에 살아야 하죠. 남반구에 살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북반구라는 보편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예요.
방향은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문제가 되는 거니까. 나무가 있는 것이 보편적인 데를 영역으로 삼았겠죠. 새가 있는 정도는 보편적인 것으로 삼았겠죠. 그리고 지구상에서 새 없는 동네 없는 것 같더라고요. 나무 없는 동네도 거의 없어요. 방향 얘기만 그런 게 아니라 더 한 것도 있어요.
문제는 더 어려운 것들은 다른 데 있어요. 진짜 핵심적으로 최대 공약수와 최소 공배수를 찾아야 합니다. 최소 공배수라는 건 뭐죠? 보편성이에요. 시간적으로 어디까지 넓히면 될까? 최대 공약수라는 것은 완전히 일상성이고 근접성이죠.
그러나 사실은 두 개가 합해져야만 공통성이 나오잖아요. 수학에서는 최소공배수와 최대공약수는 달라요. 이렇게 문자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보편성인 일상성을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는 같은 거예요. 최대공약수가 없는 최소공배수를 그려봐야 허황한 관념이 돼버려요. 최대공약수만 너무 집중하면 널리 쓰일 수가 없어서 ‘네 집구석에서 너나 쓰세요’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의 현상으로서 문자가 나오는 과정에서 고민은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가 같을 수밖에 없어요.
공통성을 기반한 색(色)을 나타내는 문자
그런데 샹그릴라에 갔더니 죄 짓고는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너무 이렇게 짙푸르단 말이에요. 여러분 하늘도 다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하늘 색깔을 뭔가 색깔로 할 수도 없어요. 파란 건 뭘로 하지? 하늘 말고 뭐! 얼마나 고민이겠어요? 안 떠오르죠. 이 원래 靑자를 보고도 안 떠오르잖아요(그림 7).
(그림7: 푸를 靑)
우리가 역으로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쉬운 거죠. 과거에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마침내 생각한 거예요. 새벽에 나가 우물가에 가서 보니까, 우물가에 나무 그림자 비칠 때는 다 파랗거든요. 그래서 우물가에 나갔을 때 모습이에요. 우물가에 뭔가가 비칠 때는 다 파란 거예요. 그래서 밑에 이 우물(井)이 있는 거에요. 그래서 靑이라는 것의 아래 円이 달 월(月)이 아닌 거예요.
출발 색으로서 붉은 거는 달라요. 뭘까요? 뭐가 붉을까요? 고민 한번 해보세요. 불 갖고 하려고 그러니, 불도 소똥을 때느냐, 말똥을 때느냐, 낙타똥을 때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나무를 때느냐에 따라 또 달라지는 거죠. 그리고 흐린 날 보니까 좀 덜 붉고, 눈 오는 날 때니까 불이 더 붉고, 또 어떤 날은 너무 건조한 날 때니까 불이 파래 보이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불도 안 돼요. 뭐가 변함없이 붉을까? ‘근접성, 지속성 그리고 널리, 오랫동안’ 이렇게 붉은 걸 설명할 수 있는 게 나오게 되죠. 이미 나무 목(木)은 만들었잖아요. 나무 목(木)을 만든 다음에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나무 목(木)을 갖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생각 끝에 나무 목(木)을 이용하는 겁니다.
나무를 딱 베니까, 나무의 외양 색깔이 어떻든 간에 나이테는 빨간 거예요. 나이테는 빨갛게 돼 있어요. 마르지 않는 생나무는 자르면 나이테는 다 빨개요. 체관이 굳어서 나이테가 되잖아요. 심지어 지금 현대에 와서 보니 단풍나무도, 참나무도, 소나무도, 잣나무도 자르는 순간 나이트는 다 빨개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레드가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레드는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딱 그려요.(그림8)
(그림8: 붉을 朱)
검을 흙(黑)은 뭐일까요? 검을 흙은 제가 안 써봤습니다. 밑에 불 화(火)가 있잖아요. 점 4개 灬가 있거든요. 이제 불 위에 있는 것만 이해하면 돼요. 현재 글자를 대충 보고 제대로 몰라도 돼요. 느낌상 그건 뭐죠? 아궁이에요.
아궁이를 만들어놓고 불 떼니까 다 시커매지는 거예요. 그게 검을 흙의 글자에요. 근접성! 생활의 근처에 있죠. 그 시대에도 이미 누구나 밥을 해먹으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실내에서든, 실외서든 해먹어야 되니까요. 불은 이미 생활에 접근에 있으니까요. 불씨 꺼뜨리면 큰일 나잖아요.
그리고 그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기 백리 밖에 가서 부뚜막을 만들어도 예외가 아닐 것 같고, 미래에도 예외가 아닐 것 같으니까 시간의 확장성과 공간의 확장성이 충분하죠. 그리고 생활 근접성도 확실하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예외가 거의 없는 상황이죠. 그러다 보니까 부뚜막 밖에 안 떠올랐던 거죠. 부뚜막 흙이죠. 검은색을 그렇게 표현했어요.
문자의 방향성5-특수성(사례, 黃이라는 글자)
우리가 지금 들으니까 아! 그러지만 그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한두 명이 1~2년 혹은 10년 20년 생각해서 나올 게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왜 한 두 명이라는 얘기를 하냐면, 전체 구성원이 다 생각한 건 아니라는 거예요. 전체 구성원 중에 누군가도 생각하겠지만 그 중 일부만 채택되거나 이럴 가능성이 크죠. 그게 누를 황 자(黃)를 보면 알아요.(그림9)
누를 황(黃)자는 뭘까요? 누를 황 자의 위는요. 사람의 머리에 관을 쓴 모양이지, 초 두(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풀 초(草)자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람을 이렇게 그렸어요. 팔다리가 있고요. 위에 머리를 특별히 키웠어요. 왕관 썼겠죠. 모자죠. 위의 이것은 모자예요. 그런데 이 중간에 뭔가 넣어놓은 거죠. 이게 뭘까요? 여러분 신라 유물 가운데서 혹시 천마도가 있는 천마총에 가보신 분 있으시죠? 가면 허리띠 같은 게 주루룩 달려 있잖아요. 허리띠에 있는 내용이 다 신분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집안의 역사이죠.
(그림9: 누를 黃)
여러분 지금은 곱돌이라 그러면 밥 하는 돌, 게르마늄 돌 생각하는데, 원래 곡옥(曲玉)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굽울 곡(曲), 즉 ‘앗땅’에서 나는 옥(玉)이에요. ‘아사달’에서 나는 옥이예요. 그런데 그 옥은 원래 파랗지 않죠. 좀 누렇죠. 이 옥을 목걸이로 해서 배에 걸치고 다녀요. 그 누런 거는 다 하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걸로 황을 잡았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옐로우가 아니에요. 옛날에 누를 黃자는 노란색이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옐로우(yellow)가 아니에요. 사이언도 마찬가지로 그 사이언(cyan)이 아니에요. 블루(blue)와 사이언은 다른 거예요. 레드(red)와 마젠타는 다른 거예요. 옐로우와 황은 다른 거예요.
(그림 9)처럼 이것으로 黃자를 했어요. 이건 뭐죠? 이거는 뭔가 좀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이 있죠. 근접성에서 모든 사람이 해당될 것 같지는 않죠. 문자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계층적인 협소함이 좀 드러날 수 있죠. 그리고 黃 자는 이 색깔을 가리키는 이름 중에서 제일 나중에 나온 글자예요. 옐로우에 해당되는 글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갑골문에서 청동기 금문으로 가면서 바로 사라져요. 그래서 증거를 대기가 어려웠어요.
천재적인 결론에서 탄생한 흰색(白)
그럼 그 다음에요. 뭐 남았죠? 흰색 남았어요. 흰색은 뭐가 흰색이에요? 눈을 갖고 하자니 좀 있으면 녹을 거고, 우리 인생이 녹듯이 금방 녹을 거고요. 눈 보고 나서 돌아서면 눈이 빨리 녹을까요? 우리 인생이 빨리 녹을까요? 말을 하기 힘들죠. 어쨌든 녹을 거고요. 만년설산을 하려니 만년설산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황하 지역에 몇 명이나 됐겠어요? 이 흰색을 만드는 데 이 지역에서는 안 되겠고, 조약돌 하얀 거 말려서 하얀 걸로 쓰려는데, 여기에 물 묻으니까 갑자기 반투명해지고. 하얀 건 뭐가 있을까요? 하얀 종이, 이건 하얀데 그때 없었고요. 하얀 종이가 그때는 없는 거죠. 그러면 뭘로 할까?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은 천재적인 결론에 도달했어요.
옛날에 해가 막 비치잖아요. 지금보다 훨씬 해가 세잖아요. 그러니까 피부가 까맣잖아요. 아프리카 흑인들이 조명이 약한 데 있어서 안 보이다가 갑자기 싹 웃으니 하얗죠. 그런 대비감처럼요. 지금도 신장 위구르성이나 티베트 지역에 가면은 햇살 받은 것을 아예 지우지 않거든요. 계속 까맣게 화장을 해요. 설날 전에만 벗겨요. 벗기면 하얗죠. 그전까지 까맣죠. 씻어도 까매요. 그거는 일상적으로 씻어 갖고는 안 지워지는 거예요.
광부들을 생각해 보죠. 광부들이 나와가지고 하는데 대충 씻었을 때 아직 얼굴 까매요. 금방 비누칠 안 하면 안 지워지잖아요. 비누칠 안 하고 나서도 물만 대충 했을 때 하얀 게 두 가지 있어요. 이빨하고 딴 것이 하해요. 그런데 이빨은 현대인만 하얘요. 옛날에 흑치도 있어요. 오래 관리 안 하면 저절로 시크므리둥둥해져요. 플라그가 껴서 그렇죠. 염색도 해요. 그럼 이빨 갖고는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대만에 가도 빈낭(檳樃) 씹는 분들 이가 꺼멓잖아요.
그럼 뭘로 하얀 것을 나타내야 될까요? 손톱! 엄지 손톱 밑에는 누구나 다 하얗더라는 거예요. 다른 손톱은 안 돼요. 보편적이지 않아요. 대무지(大拇指)! 우리로 치면 엄지! 엄지는 언제 봐도 하얗더라는 거예요. 지금은 덜 하얗죠. 이건 우리가 햇빛을 안 봐서 덜 하얗죠. 엄지는 하얗더라는 거예요. 이것을 표준으로 삼은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엄지를 그려요. 이렇게 엄지 손가락을 그리고 아래에 이렇게 반달처럼 만들어요(그림 10). 세상에! 마지막 찾아낸 것이 인류가 있는 한 계속 갈 것이고, 인간인 이상 어느 인간도 그럴 것이고, 가장 완벽한 보편성을 갖고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근접성을 가지고 있어요. 변하지 않아요. 잘 때도 하얘요. 씻어도 하얗고 때가 묻어도 대충 물에만 헹구면 하얘요. 이걸 갖고 흰 백자를 찾아내요. 천재죠!
(그림10: 하얀 白)
패배(敗北)라는 글자에 담긴 종족의 입장
옛날에 글자가 만들어둔 지역이 황하 인근이라는 걸 생각하셔야 돼요. 지금의 황하에서 비옥한 지대에서 그걸 차지하면 먹을 것도 많고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북방에서 끊임없이 와서 거기를 차지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애초에 황하는 그걸 차지하는 사람들의 것이었지, 거기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더 센 세력이 내려왔어요.
어떻게 해요, 도망가야죠? 졌으면 도망가야죠? 어디로 가야 돼요? 왔던 데로 가야죠? 왔던 데가 어디예요? 북쪽에서 내려왔으니 북쪽으로 가요. 그러니까 패하면 가는 방향을 같은 방향으로 쓸 수는 없지만, 뜻으로는 北으로 해도 되겠다는 거예요.
지면은 원래 있던 것으로 돌아가서 힘 키우다가 또 내려오고 그렇게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도망가죠? 왜 졌다는 걸 인정하죠? 앞에 패(敗)자에 달려 있죠? 패자는 뭐죠? 교육할 때 끝에 매 들고 있는 거라 그랬죠. 매질을 하면 어떻게 되죠? 깨지거나 상처 나거나 뭐 그렇게 되겠죠.
저는 정치학으로 폴리틱스(politics)를 정치학으로 번영하는 일본 학자들이 정말 생각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에요. 정치의 폴리시(Policy)도 약간 그런 면이 있긴 했지만, 정치(政治)의 정(政)은요, 바르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규정해 놓은 어떤 것에 대해서 매질하는 봉건적 사고 방식의 개념이에요.
정(政)과 치(治)는 동일한 개념이 될 수가 없어요. 정을 택했으면 치가 안 되고, 치를 택했으면 정을 포기해야 되는 거예요. 정은 공화주의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폭력적 독재에 가까운, 파시즘에 가까운 거예요. 바르다는 걸 정해놓고 안 되면 쥐어 패고 방패로 찍고 감방 보내고 이러는 게 政이에요.
현대 정치학에서 政이라는 표현 자체를 제거해야 돼요. 치세학(治世學)이어야죠. 세상에 물 흐르듯이 흘러가게 하는 학문인 거죠. 어떻게 정치학이라는 개념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남아 있냐 이거예요. 알고 보면,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개념이에요. 정치라는 개념이 아니라 치세라는 개념으로 봐야 돼요. 세상을 물 흐르듯 보는 시각이에요.
치세 그러니까 또 이상한 봉건적 느낌이 드는 게 옛날에 통치라는 개념을 워낙 많이 써와서 그렇죠. 세상을 다스리는 이러는 것은 물길처럼 원리대로 세상이 펼쳐지게끔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공부하는 게 치세학이에요. 정치학은 버려져야죠. 우리는 지금도 정치 정치거든요. 政은 국민을 좀 팬다는 거예요. 그리고 바르다는 기준은 관념이잖아요. 아무튼 그래요.
하은주 세 나라의 역사적 변천 상황에서 이루어진 문자의 변화
패(敗)는 뭐죠? 옆에 조개(貝)가 있죠? 조개가 재물이고 화폐죠. 자기들의 재물이 다 깨진 거예요. 더 이상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상실한 거예요. 그러면 진 거예요. 거기서 버틸 수가 없는 거예요. 달아나야 돼요. 다시 재(財)를 만들러 공동체 성원이 다 도망가요. 그래서 패배해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망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었어요. 북쪽! 그런데 도망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기준은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다 무너졌다’에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이기지 못한 것과 진 거를 구분하는 거예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건 우리는 그것도 패배라고 하지만 버틸 수 있어요. ‘전투의 진 거다. 전쟁에서 안 졌다’ 그러는 거죠.
그런데 재물이 무너지면 끝난 거예요. 국가 공동체의 재물이 깨지면 그냥 원래 왔던 데로 도망가요. 그래서 수많은 기마 종족들이 황하를 차지했다가 도망가요. 황하를 차지했다가 도망가는데 예외의 종족이 나와요. 은나라는 북방 기마민족입니다.
먼저 내려와 있던 하나라를 그 기마민족이 쳤어요. 하나라 이들이 졌죠. 이들이 대부분 북방으로 도망가는데 어떤 세력은 북방으로 도망 안가고 서쪽으로 도망가는 거예요. 서쪽으로 도망가버리는 거는 당시까지 역사적으로 있지 않았던 현상인 거예요. 황당한 거예요. 뭔가 정보가 있으니까 이제 계산도 있었겠죠. 이들은 질 경우에 대비가 있었겠죠.
어디로 갔냐면 오늘날 사천(四川) 지역으로 도망 가 버린 거예요. 거기 가니까 비옥한 농토가 있고, 원주민들이 있죠. 그 원주민들의 문화와 결탁이 돼가지고 거대한 혼혈 합종 문화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러고는 깃발을 다시 들어요. ‘우리는 주나라야! 우리는 하나라의 후예고, 화려해진 하나라야 우리는 화하(華夏)야!’
북쪽으로 안 도망간 인간들이 만들어낸 특이한 경험으로부터 중국의 한족은 시작했고, 한족의 역사는 처음부터 혼혈이었던 거예요. 북쪽으로 안 도망간 황당한 하족(夏族) 일부의 선택에 의해서 사천에서 만들어져서 권토중래 (捲土重來) 해서 와서 주나라를 세웁니다.
은나라는 서쪽으로 도망갈 데도 없어요. 동쪽으로 갈 때도 없어 다시 북쪽으로 도망갔죠. 일부도 남아 동쪽으로 도망갔다고 하죠. 그게 누구죠? 기자라고 했죠. 그래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이런 게 있죠. 이유가 북방으로 도망가는 게 보편적인데, 하나라가 한번 깨고 나서 보니까, ‘그래 꼭 왔던 데로 갈 거 없잖아. 여기저기 새로 된 데 있나 보자!’ 바다도 건너가 보고 뒤져보는 거죠. 은나라는 하나라의 뒤를 이어서 도망가는 방향을 다양화시켰죠. 그 바람에 오늘날 만주 일대가 개발됐죠.
아무튼 그렇게 와서 자기들끼리 바운더리(Boundary)를 만든 개념이 주나라예요. 그 주나라가 분열되면서 서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 춘추와 전국 시대고요.
그때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그 주나라 영역 안에서 ‘마침내 여기서 결정 봐! 더 이상 문자의 진보는 없어! 이걸로 우리는 표준을 삼을 거야. 끝! 이제 시작이야. 이제는 이걸 갖고 개발 시작이야. 계획서는 그만!’ 이렇게 선언을 한 그게 뭐냐? 바로 ‘청동기 금문’이에요. 그리고 갑골 시대의 몰락이에요.
갑골은 은나라가 끊임없이 썼던 거잖아요. 그거를 다 받아들여요.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자기들이 개발한 거를 추가해요. 마침내 청동 금문이 옴으로써 700개의 문자가 1,400개 문자로 확장되면서, 언어를 통한 버리기와 언어를 통한 보편성, 근접성의 확보가 이루어지고 문화를 피울 수 있는 준비가 되죠. 그 결과 여기에 기초해서 그 초기에 이걸 이용했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오는 거예요.
백가쟁명(百花齐放)의 시대가 나오는 거죠. 그 시대 때 나왔던 것들은 지금도 텍스트고 고전이에요. 지금도 그 당시의 사상으로부터 크게 넘어가는 게 없을 정도예요. 법가며 겸애(兼愛) 묵가며, 공자의 유가며, 노자 장자로 이어지는 도가며, 지금도 그걸 넘어서는 게 거의 없어요.
있어봐야 그걸 두들겨 뭉친 정도에 불과해요. 유가! 그게 얼마나 거대했으면 유가를 해석해서 수많은 국가를 운영할 통치 이념이 나올 정도였겠어요? 명나라도 그걸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송나라도 그랬고, 당나라도 그랬고, 한나라도 그랬습니다. 그걸 재해석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거대한 문화의 기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에도 남아 있는 문자의 초기 관념과 7천 년의 시간들을 되돌아 보는 것!
그게 7천 년의 고민이에요. 언어를 보면서 내 안에 있는 언어가 그런 고민 끝에 왔다는 거예요. 그 고민 끝에 왔다는 사실만 알잖아요, 그러면 내가 쓰는 말에 대해서 조금 더 조심스러우실 수 있고 내가 함부로 문자를 파괴 안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문자를 파괴하는 순간 문화가 파괴돼요. 제가 “7천 년의 고민”이라는 책을 써봤자 여기 있는 분들도 다 안 사줄 건데요. 제가 말하는 내용을 글 정말 잘 쓰는 사람이, 정말 이야기를 맛깔 나게 하면 베스트가 되겠죠. 저 같은 사람이 쓰면 코미디를 갖고 써도 안돼요. 쓰다가 버려요. 저는 글 쓰면서 붙이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버리기를 하는 사람이어서 점점 쓰면 쓸수록 어려워져요. 그 점은 제 못난 점이니까요.
아무튼 언어들을 썼던 그 초기 관념들이 아직도 내 속에 다 남아서 우글거리고 있어요. 여전히 우글거리고 있어요. 아까 보셨잖아요. 아이 아(兒)자의 개념이 여전히 그런 식으로 남아 있어요. 여전히 우리에게는 하늘과 하늘을 닮아가야 해요. 뭔가 심심하면 그래요. ‘가끔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보라’ 그러잖아요. 그리고 지는 서산의 해를 보면서 ‘돌아갈 때가 됐구나!’ 새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돌아갈 귀(歸)잖아요. 귀여(歸與) 귀여(歸與)!
사람들이 지금도 보면은 속이 까맣다, 탔다 그러잖아요. 속이 ‘빨갛게 탔다’라고 안하고 ‘까맣게 탔다’라고 하잖아요. 부뚜막에 불 때보고 생긴 게 까만 거니까, 타는 거는 까만 거니까, 그런 식으로 아직도 우리 생활에 엄청나게 남아 있어요. 그것이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을 정도로 남아 있어요. 아마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있다면 죽어서도 그 말들을 가지고 세상을 표현하려고 할지도 모를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문자들이 애초에 북이면 북 발음, 서면 서라는 발음, 동이면 동이라는 발음, 그 발음이 먼저 있고, 그 발음에 맞추려고 개발해 왔다는 거예요. 그 발음에 맞추려고 개발해 왔다는 거예요. 지금도 동이라는 발음을 하면 동의 느낌이 오게 돼있고, 서라고 하면 서의 느낌이 있어요. 열심히 달리는 데 동! 그러면 안 서요. 서! 그래야 서고 멈추죠. 사람을 죽일 때는 남! 하고 찔러 갖고는 안 죽어요. 돌아가는 거니까 북! 하고 찔러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해당되는 또 다른 어소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똑같아요. 그 어소들의 음감이 몸에서부터 나왔다는 것! 그 몸이 엄청난 고민을 만드는 축적 기간이 있었다는 것! 7천 년의 고민기가 있었다는 것! 마침내 음가와 표기 방법이 갖추어지는 거대한 문화 완성기가 있었다는 것!
해동기죠. 프로그램이 완성된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4천 년 동안 그걸 갖고 이렇게 살아왔어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만큼 써먹었어요.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7천 년을 돌아보는 것도 저는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오늘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일단 질문 받을게요.(본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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