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회고록] 세월호(중) - 세월호 그날 청와대 왜 갔나…朴이 밝힌 ‘최순실 미스터리’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는 이날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최씨가 과거에 유치원 원장을 했었기 때문에 평소 최 원장으로 호칭) 원장의 청와대 방문일 것이다. 최 원장 문제는 나중에 별도로 상세히 다루도록 하고, 여기선 당시 청와대 방문 경위만 설명하려 한다. 혹자는 내가 세월호가 침몰하자 당황해서 최 원장에게 대책을 물어보려고 긴급히 호출했다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 원장의 방문은 그 전에 예정돼 있었다. 최 원장은 그 전부터 가끔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화장품이나 속옷 등 일상용품을 대신 구입해 가져다주곤 했다. 내가 정치 일정으로 따로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거니와 이런 것을 대신해줄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전부터 알고 지낸 그녀에게 부탁한 것이다. 세월호 침몰에 최순실 긴급 호출? 아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날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평소 같으면 최 원장의 방문을 취소시켰을 것이다. 그녀와 개인적인 용무를 볼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날 사고가 너무 큰 데다 구조 상황이 정확히 파악이 안 돼 발을 구르다 보니 최 원장을 만나기로 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내가 취소시키지 않았으니 그녀는 예정된 시간(오후 2시15분)에 맞춰 청와대 관저에 도착했다. 사실 그때 최 원장이 관저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국가안보실에서 들어오는 보고서를 받으면서 구조 상황을 계속 확인 중이었다. 2시50분쯤에는 언론에서 보도된 ‘전원 구조’가 잘못된 보고라는 것이 확인돼, 중대본 방문을 급하게 결정했던 때였다. 최 원장과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다. 일각에서는 내가 최 원장과 세월호 침몰에 대한 정부 대응에 대해 논의했다고도 하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분명히 말하지만 최 원장은 나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위치가 아니었다. 최 원장은 내가 정계 입문을 했던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 때 캠프에서 일을 도왔던 사람이다. 그 때문에 정호성 비서관 등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당시 내가 안보실의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동안 최 원장은 정 비서관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거나 나를 위해 구입해 온 물건들을 관저 직원들에게 맡기는 등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허무맹랑한‘세월호 7시간’ 루머, 기가 막혔다 2014년 7월 7일 국회 운영위 회의에 참석한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세월호 사고 당시 나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대통령) 위치는 모른다”고 답한 것이 많은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데 불을 붙인 측면이 있다. 김기춘 실장은 대통령의 일정과 동선을 함부로 공개하기 어렵다는 보안 의식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은 모양새가 됐다. 이것은 ‘잃어버린 7시간’이라고 명명되면서 각종 허무맹랑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심지어 한 언론(조선일보 2014년 7월 18일자)에서는 황당한 루머를 칼럼에 소개하기도 했다. 세월호 사고 당일 내가 정윤회(최 원장의 전 남편)씨와 한 호텔에서 만났다는 것인데, 너무나 기가 막혔다. 아무리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까지 써도 되는 건가 싶어서 청와대에서 공식 대응토록 했다. 청와대 시스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면 이런 칼럼은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어딘가 외출을 한다면 반드시 경호실이 함께 움직이게 된다. 중대본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대통령은 어디를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청와대 밖에서 남들 눈을 피해 떳떳하지 못한 밀회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면 상식과 같은 내용인데 왜 그런 지적이 없었는지 안타까웠다.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라 시간이 지나면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를 진실인 듯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어서 적지 않게 놀랐다. 아무튼 김기춘 실장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차라리 당시에 모든 것을 밝히거나 아니면 비공개로 구두보고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으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는 일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떤 사람들은 2014년 4월 16일의 일정만 제대로 밝혔어도 탄핵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비록 이것이 탄핵 사유에 포함됐던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국민에게는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쌓이게 된 결정적 순간 중 하나라는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오후 6시 중앙대책본부에서 관저로 들어온 나는 밤늦게까지 계속 세월호 구조 상황을 모니터했다. TV 속 가족들의 모습에 과거의 내가 겹쳐지는 듯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흉탄에 돌아가셨던 나로서는 갑자기 가족을 잃게 되는 비통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래서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가족들의 상황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또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안고 어린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밤을 꼬박 새울 부모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심정이 어떨지를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보낸 나는 17일 오전 모든 회의를 취소하고 비상근무태세에 돌입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밤새 진행된 추가 구조 상황 등을 보고받고 사고 사망자 및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으로 향했다. 이제야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진도를 가는 것에 대해 참모들은 우려가 많았다. 16일 자정 무렵께 정홍원 총리가 팽목항을 찾았다가 현장에서 사고자 가족들이 던지는 물병을 맞는 등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자식의 일이라면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자녀들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는데, 그렇게 격앙되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물병을 몇 번 맞더라도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용기 편으로 광주공항에 도착한 뒤 먼저 전남 진도군 인근 해상의 사고 현장을 방문해 수색 상황을 직접 점검하고 군과 해경 등의 구조 활동을 독려했다. “이렇게 많은 인력과 장비가 총동원됐는데 구조가 더뎌서 걱정이 많다. 어렵고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구조 요원의 안전에도 만전을 기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체육관에서 마주한 가족들…정무수석 현장 남겼더라면 오후 4시40분 진도 실내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참모들이우려했던 돌발 상황은 없었지만, 사고자 가족들은 원망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저 가슴이 얼마나 타들어 가겠나. 어떻게든지 저분들을 위로하면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라는 마음뿐이었다. 격한 반응도 있었다. “정부가 이틀 동안 한 일이 무엇이냐”는 고함도 튀어나왔다. 나는 체육관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과 인력을 동원해 수색에 최선을 다하겠다. 어떤 위로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깝고 애가 타고 참담하겠지만 구조 소식을 기다려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으로 책임질 사람은 엄벌토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장에서 협조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며 불만이 컸다. 예를 들어 승선자 명단과 구조작업 현황판 등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전혀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관계자를 불러 “가족들이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 잠수하러 내려가서 어떻게 됐는지 자세하게 알려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장도 최선을 다하지만, 가족도 알아야 한다. 애가 타고 미칠 거 같은 이분들에게 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또 현장 소식이 제대로 전달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대형 TV도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내가 관계자들에게 지시한 사항을 가족들에게도 그대로 전달하자 그나마 마음이 놓인 눈치였다. 그러면서 내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진심이 전해졌는지 청와대로 돌아갈 무렵 유족들은 “가지 마세요”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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