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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풍대08블로그임다 원문보기 글쓴이: 어풍대08
우애로운 형제들의 아담하고 반듯한 집.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10여 m 들어가면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있고, 개울에 놓인 다리 건너 산기슭에 멋들어진 경체정이 눈앞으로 바싹 다가서서 보인다. 다리를 건너 정자를 바라보고 서면 앞 담장의 왼쪽 끝 언저리에 사주문이 있는데 이곳이 정자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정자 밖에는 넓은 네모난 형태의 연못이 있다. 연못은 돌로 축대를 쌓아 반듯하지만 현재 연꽃은 자라지 않고 물도 적어 잡풀만 무성하다. 정자 주위의 나무는 크고 보기 좋아 정자와 잘 어울린다. 특히 정자 담 밖 정면에 자리 잡은 회화나무는 정자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최근 문지기 노릇을 제대로 못하였다. 앞면 오른쪽에 있던 예서체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인데, 2006년 6월에 도난을 당했다. 건물에 붙어 있는 현판이나 문짝 등은 그 건물에 붙어 있을 때에 참된 가치를 지닌다. 수백 년 된 건물을 훼손하면서 뜯어 가봤자 큰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건물만 제 모습을 잃고 만다. 왼쪽의 해서체 현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글씨이다. 이 정자의 현판을 쓴 김정희, 김병국이 모두 노론 쪽 인물들이므로, 경체정 주인인 법전강씨들이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노론에 속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쪽 방 쪽에 걸려 있는 글씨는 망월재(望月齋), 즉 달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이다. 둥근 기둥에는 후손들이 시구(詩句)를 적은 주련(柱聯)을 붙였고 , 내부에도 10여 개의 시판(詩板)을 걸어두었다. 정자 뒤편 암벽에는 정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자의 이름인 경체정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시 ‘상체지화(常?之華)’에서 따온 말이다. 상체시의 내용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다. 상체[아가위] 꽃에 꽃받침이 두드러져 보이듯 형제간의 사이는 그 어느 경우보다도 가깝고 친하다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이 내용이 정자의 기문에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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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출 인물 | |
강윤(姜潤),강완(姜浣),강한(姜瀚) | |
- 교유 인물 | |
김원행(金元行),권진응(權震應) | |
- 벼슬을 가볍게 본 강씨 형제 | |
증 이조 참의 강이일(姜履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 치료를 위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성심으로 봉양하였다 한다. 1747년 식년 문과(式年文科) 을과에 급제, 승문원을 거쳐 1758년 예조 좌랑에 승진하였다. 사헌부, 사간원,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거쳤다. 모친상을 벗은 뒤 1765년 이후로 또한 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99년 정조 때 비로소 승지에 잠시 취임하였다. 그가 돌아가자 나라에서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산수헌(山水軒) 권진응(權震應, 1710∼?) 과 교우하였다고 한다. 그가 미호를 따른 것에서 알 수 있듯,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퇴계 이황을 흠모하여, 자신의 생활을 ‘퇴(退)’자의 의미를 지키는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신도비명을, 동생 강한(姜瀚)이 행장을 지었다. 유고가 2권 전해져 온다. 강한(姜瀚)은 참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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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고향 동해로 온 것을 생각하니
자손들이 이에 크게 밝은 봄날을 맞게 되었구나.
백 년 동안 쌓은 덕은 남아서 머무르며
삼조(三祖)의 유풍은 오랫동안 사람에 배였네.
대가 지나고 마음도 떠나 소원한 곳.
명분과 의리를 생각하니 슬퍼지고 마음이 상하는구나.
슬프다 소자들아 각각 새기고 힘써서
하늘에 부끄러움 없고 사람도 두렵지 않게 살라.
- 강두환(姜斗煥), 『기헌유고(起軒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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