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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봉화,법전리..버제이강씨..경체정!!
이장희 추천 0 조회 65 15.01.08 19: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애로운 형제들의 아담하고 반듯한 집.

봉화읍에서 현동 태백 울진으로 가는 36번 도로를 타고 40여 리를 가면 법전면 중심에 이른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10여 m 들어가면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있고, 개울에 놓인 다리 건너 산기슭에 멋들어진 경체정이 눈앞으로 바싹 다가서서 보인다.

다리를 건너 정자를 바라보고 서면 앞 담장의 왼쪽 끝 언저리에 사주문이 있는데 이곳이 정자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 건물은 19세기 중엽에 건립되었지만 아주 아름답게 지어진 정자이다.

정자 밖에는 넓은 네모난 형태의 연못이 있다.

연못은 돌로 축대를 쌓아 반듯하지만 현재 연꽃은 자라지 않고 물도 적어 잡풀만 무성하다.

정자 주위의 나무는 크고 보기 좋아 정자와 잘 어울린다.

특히 정자 담 밖 정면에 자리 잡은 회화나무는 정자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최근 문지기 노릇을 제대로 못하였다.
경체정 앞면에 경체정이라는 2개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앞면 오른쪽에 있던 예서체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인데,

2006년 6월에 도난을 당했다.

건물에 붙어 있는 현판이나 문짝 등은 그 건물에 붙어 있을 때에 참된 가치를 지닌다.

수백 년 된 건물을 훼손하면서 뜯어 가봤자 큰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건물만 제 모습을 잃고 만다.

왼쪽의 해서체 현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의 글씨이다.

이 정자의 현판을 쓴 김정희, 김병국이 모두 노론 쪽 인물들이므로,

경체정 주인인 법전강씨들이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노론에 속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자 오른쪽 면 대청 쪽에 걸려 있는 현판은 전서체의 경체루(景?樓)이고,

그 뒤쪽 방 쪽에 걸려 있는 글씨는 망월재(望月齋),

즉 달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이다.

둥근 기둥에는 후손들이 시구(詩句)를 적은 주련(柱聯)을 붙였고

, 내부에도 10여 개의 시판(詩板)을 걸어두었다.

정자 뒤편 암벽에는 정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자의 이름인 경체정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시

‘상체지화(常?之華)’에서 따온 말이다.

상체시의 내용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다.

상체[아가위] 꽃에 꽃받침이 두드러져 보이듯 형제간의 사이는 그 어느 경우보다도 가깝고 친하다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이 내용이 정자의 기문에 실려 있다.


 

건축 배경

원경

담장 밖에서 본 정면 오른쪽 전경

전경

담장 밖에서 본 정면 왼쪽 전경

오른쪽 측면 뒤 사경

정면 왼쪽 끝 기둥에 주련 걸린 모습

오른쪽 담장 안쪽

뒷면

경체정

경체루

망월재

주련1

누정 이야기
- 법전리 진주강씨 이야기


옛날 법전에는 법흥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큰 밭이 있었다.

그 밭에 마을이 생겼다고 해서 법전(法田 : 또는 法典)이라고 한다.

법전은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많이 살고 있는 집성 마을이다.
버전이라는 명칭도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법전리에서 3백 수십 년간 세거하는 진주강씨네를 버전이 강씨 혹은 버재이 강씨라고 한다.

법전리는 법전면의 중심소재지로서 봉화읍과 소천, 현동을 연결하는 국도 36번이 통과한다.
법전리 가운데 남향으로 흐르는 폭이 5, 6m쯤 되는 조그만 개울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개울의 오른쪽은 순흥부 와단면이었고

왼쪽은 안동부 중춘양면이었다.

그래서 개울의 오른쪽 마을을 순흥법전이나 음지마을(음지마)이라고 부르고, 왼쪽은 양지마을(양지마)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1600년대 도사(都事) 강윤조(姜胤祖)의 아들 가운데 형 강흡(姜恰)이 음달에 거주하고,

동생 강각(姜恪)이 양달에 거주하였다.

동생 강각이 양지마에 거주하면서 새로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새마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형적으로 양달에 위치하여 양지마라 불렸다.
건너 마을 형이 살던 곳은 상대적으로 음달에 위치하여 음지마로 불린 것이라고 한다.

음지마에는 현재 진주강씨의 종택이 있다.

음지마 지역에는 잠은(潛隱) 강흡(姜恰)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대과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 당색으로 양지마는 소론, 음지마는 노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소원하여 교류가 뜸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개울에 놓인 2개의 다리도 노론다리, 소론다리를 구분해 놓고 음지마 사람들은 노론다리로 건너다니고,

양지마 사람들은 소론다리로만 건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강윤(姜潤),강완(姜浣),강한(姜瀚)
- 교유 인물
김원행(金元行),권진응(權震應)
- 벼슬을 가볍게 본 강씨 형제


강윤(姜潤, 1711∼1782)의 자는 덕이(德以), 호는 법천(法川)이다.

증 이조 참의 강이일(姜履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 치료를 위해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성심으로 봉양하였다 한다.

1747년 식년 문과(式年文科) 을과에 급제, 승문원을 거쳐 1758년 예조 좌랑에 승진하였다.

사헌부, 사간원, 세자시강원의 벼슬을 거쳤다.
그 뒤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노모를 위해 모두 사퇴하였다.

모친상을 벗은 뒤 1765년 이후로 또한 나라에서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99년 정조 때 비로소 승지에 잠시 취임하였다.

그가 돌아가자 나라에서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을 따랐으며,

산수헌(山水軒) 권진응(權震應, 1710∼?) 과 교우하였다고 한다.

그가 미호를 따른 것에서 알 수 있듯,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퇴계 이황을 흠모하여, 자신의 생활을 ‘퇴(退)’자의 의미를 지키는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신도비명을,

동생 강한(姜瀚)이 행장을 지었다. 유고가 2권 전해져 온다.
3형제 중 강완(姜浣)은 첨지중추부사,

강한(姜瀚)은 참봉을 지냈다.

경체정 시
(景?亭 詩)


예전에 고향 동해로 온 것을 생각하니
자손들이 이에 크게 밝은 봄날을 맞게 되었구나.
백 년 동안 쌓은 덕은 남아서 머무르며
삼조(三祖)의 유풍은 오랫동안 사람에 배였네.
대가 지나고 마음도 떠나 소원한 곳.
명분과 의리를 생각하니 슬퍼지고 마음이 상하는구나.
슬프다 소자들아 각각 새기고 힘써서
하늘에 부끄러움 없고 사람도 두렵지 않게 살라.
- 강두환(姜斗煥), 『기헌유고(起軒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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