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이 재 평가돼야한다는 필자의견
(‘2015년 3·1절 국가사랑 불 짚인 안산’ 관련)
선감학원관련 정진각 선생님의 견해에 대한 의견입니다.
1939년 9월 발발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12월 7일 일본과 미국이 하와이에서 테이블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종전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순간 일본은 미국 진주만을 기습공격 했다. 그 때문에 확전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에 일제가 선감도에 감화원을 세웠다.
일제가 선감학원을 세운 1942년은 세계 2차 대전을 수행하느라 어려운 시기였다. 그래서 일제로서는 식민지국민의 안위를 위해 농업기술을 가르친다던지 할 수 있는 그런 때가 아니었다. 그 점 여러 가지 정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른 자료는 차치하고
2011년 11월 30일 안산시가 발행한 안산시사만 (상임편찬위원 정진각 등 편찬위원회)보아도 선감학원 수용자가 부랑아나 거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안산시사 1권 P524에서 언급된 내용에 일제가 함경남도영흥에 설치한 감화원에 ‘독립운동도’포함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지배정책에 순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을 목적’ 그 두 가지 취지, 목적만 보아도 1941년 8월 26 설치한 선감학원을 왜 만들었는가는 명백해진다.
단순 교화목적이고 영농기술등만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면 그들을 감금 인권탄압까지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당시 선감학원에 수용된 소년들은 인권탄압을 견디다 못해 탈출하려했고 때문에 매를 맞아 죽고, 바다에 빠져 죽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영양실조로 죽기도, 초근목피로 연명하기도, 독버섯을 잘 못 먹어 죽기도 했다고 안산시사에 기록되어있다.
위 정황만 가지고도 선감학원에 수용 된 수용자 모두가 거지와 부랑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방황 그러다 부랑아로 거지로 잡혀 수용됐을 것이라는, 또 다른 이유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는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여유와 경제적으로 안정이 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재정 때문이라며 부랑아 등에 대해 국가차원이 아닌 민간에게 대책을 의존했다는 사실,
또 다른 하나로는 1941년 12월 7일과 8일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전쟁을 확전 1945년 8월 6일과 9일 나가사기에 핵폭탄을 투하 하는 등 1940년대 일제는 전쟁 이외는 또 다른 부분에 더군다나 식민지국가에 어떤 배려도 할 여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국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하겠다는 일제가 부랑아, 거지를 감금 그것도 청소년만을 감금 인권을 탄압하고 죽음으로 내 몰았을까? 그런 생각은 상식수준이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기에 선감학원에서 비통하게 사라진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 심도 있게 조사연구 재평가돼야한다고 생각한다. 단연코 거지와 부랑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첫댓글 한국인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곳에서 '1930년대 후반에 식민지배정책에 순응하는 사람을 만드는 정책'에 관한'토론을 벌이기에는 적당치 않은 것같습니다. 우리카페'선감학원 관련사항'게시판에 자세한 내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