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인들의 대부격이라 할 수 있는 고 박종일 씨 같은 분도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한다고 한 적이 있다. 하느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의 믿음으로 존재하므로 사실적으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존재 여부를 확률로 나타낼 수는 없다. 그래서 오히려 확신을 못한다는 표현이 상당히 솔직하고 겸허한 대답이라 생각한다. 구약 성서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표현 대신에 '살아 계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죽은 자가 아무런 활동이 없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우리와 반응하고 계시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다. 흔히 신의 존재 증명과 같은 토론에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나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면서 내 모든 일에 어떤 방식으로 간섭이나 권고나 지시를 하는 존재로서 인식하는 것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곧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신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는 것은 내재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존재 방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사물이나 인간과 같은 개체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우상을 만들지 마라고 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하지만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을 주로 초월적 존재자로 묘사하고 있다. 초월적 존재자라는 것은 사물과 같은 존재자로 우리 세계 외부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로는 알지만 '아버지'로서는 알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 앞에 다정히 나아가지 못하고, 성전의식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세계 외부에서 우리 세계를 들여다 보고 일일이 간섭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세계 안에 계시어 세계를 진행시키며, 우리 인간 안에 그리고 내 안에 계시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하도록 작용하시는 분이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작용이기 때문에 나의 사고와 행동으로 구원이 되기도 하고 유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 의지와 그분의 예정이 평행하면서도 모순됨이 없이 성립되는 이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여호와로서 보다는 아버지로서 부르기를 즐기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모범적 기도 가운데서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밀착하여 계시는 아버지로서 다정하게 다가올 것을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신의 존재 증명에서 나타나는, 또한 구약 성서에서 나타나는, 초월적이고 두려운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서 다정스럽게 우리의 필요와 권고와 조언을 하시는 아버지로서 우리와 반응하며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