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르게 기억(正念)합시다!
작년 다르고 올 다르다는 이야기를 흔히 합니다.
짜장면을 먹다가 단무지를 반찬으로 먹는데 한 그릇을 다 먹은 뒤에 보면 이상하게 한 입만 베 물은 단무지가 대여섯 개나 되어 놀란다는 이야기도 흔히 합니다. 모두가 기억력이 흐려져서 건망증에 걸렸다는 말들을 하지요. 건망증이 심해지면 치매에 걸린다고 합니다.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점에 관해서도 많이 이야기하지요? 약속을 해놓고 깜빡 잊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하면 건망증이고,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편안히 살고 있으면 그게 치매라고 하지요.
이렇게 나이가 들면 기억에 관한 관심과 함께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이든 사람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컴퓨터를 쓰면서 머리를 쓰는 일이 적어지고, 노래방에 가면서 노래가사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적어진다고들 합니다.
'경험은 지혜의 아버지이며 기억은 그 어머니'라는 영국 속담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억의 중요성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가 보고, 듣고, 겪었던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도 하고, 연상(聯想)도 하면서 노력하는 것이지요.
‘영리한 아이는 기억하는 것이 빠르지만, 노력하고 애를 써서 배운 아이는 한번 기억한 것을 잊지 않는다’는 『플루타크영웅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교훈 삼아 오늘도 8정도의 일곱째 지분인 정념(正念) 즉 바르게 기억하기를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것이 바른 기억인가? 바른 기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세속의 바른 기억으로 번뇌와 집착이 있고 선취(善趣)로 향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세속을 벗어난 성현의 바른 기억으로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게 하여 괴로움의 끝(苦邊)으로 향하게 한다."
『잡아함경』제28권 788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른 기억의 종류를 설명하고 있는데 전에 공부한 8정도의 다른 지분처럼 세속의 바른 기억과 세속을 벗어난 바른 기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지요?
바른 기억은 빨리어로 '바른'에 해당하는 삼마(samma)와 '기억'에 해당하는 사티(sati)의 합성어입니다. '삼마'는 '바르다'는 뜻으로 거의 일치되게 보는데 비해, '사티'는 '마음챙김‘'기억', '새김', '집중' ’마음지킴‘등으로 해석이 갈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기억', '바른 마음새김', '바른 집중'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너무 전문적인 영역이라서 쉽게 구분이 가지는 않습니다. 저는 ’온마음‘이라 합니다.
다만, 사티가 집중의 뜻으로 해석될 때는 어두운 밤길을 혼자서 걸어갈 때 발밑의 상황도 모르고, 전ㆍ후ㆍ좌ㆍ우에서 무엇이 나올지도 알 수 없는 일종의 무지(無知)한 두려움의 상태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갈 때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작은 변화나 공격에도 무너지고 적응하지 못하게 되므로 전력을 다해 집중하게 되지요.
마음새김으로 해석할 때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마음을 분별적인 사유나 숙고(熟考)에 휩싸이지 않고 사건을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협지를 잘 보는 분들은 흔히 무공(武功)이 약해지거나 피로에 지쳤을 때 가만히 앉아서 좌선의 상태로 삼매에 드는 것 같은 일을 할 때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한다고 합니다. 기를 돌리고 숨을 조화롭게 고른다는 뜻입니다. 이때의 상태는 어떤 약한 무공을 지닌 이에게도 공격을 받으면 당하게 된다는 이론과 몸의 관리를 자연에 맡겨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므로 전 방위에서 어떤 적이 공격해 와도 몸이 알아서 저절로 막을 수 있다는 이론이 있는데, 후자의 것이 맞는다고 했을 때 그 상태가 바로 무의식적인 즉각 대응의 의미에서 마음새김과 통합니다.
기억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의ㆍ집중을 잘해야 기억이 잘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이 기억에도 번뇌와 집착이 있고 선취(善趣)로 향하게 세속의 바른 기억과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게 하는 세속을 벗어난 바른 기억이 있습니다.
8정도의 앞 지분에서 여러 번 공부한 것처럼 선취(善趣)는 중생이 윤회하는 여섯 길(六道) 중에서 그 고통이 심하고 삶의 질이 낮은 수준인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은 악취(惡趣)이며,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은 선취(善趣)입니다.
세속의 바른 기억을 수행하게 되면 비록 윤회하는 중생의 몸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악도(惡道)는 면하게 되어 불교 공부를 할 수 있는 토대는 된다는 것입니다. 세속을 벗어난 바른 기억을 수행하게 되면 악도를 벗어나 선취에 드는 것은 물론이요, 중생들이 바라고 바라던 탈 윤회의 열반(涅槃)의 세계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뇌와 집착이 있고 선취로 향하게 하는 세속의 바른 기억이란 어떤 것인가. 염두에 두고(念), 상기하며(隨念), 거듭 기억하고(重念), 기억하여 성취하는 것이 거짓되지 않고 허망하지 않은 것을 일러 세속의 바른 기억이라 한다."
『잡아함경』제28권 788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게 마련인 생ㆍ노ㆍ병ㆍ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하셨기 때문에 생ㆍ노ㆍ병ㆍ사가 일어나는 근거인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피는데 큰 관심을 가졌으며 탁월한 방법론으로 몸과 마음을 살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생ㆍ노ㆍ병ㆍ사를 벗어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의 업력(業力)이 훈습(熏習)되어 있는 기억에 관해서도 뛰어난 통찰력으로 분석해내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6근(六根)으로 각각의 감각 대상인 6경(六境)을 대했을 때 그것이 어떠한 모양, 상태, 질인가를 유심히 살펴 다른 것과 다른 점을 앎으로써 그것을 마음에 두는 것을 염두에 둔다(念)고 하신 것입니다. 기억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것과는 무엇인가 특별나게 좋거나 나쁜 점이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 전제되고, 그것은 바로 유심히 살피고 마음에 두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을 생각(念)의 머리(頭)에 있다는 뜻의 염두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생각의 흐름을 따라 마음을 움직여 보면 그것이 머무는 곳이 있고, 흐르는 곳이 있게 됩니다. 마음에 들어 예쁘고 좋은 곳에는 머물고, 나쁘고 미운 곳에는 눈길조차 주기 싫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모습을 좋은 것은 좋은 것끼리, 나쁜 것은 나쁜 것끼리 엮어서 생각을 해보면 일련의 생각들이 정리되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생각을 따라(隨念) 기억한다고 해서 상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을 담당하는 몸의 기관인 뇌(腦)의 구조가 기억작용을 통해 세포(細胞)를 쓰면 쓸수록 더 활발한 기억 작용을 하겠지만 사람들에게 시간도 많지 않고 이용해야 할 정보도 많기 때문에 한번 기억 소자에 입력하고 넘어가 버리면 얼마 안가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기 전에 한 번 더 반복학습을 하여야 기억을 원활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반복학습에 의한 반복적인 기억을 거듭 기억(重念)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기억의 과정을 거쳐 떠올린 기억을 본래의 사실(事實)이나 원리(原理), 법칙(法則)과 비추어 보아 그대로 딱 들어맞고, 그 자체가 진실을 호도하거나 자기와 남을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그대로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기억이라야 기억하여 성취하는 것이 거짓되지 않고 허망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분명히 10월 17일이 선친의 기일(忌日)인데 10월 16일에 열심히 상을 차리거나, 17일에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머리를 치는 경우도 있지요? 늦잠을 잔 일요일 아침에 학교 가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깨우면 눈을 비비면서 가방을 챙기는 경우가 바로 허망한 기억입니다. 우리가 떠올리는 기억이 허망하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판타카 존자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열심히 수행하여 번뇌를 벗어난 아라한(阿羅漢)이 된 큰스님으로 비구니 스님들에게 큰 가르침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후대의 저희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시고 증명해 용기를 주신 분입니다. 본래 형과 함께 부처님께 출가하여 '판타카형제'라 불리웠습니다.
그런데 형 판타카는 기억력이 뛰어나고 눈치가 빨라 승가(僧伽) 공동체의 생활에 빨리 적응하고, 누가 불교에 관해 물어올라치면 대답도 해주는 등 똑똑했으나 동생 판타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해력도 느린데다가 기억력도 없어서 하나를 배우면 둘을 잊어버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늘 '바보'라는 놀림을 당하는데 형 판타카는 똑똑하면서도 '판타카형제', 또는 '바보형제'로 불리는 것이 매우 싫었습니다. 형으로서 동생을 감싸고 이끌어주어야 하지만 우선 내게 돌아오는 그 놀림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창피해 죽겠고, 미련한 너는 공부해야 소용이 없을 것이니 산을 내려가 형이라도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쫓아버렸습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처님을 만난 동생 판타카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부처님은 꼭 스님이 되고 싶냐고 묻고는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판타카에게 빗자루와 걸레를 주고는 매일 쓸고 닦는 일만 하라고 시켰습니다. 스님이 되어 부처님 곁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판타카는 남들이 놀리건 말건 열심히 빗자루로 걸레로 쓸고 닦았습니다. 그렇게 쓸고 닦기만 하기를 몇 개월 된 어느 날 판타카에게 한 생각이 떠올라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아뢰었습니다.
"혹시 빗자루로 번뇌(煩惱)를 쓸고, 걸레로 마음을 닦으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정말로 위대한 깨달음이었지요. 부처님께서 그렇다고 하시자 판타카는 큰 기쁨으로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해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판타카에게 비구니 처소로 가서 설법할 것을 명하자 그 소식을 들은 비구니들이 코웃음을 쳤습니다. 소문난 바보니까 그랬지요. 비구니들은 판타카가 법상에 오르면 곤란한 질문을 해서 놀려주자고 다짐했습니다.
약속된 날 판타카는 법상에 올라 말했습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잊어버리는, 그래서 바보라고 놀림 받던 나도 하는 공부를 똑똑한 여러분이 왜 못하느냐?"고. 물론, 비구니들의 코가 납작해졌지요.
이 이야기의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공부의 주제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바른 기억에도 바르게 눈뜨고, 바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됨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속을 벗어난 성현의 바른 기억은 무엇인지 부처님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번뇌와 집착이 없고, 괴로움을 바르게 다하여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게 하는 세속을 벗어난 성현의 바른 기억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불제자가 괴로움의 범위에 대한 진리(苦聖諦)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滅聖諦),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대한 진리(道聖諦)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여 번뇌 없는 사유를 따라 염두에 두고, 상기하며, 거듭 기억하고, 기억하여 생각하는 것이 거짓되지 않고 허망하지 않은 것을 일러 성현의 바른 기억이라 한다."
『잡아함경』제28권 788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현의 바른 기억 역시 8정도의 다른 지분처럼 사성제(四聖諦)의 공부와 관련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생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출가하셨으므로 고통의 원인을 찾아보고, 고통의 없어진 상태를 알고,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알아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인 바로 사성제인 것입니다.
이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사유하되 번뇌가 개입해서 굴곡된 사유가 아닌 깨끗한 사유를 따라 염두에 꼭 매어 두고, 잊지 않도록 기억을 떠올려 상기하며, 여러 번 거듭 기억해서 그것이 내 것이 되도록 하여, 그 기억이 거짓되지 않고 허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바로 번뇌를 여읠 수 있는 상태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마음이 낱낱이 쪼개지지 않고 하나로 되어 집중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제가 온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8정도의 다음 지분인 바르게 선정(正定)함을 공부하면 번뇌를 다 없앨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제 정말로 바로 눈앞에 진리가 떠오르는 그 날이 멀지 않은 것입니다. 열심히 바르게 바른 기억(正念) 공부를 계속해서 온마음으로 꼭 깨달음을 얻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