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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13] _육체로부터 해방
151106(금요심야)
갈 5:24
우리는 지금 매주 금요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치르신 엄청난 대가와 그 결과에 관한 말씀들을 나누다가, 지난 다섯번에 걸쳐서 긴급하게 올바른 신앙생활에 관한 말씀들을 나누었고, 오늘은 또 다시 속죄의 말씀을 이어서 선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여 의로우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누릴 수 있도록, 행해주신 일들을 성경은 “속죄(Atonement)”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임해야 할 모든 악한 것들이 예수님께로 전가됨으로 예수님께서 받기에 합당하신 모든 선한 것들이 우리에게 제공되었다는 진리를 함께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속죄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9가지의 교환과 5가지의 해방”이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난 교환의 9가지 측면을 이미 다루었습니다.
첫째 교환: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써 우리가 용서를 받게 되었다.
둘째 교환: 예수님이 상처를 입음으로써 우리가 치유를 받게 되었다.
셋째 교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죄가 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 의롭게 되었다.
넷째 교환: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죽음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다섯 번째 교환: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복을 받게 되었다.
여섯 번째 교환: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가난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요를 누리게 되었다.”
일곱 번째 교환: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수치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여덟 번째 교환: “예수님이 우리의 거절을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포용을 누리게 되었다.”
아홉 번째 교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죽음으로 새사람이 우리 안에 살게 되었다.”
이상 9가지 교환의 기초 위에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기를 원하시는지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역사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룩하신 일의 영구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는, 십자가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데 실패한 것에 기인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① 악한 현 세대로부터의 해방, ②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③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살펴보았습니다.
①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② (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③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은 바울이 말한 5가지의 해방가운데, 네 번째인 “육체로부터의 해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육체란 옛사람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옛사람의 죄악 된 소욕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나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여전히 죄의 본성인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데리고 가시기 위함입니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갈5:24)입니다. 교단과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육체의 일 네 가지
갈라디아서 5장에 육체의 일 네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 5:19-21)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첫째, 성적인 부정(Sexual Impurity)
둘째, 사교(The Occult)
셋째, 분열
넷째, 방종
첫째, 성적인 부정(Sexual Impurity)이란 정상적인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음란과 음탕을 뜻합니다. 모든 종류의 성적인 부도덕함, 혼전성교, 간통, 동성애 그리고 성도착행위를 포함합니다. 이런 일에 연루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사교란 우상숭배와 주술을 말합니다. 주술은 사탄을 숭배하는 행위로 육체에 속하는 일입니다. 주술의 목적은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일단 여기에 연관이 되면 사탄의 세력이 들어와 육체를 장악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를 죄짓게 만든 최초의 소욕이 하나님의 말씀 그 이상의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말씀 그 이상의 것을 알고자 점쟁이 혹은 예언자들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그런 욕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예언의 영이 임해서 사람들의 덕을 세우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예언의 은사를 함부로 남발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고전14:29-33에 보시면 예배시간에 임하는 그 예언조차도 두 세 사람에 의해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교회의 예배가 아닌 사사로운 곳에서 예언을 하고 예언을 받는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미혹의 영들이 역사하겠습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주술로 번역된 말은 약물을 뜻하는 헬라어와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어의 제약학을 의미하는 pharmacy도 같은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약물숭배 혹은 약물중독은 주술과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상숭배 주술과 연관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셋째, 분열이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를 말합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 가정을 분열시키는 것,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모든 것은 육체의 산물이고 이런 것에 연루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에 대하여 고전3:16-17에 매우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음을 봅니다.
(고전 3:16-17, 새번역) 『[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ptheiro-),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ptheiro-)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전 3:16-17, 쉬운) 『[16] 여러분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멸하면(ptheiro-),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실 것(ptheiro-)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열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주의 종을 대적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고, 그런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방종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는 말씀처럼, 경건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며, 스스로를 절제하지 않는다면 결국 방종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고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임해야 할 모든 악한 것들이 예수님께로 전가되게 하셨고, 예수님께서 받기에 합당하신 모든 선한 것들이 우리에게 제공되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이상과 같은 더러운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육체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육체를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천년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우리의 육체도 함께 처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일을 알고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일입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가 이 진리를 알고 믿으면 그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극사약(極死藥)을 먹는 그 순간으로부터 그 몸이 죽어 들어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완전히 죽어버리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망의 독을 마시고 돌아가셨을 때, 우리의 죄악 된 육체를 완전히 죽이는 극사약이 제조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극사약을 먹을 때 우리의 육체가 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먹을 수 있는 것입니까?
먼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긴다”는 말은 “계산한다”는 말이고, “적용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육적인 본성이 올라올 때, “나의 육적인 본성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라고 선언하며 무시하는 것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둘째,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벧전 4:1-2)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로부터의 해방은 고난 없이 오지 않는다고 베드로가 경고합니다. 우리는 이 고난에 대한 기대로 자신을 무장해야 하며, 육적인 본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못을 자신의 손과 발에 박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을 뜻합니다.
데릭 프린스는 육체를 못 박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습니다.
20대 초반의 한 젊은 여성이 있다. 주님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인 그 여성은 어떤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은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교회에 나가지만, 그것은 그 여성과 함께 있고 싶어 꾸며낸 말일 뿐이다. 청년이 그 여성에게 청혼을 했다. 청년을 좋아하는 여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여성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그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서 여성에게 조언했다. “그 청년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당신과 결혼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인 양 행세할 뿐입니다. 그 청년과 결혼하면 안 됩니다.”
이 여성의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자신의 육체를 만족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인가?
그 여성의 육체는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 여성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더 사랑해.” 그 여성은 첫 번째 못을 자기 오른손에 박는다.
다시 그 여성의 육체가 속삭인다. ‘나도 가정을 갖고 아기들을 낳고 싶어.’ 하지만 그 여성은 육체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두 번째 못을 자기 왼손에 박는다.
같은 목소리가 또 속삭인다. ‘평생을 혼자 외롭게 사는 것이 두려워.’ 그 여성은 마지막 못을 자기 발에 박는다.
손과 발을 모두 못질해야 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는가?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 고통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얼마 지나면 그 여성은 자유로워지고 행복을 되찾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좋은 남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 여성이 자기 육체를 못박는 것을 거부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여성은 청년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남편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자기 가장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거나 동역자가 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십오 년에 걸친 가정불화 끝에 그 남자는 그 여성에게 아이 셋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 육체를 못 박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잘못 선택한 남자와 십오 년을 살다가 결국은 아이들과 함께 버려지는 것일까? 물론 양쪽 다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은 우리의 육적인 본성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육적인 본성을 못 박는 하나님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일지적인 고통일 따름이다. 그 여성의 아픔은 일이 년이 지나면 아물게 되고, 다시 자유로운 몸으로 여생을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게 된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특히 어떤 특별한 사역에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기가 닥치는 일이 많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그들은 육체가 원하는 바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놓치든지, 아니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고난을 당하든지 양자택일하게 된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 인격과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의 형성된다. 당신은 죄가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제공되는 네 번째의 영광스러운 해방이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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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