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재물을 분별하여 사용하고 천상 사물을 알아보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성령의 지혜를 주시기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면 누가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느냐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 달라고 옥중에서 부탁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9,13-18
13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14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15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16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17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이제 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으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레몬서 말씀입니다.9ㄴ-10.12-17
사랑하는 그대여, 9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영성체송
시편 42(41),2-3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믿는 이들을 생명의 말씀과 천상 성사로 기르시고 새롭게 하시니
사랑하시는 성자의 크신 은혜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오늘의 묵상
※2021년 11월부터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요청으로 오늘의 묵상 제공을 중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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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2022. 9. 4.)(루카 14,25-33)
♡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과 따름>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이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보면 이렇게 끝납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요한 4,53).”
‘온 집안’이 함께 예수님을 믿어서, 함께 구원을 받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그리스도교는 신앙 때문에 가족을 버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온 집안’이 같은 신앙을 가져서 함께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함께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족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실제로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인간적인 애착심’을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욕망들과 욕심들을 억제하라는 뜻입니다.
<그 애착심을 극복하고, 욕망들과 욕심들을 억제하면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애착심을 극복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육적인 애착심과 욕망과 욕심들’은 ‘죽은 이들’의 ‘죽은 일’, 즉 ‘생명의 반대쪽에 있는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또는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 ‘밖’에 있게 됩니다. 중간까지 갔더라도, 문 앞까지 갔더라도, ‘밖’은 그냥 ‘밖’일 뿐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안’이 아니면 모두 ‘밖’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에, 그는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한때 사도였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배반자’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여기서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라는 말씀을, “경비를 미리 계산해 보고,
돈이 부족하면 공사를 시작하지 마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충 해도 끝까지 갈 수 있겠지.” 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고,
처음부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가는 길은 미리 계산해 보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간절히 원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기도’입니다.
‘구원과 생명의 길’은 주님께서 부르시고 우리가 응답해서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들어할 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잘 걷지 못하면 주님께서 부축해 주실 것이고,
지쳐 쓰러지면 주님께서 업고 가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와 끝까지 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희망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1-33).”
여기서 ‘다른 임금’은 ‘하느님’이고, ‘어떤 임금’은 바로 ‘나’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로 연상되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입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 11,4).”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이라는 말과 ‘이름을 날리자.’ 라는 말은, 그 사람들이 ‘하느님 행세’를 하려고 했음을 나타내고,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라는 말은,
감히 하느님께 도전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진 것이 많든지 적든지 간에 “하느님 없이도(종교와 신앙 없이도)
나는 내 힘으로 충분히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은 모두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바벨탑은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탑입니다.
그것은 허무하고 무익하고 바보 같은 짓을 상징하는 탑입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인 하느님께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음의 결과는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지혜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