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러톤 호수(Balaton Lake)에서
헝가리는 바다가 없다. 바다를 보려면 국경을 넘어 남쪽의 크로아티아나 서남부 이탈리아 쪽으로 가는 게 가장 가까우나 부다페스트에서 승용차로 일고여덟 시간 걸리니 결코 짧은 거리도 아니다. 그곳에 가면 지중해를 볼 수 있다. 바다가 없으니 여름에는 해수욕 대신, 다뉴브강이나 지방에 있는 작은 하천에서 발을 물에 담그는 정도의 강수욕(江水浴)으로 헝가리인은 만족해야 한다. 이런 점 때문에 벌러톤 호수는 헝가리인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의 국민에게도 인기가 좋은 편이다. 헝가리의 서부에 있는 벌러톤 호수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로서 길이(동-서)가 70km이고 너비(남-북)는 6km로서 동서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 모양이다.
지난 8월 4일 나는 오랜만에 맞이한 이틀간의 황금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부다페스트를 벗어나 바다 같은 호수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바쁜 현장 업무 때문에 연휴가 아니면 가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역사적 유물들은 부다페스트 시내에 모두 모여 있으니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갈 수 있으나 승용차로 지방 나들이를 하기는 쉽지 않다. 잘 발달한 고속도로 덕분에 국토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은 헝가리는 모든 지방 여행이 일일생활권이다. 벌러톤 호수도 예외는 아니다.
아침 9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아파트를 출발한 나는 집 인근 주유소에서 충분히 연료를 채운 후 시동을 걸었다. ‘waze(웨이지)’라는 내비게이션 앱에 목적지를 등록하고 출발 버튼을 누르면 굵직한 한국 남성의 성우 목소리가 들린다. 마치 한국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의 안내 방송에 따라가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쭉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 오르막 내리막이 없고 거의 직선거리이기 때문에 보통 시속 150km 이상 속도로 쌩쌩 달린다. 길 양옆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에 추수가 끝난 밀밭과 옥수수, 해바라기가 가득하다. 같은 동유럽이지만 폴란드와 다른 점은 울창한 숲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M7 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방 도로로 들어서자 자연의 모습은 더 진하게 눈앞에 전개되고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져 올수록 나지막한 산등성이 아래로 빨간 지붕을 한 집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뚫고 보이는 모습이 여간 앙증맞지 않다. 동화 속에 나오는 난쟁이 집 같은 느낌이 든다. 헝가리는 건축법상 높이 96m 이상 건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대도시를 제외한 지방에서는 높은 건물과 아파트나 연립주택을 좀처럼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낮은 인구밀도와 너른 평지 때문에 굳이 건물을 높게 지어 살 이유가 없기에 양옥 형태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룬다.
호수가 가까워져 오면서 교통량이 늘어나고 있다. 휴양지답게 인접국의 번호판이 달린 승용차도 눈에 띈다. 유럽 대부분 국가의 번호판은 공통으로 파란색 바탕에 12개의 황금색 별이 둥글게 그려져 있는 유럽연합 국기가 있고 그 아래 영문자 국명의 첫머리 표기가 되어 있어 어느 나라에서 온 차량인지 알 수가 있다. “우리는 모두 유럽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다. 공산주의로부터 해방된 동유럽국가의 국민이 ‘유러피언‘이라는 호칭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주택가로 들어가니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근처에 호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호수를 하루 만에 다 돌아볼 수는 없기에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몇 군데를 선택했다. 티하니(Tihani)마을. 이곳은 높은 언덕과 자그마한 능선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호수를 조망하기에 너무 좋은 위치다. 그리고 그 언덕 정상에는 18세기 중반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도원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교회의 벽에 부딪혀 울려 퍼진 교회 종소리가 북쪽의 산언덕으로 갔다가 메아리쳐 오는 소리를 듣고 이 마을을 에코(echo) 마을, 즉 메아리 마을이라 별명을 붙였다고 하며 이를 성스럽게 여기고 성역화하였다. 우리 풍수지리로 보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이다. 물과 언덕이 만나면 아름다운 설화를 낳는가 보다. 다뉴브강을 끼고 도는 겔라르트 언덕이 그러하고, 독일 라인강 변에 있는 로렐라이 언덕 또한 애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으며 말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명 시인의 시 ‘내 마음은 호수’가 문득 머리를 스치었다. 나의 큰 누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보다 17살 위인 큰 누님은 이 노래를 학창 시절에 가장 즐겨 불렀다. 나는 이 노래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나도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70 년 전에 듣고 불렀던 노래가 메아리쳐 되울림 되어 오는 것 같다. 막내였던 나를 끔찍이도 사랑해주셨던 큰 누님이 보고 싶다. 12시 정오가 되자 교회 종소리가 경건하게 울려 퍼진다. 기독교 신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며 손으로 십자를 그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멈추어 서서 교회를 바라보았다. 그 종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것 같았다.
호수를 둘러싼 것은 낮은 산과 숲 그리고 사이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는 작은 집들이다. 높은 건물도 없다. 비라도 많이 오면 넘칠 것 같은 수면의 호수가 잔잔하다. 각양각색의 요트가 수를 놓은 듯 조용히 물결을 가르며 항해하고 있다.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백조 두 마리가 넘실거리는 파도를 껴안고 한가로이 앉아있는 모습이 여간 평화로워 보이지 않는다.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바로 여기에서 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호수 전체를 다 조망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장소는 없다. 그나마 내가 서 있는 곳이 가장 높은 언덕인데도 전체를 볼 수 없는 게 좀 아쉽다. 호수가 주변에는 휴양 시설들로 가득 찼다. 민박집, 호텔, 요트장, 고급 식당, 캠프장, 스포츠시설, 자전거도로, 순환 열차, 라벤더 군락지, 목장 등. 여름 휴가를 맞아 많은 사람이 온 것 같다. 시끌벅적하기보다 한적한 시골 같은 분위기다. 우리와는 좀 다른 피서지 환경이다. 호수를 한 바퀴 돌려고 했지만, 너무 볼거리가 많아 하루 일정으로 어려울 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호수가 주변 순환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순환도로를 달리는 제주도의 느낌이다. 평평한 초원 위에 여인의 젖가슴처럼 볼록하게 오른 나지막한 동산은 제주도의 오름을 연상케 한다.
나 혼자만의 여행이기에 다소 심심한 면은 없지 않았으나 오랜만에 새로운 세상을 조용하게 경험했다는 점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기회가 되었고 글의 소재를 발굴하기에도 딱 좋았다. 무엇보다 벌러톤 호수에서 물과 언덕 그리고 메아리(echo)를 얻은 게 큰 소득이다. 마치 우리 31구락부의 글이 이 3가지를 다 갖춘 것 같은 느낌이다. 요일별로 누군가는 물이 되고 누군가는 언덕이 되어 우리들의 이야기를 설화처럼 창작하는가 하면, 그 글에 되울림을 주는 메아리가 쉼 없이 따라붙으니 말이다. 이래서 여행은 또 해볼 만한 창작의 예술이다.
(2023.08.15.)
첫댓글 월몽, 제일 부러운 사람이오.
오늘 광복절 아침에 시원한 풍광을 상상하며 시작합니다. 감사!!
벌러턴 호수를 간접여행했으며 오
래전 헝가리 부다폐스트 야경이
그립습니다.
여행은 아름다운 추억을 주기에
좋지요
금번 서해안 여행이 그리워집니다
시원한 호수로의 헝가리 여행 잘 했어요. 벌러톤 호수는 헝가리의 바다로군요. 헝가리만의 독특한 풍광이 그려집니다.
지난주에 EBS의 세계테마기행에 헝가리가 소개되면서 콜로쾨라는 시골 마을의 풍경과 부활절 축제 모습도 소개되었어요. 축제, 복식, 노래와 춤 등의 전통 풍습, 가옥 모습, 풍경... 모든 것들이 독특하고 새로웠어요. 다른 곳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유러피안이라는 유럽 통합의 흐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자신의 고유한 것들을 지키며 즐기고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러워요. 너무 숨가쁘게 살아가는 우리와는 달라보입니다~
나는 해외여행을 하면 꼭 여행기를 썼지요. 이국체험을 나만의 머리 속에 남겨두기에는 너무 아깝기 때문이지요. 헝거리에 대한 견문이 부족한 나도, 월몽의 기행문을 통하여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독서는 앉아서 하는 세계일주이지요. 바쁜 일과 중 좀 쉬어야 하는 연휴기간인데 다시 차를 몰고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는 월몽의 활동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에코마을에 들려오는 메아리를 잘 들었습니다.
헝가리로서는 바다나 다름 없네요. 좋은 구경했어요
늘 건강하세요.
어제 TV에서 방영하는 헝가리 여행을 보면서 월몽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헝가리에 노천 온천이 인상적이었는데 월몽의 방문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