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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옷을 챙겼습니다. 주초에 비 좀 많이 오더니 날씨가 확 변했습니다. 이제 제자리를 찾은 듯합니다. 벌써 11월도 중순에 접어드니 그럴 만도 합니다. 곧 첫눈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1월만 되면 오래 전 첫눈 오던 때가 떠오릅니다. 반세기도 넘었습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지요. 동아리 모임을 가졌는데 그 날 첫눈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잊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1월 3일이었습니다. 그다지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전체적으로 기후가 따뜻해지고 있다 하니 첫눈의 때가 점점 더 늦어지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그런 낭만도 가져보기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눈 내리는 것을 보면 왠지 포근한 느낌을 가집니다.
아무튼 세상은 여전히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일 그 참화를 화면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음만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듯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희생이 너무 크니까요. 전쟁은 특히 부녀자나 어린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피해와 상처를 안겨줍니다. 어쨌거나 어서 끝나기를 바라고 기다립니다. 우리 자신도 늘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지만 휴전 후에도 70년이 넘도록 단련이 되었는지 모두가 평안합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거 아시나요? 우리나라 안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말입니다. -i-
사실 우리는 총보다 더 무서운(?) 싸움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귀를 막고 살고 싶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말도 들어야 하니 말입니다. 다시 주말입니다. 사랑하는 말, 좋은 말을 많이 주고받으며 복된 주말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
2023년 11월 11일 김종우 목사 드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기 14 : 13)
<용감한 시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평범한 진실입니다. 바로 그런 평범한 사실을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세상은 만만하지 않기에 대부분은 그냥저냥 타협하며 넘어갑니다. ‘불의를 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네 옛날 교과서에는 아마도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고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날에는 뭐라고 되어 있을까요? 참고 넘어간다고요? 어쩌면 그런 문제 자체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괜스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의’ 타령해봐야 돈 되는 거 있냐? 그런 식으로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니까요.
세상은 돈이 지배합니다. 거 무슨 말을 그리 합니까? 하고 대들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인정할 것입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돈을 좀 더 쉽게 얻어내려고 하는 짓이기도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그런 교과서에나 있는 대답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돈과는 담을 쌓고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청렴한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헌신’은 말 그대로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서 돈 쌓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학교냐? 말이 안 되지요. 하기는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우리는 지난 1 - 2년 사이에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진행 중입니다. 오죽하면 젊은 선생님들이 스스로 세상과 별리합니까? 세상이 싫었습니다. 자기네와는 너무 맞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바꿀 힘이 없으니 다른 세상으로 탈출한 것입니다. 남아있는 사람들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한두 사람으로는 될 일도 아니니 많이 모였습니다. 그마저도 벅차네요. 권력과 돈은 그렇게도 강합니다. 정말 넘어가기 힘듭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 뒤에는 반드시 그만한 부모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뭘 믿고 그런 악행을 맘 놓고 벌입니까? 설령 돈이 없다면 그런 성품이 있을 것입니다.
젊은 선생님, 게다가 여성이니 막말로 깔보았을 것입니다. 막돼먹은 깡패나 다름없는 녀석이 먹잇감으로 삼기 좋았을 것입니다. 몰래 혼내주려고 하였지만 어설프게 대응하였으니 금방 탄로가 납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정식으로 한판 벌이자는 쪽으로 전개됩니다. 여자가 얼마나 하겠다고, 분명 얕잡아 보았습니다. 이전 국가대표 급 선수였다는 사실은 몰랐겠지요. 학교 축제 기간에 정식으로 경기가 열립니다. ‘한수강’ 대 ‘고양이’의 대결입니다. 그 동안 말도 못하고 기죽어 지내던 학생들이 은근히 이 못된 놈이 실컷 두들겨 맞아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지는 못해도 뒤에서 속만 태우던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합니다.
때문에 모인 학생들 얼굴이 온통 고양이 탈입니다. 학교 전체가 고양이 편이 되었습니다. 만약 고양이가 패배하면 어쩌려고들 그런 것인지 마음의 준비들을 하고 있었을까요? 하기야 그래봤자 이 많은 사람들을 어쩌랴 싶기도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드디어 축제 가운데서도 가장 큰 행사(?)가 열립니다. 링이 마련되고 두 선수가 등장합니다. 도대체 이 고양이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아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모릅니다. 궁금하겠지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고양이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일입니다. 그냥 권투가 아닙니다. 소위 킥복싱입니다. 있는 힘껏 두들겨 패주는 경기입니다. 지금은 경기라기보다 원한의 대결입니다.
‘기간제 교사’ 소위 비정규직 교사입니다. 말 그대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자동 해직이 된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니 그 기간 어떻게든 잘 보여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직장에서 살아남습니다. 기간제 교사의 꿈은 소박합니다. 빨리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배의 말대로 입 닫고, 눈 감고, 귀 막고 살아야 합니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말하고 싶어도 꾹 누르고 지내야 합니다. 설령 불의를 목격해도 없는 일로 넘어가야 합니다. 부르면 가고, 시키면 하고, 소위 갑질의 대상 1호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위 죽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라야 말이지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할 정도로 정말 ‘정도’를 너무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이야기처럼 ‘정의의 사자’가 되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좀 어설프지요. ‘소시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불운까지 겹쳐서 쉽게 들통이 납니다. 결국 아예 드러내고 시합을 진행합니다. 그냥 신나게 두들겨 패줘서 우리네 숨겨졌던 분노를 대신 씻어줍니다. 사실 그 맛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고 있는듯하여 더욱 속이 후련해집니다. 일부러 때를 맞추려하지는 않았을 텐데 운 좋게 때를 잘 맞추게 되었습니다. 그래서감동은 없어도 그냥 시원합니다. 그 정도면 되겠지요. 영화 ‘용감한 시민’(Brave Citizen)을 보았습니다.
계시를 받으셨나요?
성경을 읽다 보면 몇 번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5년 전에 읽었을 때나 그 전에 읽었을 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모르고 지나갑니다. 답답하지요. 그러다가 이제는 그것도 만성이 되어서인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갑니다. 어쩌면 알려고 하지도 않는가봅니다. 그 부분은 모르는 것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래야 하지요? 아무튼 그래서 성경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남보다 성경도 많이 읽고, 신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일반 사람들보다는 더 시간을 내서 성경을 연구도 하고 그랬는데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체면이 안 섭니다. 이것저것을 뒤적이며 연구하고 묵상하고 종합해봅니다. 그래도 긴가민가하지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 앞의 선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봅니다. 서로들 생각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느 것이 맞다고 우길 수도 없지요. 나름대로 종합하여 이럴 것이다, 라고 자기 학설(?)을 만듭니다. 사실 그렇게 하여 전하는 목회자 자신도 잘 모릅니다.
성경에는 4 가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역사와 교훈과 예언 그리고 성취된 실상입니다. 역사와 교훈은 구태여 설명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알 사람들은 다 압니다. 초등학교 수준만 되어도 웬만한 내용은 다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르쳐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은 길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아듣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것만 남을 뿐이지요. 역사의 이야기도 들려주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거울을 삼아 오늘의 교훈으로 삼으면 됩니다. 어려운 것은 역사나 교훈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예언입니다. 그것도 이루어진 예언이 아니라 이루어질 예언이지요. 이루어진 예언은 이루어진 것이 있으니 어렵다고 할 수가 없지요. 이미 실상이 나타나있는데 어렵고자시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타난 실상을 보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단지 그래도 못 믿겠다고 한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첫 언약을 예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첫 언약을 가지고 듣고 배우고 알고 믿고 살았습니다.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미 지나온 우리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하나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예언한 말씀이고 실제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시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받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과연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았을까요? 이 예언의 말씀이 있은 후 약 70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그 동안 백성은 이 말씀을 누차 들어왔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고?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하나님이 하실 일이니까 가능할 수도 있지 뭐! 왜 하필 처녀가? 그건 율법과 대치되는 일 아니야? 처녀가 애를 낳다니,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면 간음한 거잖아? 그 처녀야말로 돌에 맞아죽을 사람 아닌가?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들이 읽고 이해하고 가르쳤을까요?
구약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단지 한 구원자를 보낸다는 예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인자라고 사람들 앞에 나섭니다. 이러저러한 이적과 기사를 행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요 7 :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그러나 당시 백성의 목자들이라 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온 세상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거지같은 사람을 보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자기네가 믿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지요. 하나님이 이 정도밖에 안 되시는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자기네 생각이지요. 하나님 생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 백성들이 과연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다른 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임의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태반은 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방법을 말씀해주신 성경은 제쳐두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맡고 성도들을 이끄는 목자들은 어떤가요? 예배의 중요성은 늘 강조합니다. 말씀도 강조하지요. 그러나 왜 말씀을 읽어야 하는지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하기는 목사님들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지 예배에 빠지지 말라고 그것만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지요?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구약시대에는 ‘제사’라고 표현하고 오늘날은 ‘예배’라고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예배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지금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는지 모른다면 그 예배를 우리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쩌겠습니까?
아담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잘 아는 대로 형 가인과 동생 아벨입니다. 모두 아비인 아담에게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보고 배우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하여 자기네가 따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각자 자기네가 힘써 번 것을 하나님께 드려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결과는 다릅니다. 창 4 : 3 - 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그렇습니다. 누구의 제사는 받으시고 누구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똑같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배를 드린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네는 예배드렸다고 생각들 하겠지만 그 예배를 하나님이 과연 받으셨는지는 모를 것입니다. 다만 받으실 것을 희망할 뿐이지요.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신자라면 다 압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아십니까? 대부분 성도들은 안다고 대답합니다. 그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자기 아버지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합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안다고 하실까요? 당연히 아시겠지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할까요, 모른다고 할까요? 질문도 아닙니다. 수천 년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믿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런데 모르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요 8 :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자기네 아버지가 누구라고 합니까?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지요. 이 사실을 의심해본 적도 없고 조상 적부터 누려온 자기네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누구랍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랍니다. 말이 됩니까? 믿어집니까? 인정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천국 비유를 말씀합니다. 마 25 :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잘 알고 있는 ‘열 처녀 비유’입니다.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들입니다. 아무튼 이 열 처녀 모두가 신랑을 맞이하러 갑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자인 우리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들 안에서 갈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태 배우고 알고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신자와 불신자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바로 신자인 우리들을 향한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빨리 고치기 바랍니다. 신랑 되신 주님을 기다리던 열 처녀가 나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나중에 달려와서 주인을 부릅니다. 11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얼마나 애처롭게 주님을 부릅니까?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12절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아신답니까, 모르신답니까? 여태 주님을 부르며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향해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내가 그동안 10년이든 30년이든 신앙생활 한 것은 한 마디로 도루묵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신다는데 천국에 들어가겠습니까? 예수 믿었으니 구원 받았다고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자기복음’이고 하나님은 전혀 달리 생각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렵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빌 2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할 숙제이지 이미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고 말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다는 말이지요. 마 7 : 13 -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렇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날은 우리들 각자의 손에 들려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는지요. 문제는 가지고 있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모르지요? 어려우니까. 역사와 교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 29 : 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마치 봉해져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언제까지, 영원토록 봉해져 있겠습니까? 그러려면 뭐하려 성경을 주셨겠습니까? 합 2 :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정한 때가 있답니다. 즉 열릴 때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세상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예언과 성경의 예언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예언은 예언만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예언이 성취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져서 그 실상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이루어질 때까지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봉해져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언제 열리겠습니까? 성취되어 그 실상이 나타나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된 그 말씀의 실상이 나타난 것을 증거하게 됩니다. 봉해져있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열쇠 같은 것이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비유의 말씀으로 숨겨놓았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읽어도 모르고 봐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뜻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 열린다고요? 성취되어 그 실상이 나타나면 열립니다. 즉 그 비유가 풀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뜻을 밝히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약성경에 ‘예수’가 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주겠다는 말씀만 있습니다. 즉 그 구원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세한 내용들은 비유로 감추어두었습니다. 봉하신 것입니다. 언제 열렸습니까? 예수님이 와서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눅 24 :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다시 말해서 당신이 구약성경에 감추어져있던 메시야라는 것을 설명해준 것입니다. 44 - 45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 일 후에 제자들도 역시 나가서 사람들에게 바로 예수님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행 5 :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예언을 하셨습니다. 요 14 : 1 - 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다시 온다는 곧 재림의 약속입니다. 재림에 대한 예언이 신약 곳곳에 산재하여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이기에 역시 봉해져있습니다. 비유로 감추어져 있지요. 그래서 알 수가 없습니다. 어렵습니다. 읽어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언제 열립니까? 역시 성취되면 열립니다. 성취된 실상이 오시면 비유를 풀어 밝히 알려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렇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도 밝히 알게 됩니다. 다시 오시면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어렵다는 ‘계시록’도 알게 될 것입니다. 기대해도 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잘 모릅니다. 뵌 적도 없잖아요. 물론 보면 죽습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볼 수만 있다면 확실하게 믿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아버지에 대해서 ‘밝히 이를’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언제요? ‘때가 이르면’ 다시 말해서 예언이 이루어져서 다시 온다던 그 분이 오시면 됩니다.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요 14 :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뭐라 하셨지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하십니다. 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간단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0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그리고 예수님이 미리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마 11 :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자가 둘이 있답니다. 하나는 아들인 당신이고 다음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라고 하십니다. 아들인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영으로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나기는 어렵겠지요.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오셔봤자 영으로 오시니 역시 우리가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그 계시를 받는 자에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계시를 받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고 바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밝히 증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그 약속(예언)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을 증거하게 됩니다.
과연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계 1 :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누구의 계시라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받아서 천사에게 넘겨주고 천사는 그것을 요한에게 넘겨줍니다. 그래서 요한을 통하여 종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의 요한이 다시 오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요한으로 예언된 목자가 온다는 말입니다. 또 한편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마 약속하셨습니다. 그가 다 가르쳐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이어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제 예수님이 원하시는 계시가 어떻게 전달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 예수님 - 천사(보혜사 성령) - 요한 - 종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는, 계시를 받은 이 시대 ‘요한’이라는 목자를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 물어보면 되겠지요. ‘계시를 받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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