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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2. 묵상글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내리사랑을 넘어 치사랑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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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22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슬기롭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11,25-26)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바로 오늘 복음의 이 구절이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였습니다. 얼마나 신랑이신 주님을 만나길 갈망한 죽음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어느 자매가 들려준 남편의 마지막 유언,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마지막 임종어에 모든 앙금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죽어서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예전 개신교 목사님이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이냐?”의 질문에 대한 답에 흡족했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 물어도 이와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의지대로 될 수 없는 은총이지만 간절한 소원은 오늘부터 남은 동안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정말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보다 이웃에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의 선종의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라 하루하루 전 일상의 평범한 삶자체가 죽음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어제 모든 성인 대축일에 이어 11월 위령성월 둘째 날 위령의 날 배치가 참 고맙습니다. 올해는 며칠전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156명의 희생자들로 인해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위령의 날이 되었습니다.
8년전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312명이 희생됐던 날이 사순시가 성주간 수요일이었는데, 마침 가톨릭의 성주간의 전례시기 중이라 잊혀지지 않는데, 이번 이태원 참사는 위령성월을 앞둔 참사라 또 길이 잊지 못할 아픈 추억이 되겠습니다. 새삼 마음 아파하는 희생자들의 모든 어머니들과 함께 아파하는 어머니인 가톨릭 교회는 종파와 인종,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의 보편적 어머니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은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과 직결됩니다. 한마디로 하루하루 깨어 ‘슬기롭게’ 사는 것이며, 슬기로운 삶의 위한 네 원리를 소개합니다.
첫째, 삶은 끝이 있습니다.
엄연한 삶의 진리입니다. 삶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끝은 시작입니다. 겨울후 부활의 봄이듯 죽음이후에는 부활의 새로운 삶입니다. 아니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이미 살아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이미 영원한 파스카의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부활신앙이 참 영원한 희망입니다. 위령감사송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둘째, 삶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삶의 중심이 없어 혼란이요 방황이요 뿌리없이 표류입니다. 주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내릴수록 내적평화와 안정이요, 믿음의 뿌리가 얕고 빈약할수록 점증하는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이래서 삶의 중심인 주님이 고마워 저절로 나오는 화답송 시편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이어지는 제 행복기도 고백도 주님이 우리의 모두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답고 놀라운 하루이옵니다.”
셋째,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많이’ 햇수의 양量이 아니라 ‘참으로’ 사는 햇수의 질質입니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찬미하며 사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서 말씀이 적절한 도움이 됩니다.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짧은 생애 동안 완성에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돌보신다.”
넷째, 깨어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깨어 준비하며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이렇게 깨어 준비하며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기름등잔에는 신망애信望愛의 기름이 늘 채워져 있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의 영혼 등잔들에는 기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었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확인도 안했습니다. 이건 이태원 참사처럼, 천재天災가 아니라 순전히 인재人災입니다.
영혼등잔의 신망애의 기름은 각자 평생 하루하루 마련해야 하는 것이지, 일순간에 마련되는 것도 아니고,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깨어 준비하며 등불은 환히 켜들고 있다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입장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입장이 좌절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나중에 기름을 채워 왔지만 문은 닫혔고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닫힌 문을 두드립니다만 주인님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요지부동 단호합니다. 이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보속하라, 대속하라, 찬미하라, 사랑하라, 섬기라, 기뻐하라, 감사하라’고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죽어서는 회개도 보속도 대속도 찬미도 사랑도 기쁨도 감사도 없습니다. 죽음의 문이 닫히면 아무리 후회해도 늦습니다. 평상시 삶 전체가 죽음 준비입니다. 이래야 영혼의 등불 환히 켜들고 있다가 주님과 함께 천국잔치에 입장합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주님 오실 날을 대비하며 살게 합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5,1)
+주님, 세상 떠난 이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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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리사랑을 넘어 치사랑을
아시다시피 위령의 날에는 세 차례 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두 번째 미사를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핼로윈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 모두에게 주님께서 안식을 주십사는,
영원한 안식을 주십사는 마음이기에 두 번째 미사의 복음을 택한 겁니다.
지난 월요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들에게 줘야 할 위로는
우리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주님의 위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주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이들은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신 대로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것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직접 건네는 위로도 있어야겠지만, 우리의 위로는 한계가 있기에,
특히 이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는 우리의 위로가 직접 전달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은 오직 하느님 손에 있기에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저는 요즘 추세를 걱정스러워합니다.
위령미사를 드리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 말입니다.
제가 사제로 서품된 30여 년 전만 해도 생미사보다 연미사가 많았는데
요즘은 생미사가 훨씬 더 많고, 생미사도 자녀들을 위한 미사가 대부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가운데서 효도는 구닥다리로 치부되고,
치사랑은 실종되고 내리사랑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는 입 싹 닦고 되돌릴 줄 모르고,
손주는 봐주면서도 부모는 노인 요양원에 보내기도 합니다.
똑같은 현상이 우리 신앙에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자녀를 위한 생미사는 자주 바치면서,
부모를 위한 연미사를 자주 봉헌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요양원에 맡기고 자주 찾아가지 않는 것처럼,
부모를 하느님께 맡기고 돌아가신 날 한 번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의 문제는 하느님 사랑에도 해당됩니다.
부모를 향하지 않는 사랑은 하느님께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로만 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기만 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줄은 모릅니다.
이것은 기우제를 드려 하늘이 비를 내려줬는데 감사제를 올리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는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은 사랑의 영원한 미성숙입니다.
나의 사랑이 성숙해지면 이제 받기만 하지 않고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어린애처럼 그저 받기만 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의 성숙한 사랑과 성숙한 신앙은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하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사랑에
산이와 죽은 이의 영혼을 맡기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사랑,
곧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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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한 해도 기울어 가고,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지들과 은인들, 지인들의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둡고 시린 길 위에 떠밀려 넘어진 이태원 거리의 어린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손길이 계절의 등을 떠밀어, 이제는 가을도 끝자락에 떠밀려 왔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가을의 어깨 너머로 흩날리는 낙엽들이 이리저리 달을 따라 흐르는 밀물과 썰물처럼 바람을 따라 밀려다니고, 넘어지고 부서진 날들의 잎사귀들이 바닥에 온몸을 부벼대고 바스러지면서 침묵의 강물로 흘러듭니다.
스위스의 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 속에서 일년 사계절은 변해간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겨울도 그리고 여름도 가을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가을은 결실의 풍요로움과 단풍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침묵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침묵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침묵은 죽음임과 동시에 잉태요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생명의 탄생처럼 신비롭습니다. 아니, 죽음이 있기에 인생은 신비롭습니다. 이토록, 죽음은 인생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을 통해 생명이, 생명을 통해서 죽음이 밝혀지듯, 이 세상의 제한된 생명은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밝혀줍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래 영원불멸한 존재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면서도 영원한 줄을 모르기에 이 세상의 한계와 제한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임을 배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악을 보면서야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도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갑니다. 아니, 영원의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지막 교부 철학자인 보에티우스(470~524)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자비롭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의 입었으니,
제 마음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당신 손길로 매만지셨으니,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이끄셨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당신이 동행하시니,
저를 다스리소서.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오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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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 대에 재물의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냐’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우리는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면서도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어느 인디언의 기도를 옮겨 봅니다.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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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7년 폴란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물이 범람하면서 도시가 물에 잠기는 ‘홍수’가 예측되었습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전문가들은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강에 쌓아 놓은 둑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범람하는 물의 피해를 줄이고 도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둑 근처에 살던 주민들이 이 사실을 방송을 통해서 미리 알았습니다. 책임을 모면하려는 장관이 언론에 사실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수 없다며 둑으로 오는 공무원들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혼신을 다해서 둑 위에 모래주머니를 높이 쌓았습니다. 결국 둑을 여는 일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도시는 물에 잠기는 커다란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둑에 쌓았던 모래주머니로는 범람하는 물을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둑을 열지 않았지만 둑은 범람하는 물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전문가의 말을 듣고 둑을 열었다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은 물에 잠겼겠지만 도시의 피해는 줄일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정부의 약속대로 피해보상을 받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결정이 최선인 것 같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먼저 성찰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바벨탑’이야기입니다. 바벨탑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우상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이웃의 희생으로 쌓아올리는 욕심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어리석음의 탑이었습니다. 줄을 세워야 하는 바벨탑은 앞에 있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있는 사람은 밀쳐버리는 경쟁의 탑이었습니다. 그런 바벨탑으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바벨탑을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탑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명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기꺼이 섬기는 겸손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강도당한 사람을 기꺼이 치료해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대와 화합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모세가 구리뱀을 세워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듯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부활의 탑입니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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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백곰 효과’라고 있습니다.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라고도 불리는 이 심리학 현상은 하버드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가 진행한 실험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라고 하고, 두 번째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다음 백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했습니다. 어느 그룹에서 종을 더 많이 쳤을까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던 두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이처럼 불편한 느낌이나 생각은 더 많이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뇌는 느낌이나 생각을 잘 지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해하고 걱정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불편한 느낌이나 생각의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이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 해.”라면서 계속해서 부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피하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그 강도가 약해지며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죽음도 ‘생각하지 말아야 해.’라면 곧바로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죽음을 오히려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죽은 모든 이, 그들 가운데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죽음’을 떠올리고 또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십자가 죽음을 직접 몸으로 받아들이셨지요. 그러나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긴 유일한 분이 되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힘센 분이 하늘 나라의 주인으로 계십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주시는 말씀을 이렇게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큰 힘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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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존재한다는 경이로움 앞에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테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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