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의 새벽 편지-1254
용성선사행장
동봉
용성선사龍城禪師(1864.5.8-1940.2.24)
1.
용성龍城선사(이하 '선사')는 1864년(고종1년) 음력 5월 8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 백씨白氏고 아버지는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밀양 손씨다.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사의 족보상 이름은 형철亨喆이고 속명은 상규相奎다. 그의 어머니는 휘황찬란한 법의를 입은 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선사를 낳았다고 전한다.
2.
7세 때부터 마을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우던 선사는 어린 나이에도 빼어난 문재를 보였으며 9세에 이미 '합죽선'이란 한시를 지을 정도였다. 14세 때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 수기授記를 받고 불경을 보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가출하여 찾아간 곳이 남원 교룡산 기슭의 덕밀암德密庵이었다.
3
당시 그 절의 주지 혜월慧月스님은 선사의 내방을 미리 인지하였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자신의 꿈에 나타나 범종을 울렸다면서 혜월 스님은 선사에게 진종震鐘이라는 법명과 함께 남원의 옛 지명 용성龍城을 법호로 내려주었다. 그러나 선사의 첫 번째 출가는 말없이 가출한 맏아들을 애타게 찾아 헤매던 부친에 의해 1년여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불법의 진리를 갈구하는 선사는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으로 다시 출가하여 화월華月 스님을 은사로 하고 혜조慧造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4
전국의 명산 고찰과 선지식을 찾아 진리의 길을 찾으러 구도행에 나선 선사는 이듬해 의성 고운사孤雲寺 수월水月 스님을 찾아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일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사 없고 변하지 않는 '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수월 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외울 것을 권했다고 한다. 수월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사는 대비주를 10만 번 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외워 9개월에 걸쳐 대비주를 10만 번 외웠다고 한다
5
그가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서 수련하고 있을 때,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에는 모두 근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일까?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서 오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불현듯 솟아났다. 이 의문을 일념으로 용맹정진한 지 엿새 만에 의문을 확연히 풀어 첫 깨달음을 얻었다. 이 때의 견도송見道頌은 아래와 같
다
오온산중심우객五蘊山中尋牛客
독좌허당일륜고獨坐虛堂一輪孤
방원장단수시도方圓長短誰是道
일단화염소대천一團火炎燒大千
6
22세 때는 순천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전등록傳燈錄'을 읽다가 문득 세 번째 깨달음을 얻었고 다시 여러 사찰과 암자를 오가며 치열한 수행 정진을 거듭한 끝에 선사는 1886년 23세 때 금오산 아래 낙동강변을 거닐며 마침내 네 번째 깨달음의 기쁨을 오도송悟道頌으로 읊었다.
금오천추월金烏千秋月
낙동만리파洛東萬里波
어주하처거漁舟何處去
의구숙로화依舊宿蘆花
7
선사가 선사의 생애에서 기념비적 명저로 알려진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집필한 것은 1910년이었다. 이 책은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과 불교의 상대적 우수성을 밝히는 내용으로 1913년 6월 조선선종 중앙포교당에서 발간했다.
1911년 48세 때 대각사를 창건하였고, 1912년 49세 때 한국 선종의 뿌리인 임제종臨濟宗을 바탕삼아 민족불교의 중흥과 수호에 앞장서고자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세워진 조선 임제종 포교당 개교사장開敎師長을 맡아 3년간 포교당 주무主務 만해萬海선사와 함께 힘썼다.
이후 일제 탄압으로 조선선종 중앙포교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고, 서울 시내 신도가 3천여 명에 이르자 이에 힘입은 선사는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大覺寺에서 포교 활동에 더욱 더 매진하였다.
8
당시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일합방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정기가 크게 억눌린 시대였는데 선사는 만해韓龍雲 스님과 더불어 불교부흥과 민족의 장래를 함께 논의하였으며 만해 스님과 함께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불교대표로 서명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1년6개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9
1921년에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이고 활발한 불경번역 사업에 들어간다. 또한 전통불교가 퇴색하고 일본화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불교 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대각교를 창업하였다. 본부를 대각사에 두었고 한편으로는 만주 간도에 대각교당을 설립하여 그곳으로 흘러간 동포를 상대로 포교사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10
1926년 선사는 한국전통불교를 지키기 위해 승려들의 엄격한 계율생활을 촉구한 건백서建白書를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다. 당시는 일제가 발표한 사찰령에 의해 비구승의 가정생활이 허용되어 많은 승려들이 처자와 가정을 거느리게 되는 등 삶이 점차 세속화되던 무렵이다.
따라서 사찰마다 대처 식육이 공공연히 묵인되었고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는 주지 자격에 비구 조항을 없애려는 움직임마저 있는 등 한국불교가 매우 어지러워지는 때다. 이때 선사가 건백서를 통해 승려들의 축첩을 강력히 반대하는 내용을 발표하자 이 일로 한 때 선사는 조계종 정화불사의 초조初祖로 숭앙되기도 하였다.
11
1927년 경남 함양에 화과원華果園을 세우며 수행과 일을 다 함께 힘쓸 것을 내용으로 하는 선농일치불교禪農一致佛敎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삼장역회의 기관지로 '무아無我'를 발행함으로써 대중포교에 더욱 힘을 쏟았는데 이 잡지는 지금도 계속 발행되고 있다.
같은 해 64세 때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 권세가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창작 찬불가를 최초로 작사, 작곡하여 연주하곤 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국내 효시라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연주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을 올리고 제사 등을 치렀다.
12
이후로도 꾸준히 불경을 번역하고 선회禪會를 개설하며 대각교를 발전시켰으나 일제 탄압으로 1934년 대각교 재산이 신탁되어 사실상 몰수되었다가 급기야 1938년에는 결국 대각교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선사는 처절한 아픔을 곱씹으면서 그 뒤로 계속 포교사업에 힘쓰다 1940년 음력 2월 24일 77세, 만으로는 75세에 열반에 들었다.
13
선사의 생애는 첫째, 조선시대 불교배척으로 인하여 쇠퇴한 불교를 부흥시키는 것이었으며 둘째, 외세침략으로 인한 민족의 시련기에서 외래종교의 범람과 그로 인해 주체성을 잃어 가는 국민들에게 민족주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호국의 법을 설함이었다. 다시 말해 호법불교 운동을 쉼없이 이끈 생애다.
선사가 평생 과업으로 여긴 사업은 첫째 어려운 한자 불경을 쉬운 우리말 불경으로 옮김이고 둘째, 시대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지식 운동이며 셋째, 왜색불교로부터의 탈피다. 특히 '불교에 대처승 없다'라는 문제를 놓고 만해 스님과 외형적으로는 대척점에 있었다고 보았으나 실제로 두 사람의 사상은 일치하였다
참고로 만해 스님은 출가 후 축첩한 게 아니라 가정을 이룬 상태에서 출가하였고 그 가정을 그대로 끝까지 지킨 것 뿐이니까
2018년 6월21일
ㅡ전통사찰관광정보 등을 참조하여 재구성ㅡ
-----♡-----
참고자료1
백용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https://ko.m.wikipedia.org/wiki/%EB%B0%B1%EC%9A%A9%EC%84%B1
참고자료2
백용성 - 나무위키 -
https://namu.wiki/w/%EB%B0%B1%EC%9A%A9%EC%84%B1
참고자료3
백용성 대종사 총서 아카이브 -
http://ys.dongguk.edu/Extra/Service?svccode=01
-----♡-----
1
오늘 6월21일(음5월8일)은
용성진종 대조사 탄신 154주년입니다
대각사에서는 오전 10시
국내외 대덕스님들과
내외귀빈과 불자님들을 모시고
탄생다례제를 봉행하오니
모두 함께 오셔서 봉축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나흘 동안
'국제불교문화 트렌드 페어'가
학여울역 1번 출구 SETEC에서 열립니다
부담없이 담담한 마음으로
도반들과 함께 참여해 보십시오
3
오는 6월 23일 오후 6시
2주 동안 쉰 천자문 강좌를 이어갑니다
파자풀이로 읽는 천자문 강좌
다시 애정을 갖고 참여해 주십시오
-----♡-----
06/21/2018
한여름夏至날 아침
종로 대각사 '검찾는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