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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평화와 선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베드로의 이 고백 뒤에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이라 불리며 혼이 납니다.
헌혈 광고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동사이다."
사랑은 어느 한 감정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미움의 반대말도 아니요.
그렇다고 우리가 말하는 그런 애정적 사랑만도 아닙니다.
사랑이란 말은 바로 용서이며 우리의 삶은 늘 용서를 거듭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우리가 사랑할만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정말 가장 사랑해야할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린가 그런 아픔만을 바라보고 그자리에 머문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생각하면 예수님을 세번 배반한 일이 기억에 납니다.
닭이 울기전 예수님이 죄수로 넘겨젔을 때에 예수님을 세번 부정했고
마지막 닭이 울 때에 베드로 사도는 심하게 얻어 맞고 있던 예수님의 눈을 마주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세번씩이나 말입니다.
일찍이 베드로가 세번 배반한 사건을 연상하게 하시며 세번 용서를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로에게 주어진 사도좌에 대한 묵상과 함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주님의 반석이 되어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바로 회개와 용서의 역동성이라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치 한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모유를 먹기도 하고 기저귀도 차듯이
우리가 사랑을 터득할 수 있도록 늘 우리의 나약성 안에서 그분의 사랑은 이루어집니다.
마치 넘어져도 일어서는 오뚜기처럼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의 힘을 입어 우리는 다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역동성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의 교회는 세워졌고 성사안에서 죄사함과
성체성사의 신비 속에서 교회는 사도좌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고 계속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굳건히 서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