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비바람 소리를 듣고 일찍 깼으나, 빗줄기가 제법이어서 그냥 자리에 누워 술배를 달래며
아침을 맞았습니다.
아래는 비오는 아침 창밖 풍경! 답사하는 아침, 이런 풍경은 좀 우울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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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10분에 버스 승차 완료.
다시 학동의 해송횟집으로 가서 술먹은 아침에 좋다는 성게미역국으로 맞춰놓은 조반을 들었
습니다. 비는 어느듯 멈추고 날이 개고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잠시 해변의 몽돌밭으로 나가 거니는데, 아침 바닷가의 기운처럼 돌들도 더
해맑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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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통영 세병관
버스가 거제섬을 비껴올라가 다시금 바닷가 사등면으로 휘돌아 신거제대교를 향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36C24855F0211908)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등면 바닷가는 파란 하늘을 내놓은 구름 저편 아래로 육지의 산자락들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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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금세 신거제대교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대교는 바로 한산대첩으로 유명한 견내량을 건너
지르는 거제와 통영 사이의 다리입니다. 견내량 윗바다의 맑게 갠 풍경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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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통영 시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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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말 그대로 예전 통제영이 있던 도시라는 말입니다. 충장공과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기에
직접 관련은 없는 답사지이지만 임진왜란과 관련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인 1593년에 통제사 제도가 만들어져 충무공 이순신이 초대
통제사로 부임하여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관할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처음은 한산도의
제승당이었다가 1604년에야 이곳 두룡포로 옮겨와 통제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지금의 도시 통영이라면 누구나 강원도 원주에서 살았던 소설가 박경리 여사나 냉전이데올로기
때문에 독일에서 살다가 타계한 음악가 윤이상을 생각하게 됩니다. 필자에게는 백석 시인이
전하는 통영의 이미지가 더 강했습니다. 백석은 통영을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
이라고 했습니다(<통영>, 1936년 <조선일보>의 南行詩抄). 그만큼 바다와 한몸인 도시로,
지금은 바다를 많이 메우고 다리도 놓아서섬들까지 연결이 수월해졌다고도 하였습니다.
9시도 되기 전에 시가로 들어가 세병관 앞에 당도하였습니다. 날씨는 새파란 하늘이 드러나
햇살이 쨍하며 내리쬐고 있었지요. 이런 날은 멀리 한려수도의 섬들이 다 보이는 최고의 날
이라고 나중에 해설사도 말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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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입구에는 유명한 돌장승이 하나 서 있습니다. 중요민속자료 제7호인 '통영 문화동
벅수'로 연대는 그리 올라가지 않고 광무10년(1906년)에 만든 우리나라 유일의 채색장승
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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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 입구의 망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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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에 오면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요. 미리 예약이 되었더라면 좋지만 마침
다가온 정윤정 해설사는 다른 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간략히 통영과 세병관의
역사를 얼른 설명해주시겠다며 해설을 시작하였습니다. 건물이 커서 일제 때 학교로 쓰였다는
이야기와 발굴 및 복원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짚어주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3CAE4655F14ACC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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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647EB4655F14AD303)
세병관은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해군사령부인 셈입니다. 해설사가 한바퀴 돌며 둘러보는 코스를
안내해준 대로 입장하여 관람을 시작하였습니다. 망일루 누각을 지나면 세병관 건물로 올라
들어가는 지과문(止戈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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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 설명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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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洗兵)'이란 말이 '만하세병(挽河洗兵:은하수를 당겨와 병장기를 씻어냄)'에서 온 말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 말도 과거에 쓰였던 말이기는 하지만 그 정확한 출처는 당나라 때 시인 두보의
<세병행(洗兵行:병기를 씻는 노래, 759년)>이란 유명한 시였습니다. 이 시가 유명한 이유는
전란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당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잘 담아냈기 때문이지요. 좌습유
라는 조정의 벼슬에서 화주로 좌천된 이후 두보는 나라의 현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시세계도 변모를 보였다고 평가되며, 전화를 회복하여 중흥의 대업을 바라보기까지
하는 이 시는 훗날 왕안석 같은 사람에게 압권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구절에 이
말이 나옵니다.
"어찌하면 장사들을 얻어 은하수를 끌어다가 安得壯士挽天河
갑옷과 병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길이 쓰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淨洗甲兵長不用"
'지과'도 창을 쓰는 일을 그친다는 뜻이나 결국 같은 의미로 명명한 것이지요.
세병관은 여수의 진남관이나 경복궁 경회루에서 느끼는 우람함과 장대함이 느껴지는 조선
최대의 건축물입니다. 1605년에 초창하여 두 번의 중건을 거친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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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현판의 글씨가 당당하게 압도해왔습니다. 18세기 정조 임금 때 군권을 전담하다시피
했던 서유대라는 사람의 글씨입니다. 웅건한 필치의 해서체로 서유대는 특히 큰 글씨를 잘
썼던 사람이라고 전하지요.
우선 일행의 단체 사진촬영을 하고 나자, 아침햇살이 비쳐오는 동쪽으로 시선이 먼저 갔고
깃대를 안고 있는 석상들과 비석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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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군에는 후대의 역대 통제사들 선정비들이 가득 세워져 있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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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해설사분이 다시 올라와 일행과 동행하며 설명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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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세병관 정면에서 내다보는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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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마다 휘하의 장수들 명단을 적어 이렇게 현판으로 게시를 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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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칠을 한 좌측 모서리 기둥의 나뭇결 모양이 세월의 더께를 그대로 전해주는 듯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37993555F228752F)
중앙 뒤견으로는 마루반자 위에 전패 자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해설사분은 '궐패'란 말을
썼는데, 이는 대한제국 때 와서 바뀐 말이지 그 전에는 전패가 맞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63923555F2287815)
이어서 새로 복원해놓은 12공방 터로 올라갔습니다.
원래 진영 내에서 쓰이던 군수품들을 자체로 조달하던 것으로부터 공방이 운영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통영갓도 공방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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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4471B3555F2287F24)
공방들에는 지금 분야마다 장인들이 있어서 매년 행사도 연다고 하였습니다.
문을 나와서 공방 뒤로 뒤편 언덕길로 돌아올라갔습니다.
거기는 포토존이란 표지가 있는 곳으로, 통영시가와 한려수도가 내려다보여 정말 전망이 으뜸
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의 뒤켠 높직한 산이 통영 남쪽 미륵도의 미륵산이고 그곳의 케이블카
정류소도 보였습니다. 우측 앞산의 누각은 2009년 이래 복원되며 '사진찍기 좋은 곳'이라고
알려진 서포루(西鋪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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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424194255F237C022)
오른쪽 먼 봉우리 위의 누각이 벽화로 유명한 동피랑 마을 꼭대기의 동포루(東鋪樓)로, 동쪽
섬 밖의 상황을 통제영에 중계하여 연락해주는 역할을 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
세병관에서는 앉아서도 한려수도 등 바다 밖을 내다보며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고 해설사의
간략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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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통영 성곽은 숙종 대인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이처럼 동,서포루에 북포루까지
3포루가 있었다고 하며 장수가 순찰하며 머물기도 하므로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라고도 불린
답니다. 90년대 초에 먼저 복원하였다는 북포루까지 마침 복원시의 지도나 복원 사진이 보이
기에 함께 소개합니다.(2009.11.3일자 굿데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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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21B3B4255F237C52D)
유명하다는 우물도 중턱에 있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21B44255F237C828)
![](https://t1.daumcdn.net/cfile/cafe/2722954B55F4ED5D2B)
비교적 너른 주전소 자리가 발굴되면서 지붕만 씌워 복원해 놓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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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통제사의 집무처였던 운주당 경내로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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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2728F3D55F237DB24)
먼저 경무당 안에는 통제영에 관한 전시물과 지도 등이 있어서 다시 해설사의 명쾌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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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역시 1872년에 그려진 규장각 소장의 고지도로, 지금과 달랐던 옛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04F33D55F237E11D)
![](https://t1.daumcdn.net/cfile/cafe/2179463D55F237E421)
이곳에는 또 '전함도'라고 불리는 10폭병풍(인천시립박물관 소장)이 작게 복제되어 소개한 것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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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file/cafe/2378D03D55F23C152F)
운주당에는 중앙에위의 전함도와는 또 다른 전함도 병풍이 펼져져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함대의 대장선에 수(帥)자기를 단 위의 전함도와 달리 여기는 '원수'기를
달았으며, 중앙 대장선의 우측 위로는 '우초관지세포'란 큰 깃발을 단 거북선도 보였습니다.
바로 지세포의 배들로, 다른 배들처럼 이 배에도 장수들 그림의 머리 위쪽으로는 또 지세포의
'지(知)'자기를 달아 소속지를 표시하였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충장공의 해전 출전도 이처럼
연합함대의 출전으로 해전을 치른 것이었으니 당시 충장공 배에도 이런 깃발을 달았을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겠지요.[아래 댓글 참조!]
![](https://t1.daumcdn.net/cfile/cafe/2645333D55F23C1901)
병풍 상단의 각 진 소개를 보니 지세포진에서는 "귀선 1척, 병선 1척, 사후 2척과 장졸 227명"이
참여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3EE33D55F23C1C05)
![](https://t1.daumcdn.net/cfile/cafe/2540873D55F23C1F04)
정확히 제작년대를 확인하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수군의 위용을 잘 나타내주는 근사한 병풍이라
느껴졌습니다. 병풍 앞에는 황제가 내렸다는 8사품 복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쪽문을 나와 다시 처음의 입구로 돌아오니, 일정에 포함되지 않은 바로 곁의 충렬사를 그냥
지나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 옆에 박경리 생가도 있다고 손짓으로 가리켜 보이는 해설사분과
아쉬운 이별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겡상도 사투리의 억양으로 또박또박 명료하게 무수한 말들을
쏟아내는 열정적인 해설사를 보기도 드문 일입니다. 자신은 비지땀을 흘리며 연신 손으로 얼굴의
땀방울을 걷어냈고 나중에 보니 등에도 땀이 나서 옷이 많이 젖었더랬습니다. 친구가 군인남편을
따라 춘천에 산다니, 정윤정 해설사님은 춘천에 한번 놀러오이소!
![](https://t1.daumcdn.net/cfile/cafe/2173BA3D55F23C2432)
통영 바닷가에는 팜플렛에 보니 '거북선과 조선수군'이라는 전시도 있었습니다. 미처 다 둘러
보지 못하고 버스에 오르는 아쉬운 마음속에서는 또 다시 백석 시인의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이 통영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고, 시립박물관을 새로 지어
세병관 앞의 기존 역사박물관은 폐관하고 사용치 않다는 소리가 춘천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뭇 부럽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국립박물관이 있는 도시이기는 하지만 아직 의식
수준은 역사박물관이나 시립박물관을 가질 만한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생각되니 말입니다.
첫댓글 부지런도 하십니다. 늦게 잠든 탓에 아침 빗소리는 못들었는데...
위 병풍그림에 대하여 이 글을 보신 제장명 교수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
"해진도 병풍에 소개된 지세포 편제는 조선후기의 편제이기에 임진왜란 시기와는 다소 다릅니다만 그 규모는 거의 같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임진왜란 때는 오위진법에 따라서 전투편성을 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중국식 수군제도를 받아들여 편제 명칭도 이전과 상이한 것이 특징이죠."
이 병풍을 첨자진(尖字陣:첨자와 같은 모양의 진형)을 그린 '해진도(海陣圖)'라고(혹은 거북선해진도) 부른다는 점, 그리고 현재 조선후기의 것이 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