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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묵상글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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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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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산 삶이 기억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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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태 22,39-40).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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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퀸즈에 있는 신부님의 모친께서 선종하였습니다. 신부님과는 지난 3년간 형제와 같이 지냈습니다. 당연히 모친을 위한 ‘연도’에 함께 했습니다. 연도는 부제님이 말씀의 전례를 주례하였고, 고인의 큰 따님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인을 위하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제단 앞에 모신 고인과 유족들에게 인사하면서 마쳤습니다. 오늘은 유족께서 고인을 추모하며 함께 나눈 일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인은 103살 이었습니다. 1919년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는 불교를 믿다가 성당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당시 미국에는 사찰이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큰 딸의 권유로 성당으로 왔습니다. 할머니가 성당으로 오면서 자녀들도 모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성당에 와서도 제단 앞으로 와서 불교식으로 엎드려서 큰 절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하니 딸이 엄마에게 그렇게 하지 말하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절하면 안 받아 주신다니? 성경에 보니 ‘엎드려 절하나이다.’라는 말도 있던데?” 그러자 딸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 말을 못하였다고 합니다. 신자들도 제단 앞에 와서 엎드려 큰 절을 하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언제든지 성당에 오면 제단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하고 자기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엄마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혼하지 마세요. 마음 바꾸지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마음 바꾸지 마세요. 계속 한 길을 가세요.”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신학생인 저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어머니는 신학을 배우지 않았고,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신앙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지식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집니다. 백인대장은 신앙이 없었지만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하를 사랑하는 백인대장을 향해서 ‘일찍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이 여인의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강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 세리의 기도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습니다. 부유함과 지식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척도는 아닙니다. 갈망과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 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나’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알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하늘을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알과 병아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이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더 이상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벌레와 나비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실에서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부활은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갈 수 있다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다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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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최근 통계청 ‘생명표’(2021) 발표를 보니, 한국 평균 기대수명(평균 생존 연수)이 남자는 80.5세, 여자는 86.5세였습니다. 1950년대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은 51.1세, 여자는 53.7세였습니다. 100년도 되지 않았는데 평균 수명이 는 것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도 기대수명 순위가 2위라고 하니 전 세계적으로 ‘장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문제는 나이를 먹을수록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들면 고집만 세진다고 하면서 특히 성격이 괴팍한 노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힘이 점점 없어져서 일할 기회 역시 사라지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외로움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내몰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선 인정해야 합니다.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고독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힘든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음의 장점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영성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후손에게 지혜를 넘겨줘야 할 때입니다. 이 지혜는 계속된 생각으로 깊어지는데, 계속해서 자기 처지를 부정하며 고집만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연스럽게 사람들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간직하는 삶이 먼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만이 고독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두가이파와 함께 부활 논쟁을 하십니다. 사두가이는 솔로몬 왕 때의 대제관 사독의 후예를 자처하는 유다의 귀족 계급이며, 에제키엘서에서는 경건한 레위족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마카베오 시대에 바리사이가 세력을 증대함에 따라 예수님 시대에는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침략군 로마와 가까웠고, 종교적으로는 모세와 율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불멸성, 육신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실을 존중하는 현세주의자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라는 자부심이 있던 사두가이는 사실 편협되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편적으로 한 곳만 떼어 읽으면서 자기 뜻이 하느님의 뜻인 양 했습니다.
또한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기에 산 자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편협된 성경 이해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게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삶, 지식이 아닌 지혜를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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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라(에픽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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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의 희망속에 살아가는 우리들
-선종의 죽음-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가장 많이 말하면서도 가장 모르는 것이 죽음일 것입니다.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늘 죽음 소식을 듣고 장례에도 참석하지만 내 죽음에 대해서는 먼 일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요셉수도원에 34년 정주후 얼마나 많은 친지들이 세상을 떠났는지요.
선종의 죽음보다 큰 축복도 없고 남은 이웃에게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노년에 누구나 희망하는 바, 선종의 죽음일 것입니다.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는 이에겐 삶이 선물이듯 죽음도 선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4년 안식년때 미국 뉴튼 수도원에 약 3개월 머무를 때 날마다 찾았던 수도원 묘지도 생각납니다. 특히 마음이 착잡하여 묘지를 찾을 때는 마음의 평화를 찾곤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안식년 그해 산티아고 순례시 길가에 있었던 순례하다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무수한 묘지들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2019년 한 해에는 무려 27명의 순례자가 카미노 중에 지상 순례를 마치고 귀천하였다 합니다. 특히 수시로 목격했던 성당 주변의 공동묘지는 공원같았고, 산자와 죽은자가 주님 안에서 평화로이 공존하는 듯, 따뜻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여 제가 어디든 방문하면 우선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 묘지이고 묘비석의 생몰연대, 그리고 묘비명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마을 공동묘지에 스페인어로 묘지 입구 돌판에 쓰여져 있던 글귀도 생각납니다.
“그대의 현재 모습이 나의 과거 모습이었고, 나의 현재 모습이 그대의 미래 모습이다.”
우리는 베네딕도 규칙에서 수없이 성인의 말씀도 듣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희 두라.”(머리47)
그 누구도 마지막 최종 시험이자, 마지막 봉헌이요 순종인 죽음의 날을 알 수 없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시험이자 봉헌이요 순종인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위해선 은총과 더불어 평생 훈련의 준비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아가는 훈련입니다. 언젠가의 죽음 준비가 아니라 평상시 삶 전체가 죽음 준비라는 것입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권고하는 사항, 역시 죽음 준비 훈련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참 많이도 강론에 인용했던 부분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내 인생 여정을 압축했을 때, 오전 오후 과연 어느 시점에, 또 일년사계, 일년으로 압축했을 때 과연 어느 시점의 계절에 위치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늘 밝혔지만 제 경우는 하루중 오후 4시, 일년중 초겨울쯤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이런 영적훈련이 환상에서 벗어나 하루하루 날마다 주어지는 선물의 하루에 감사하며 겸손히 깨어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잠시 우리와 함께 지내시다 오늘 떠나시는 영원한 현역의 90세 진문도 토마스 모어 선배 수도신부님의 2022년 분도 가을 계간지에 나오는 아름다운 인터뷰 기사 마지막 부분을 인용합니다.
“작년에 선종한 동생 울리히 신부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지인들에게 아름다운 편지를 썼어요. 나도 빨리 동생을 따라 가면 좋겠어요. 동료 장 엘마르 신부가 떠났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싫어해요. 하지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제 빨리 천당에 가고 싶지만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안남았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상시 은총과 더불어 늘 깨어 노력하고 훈련하며 준비했을 때 선종의 죽음의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이에 앞서 주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는 부활신앙이,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 부활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런 부활신앙에서 샘솟는 부활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길다 싶지만 전문을 인용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 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을 함구하게 한 주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두증인의 부활을 통해 역시 우리는 부활신앙과 더불어 부활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요,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다는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이 진리는 날마다의 생미사와 연미사를 통해 깨닫습니다. 미사신청이 생미사, 연미사 반반입니다. 주님 안에서 다 살아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죽은 이들을 위한 연미사입니다. 사람 눈에 죽음이지 하느님 안에 다 살아 있는 영혼들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다음 아름다운 위령감사송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의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참으로 이런 부활신앙이, 부활희망이 지상 삶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로 살다가 “아멘” 하느님께 감사로 아름다운 인생 마치고 아름다운 선종을 맞게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날마다 온마음, 온정성을 다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선종의 죽음 준비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잘 살다가 잘 죽는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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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과 죽음>
2022. 11. 19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 20,27-40 (부활 논쟁)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삶과 죽음>
삶을
죽음 뒤로
미루지 않겠습니다
오롯이 삶으로써
오롯이 죽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삶 앞으로
당기지 않겠습니다
오롯이 죽음으로써
오롯이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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