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120. 묵상글 들 (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 신적 생명에 연결된 자유 . 등 )
----------------------------------------------------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김 신부님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고없이 묵상글을 안 올리셨습니다.
대신 이 마르첼리노M 수사님의 글을 올립니다.
신적 생명에 연결된 자유
http://www.ofmkorea.org/ofmkfb/513742
이마르첼리노M 2022.11.20. 06:14
신적 생명에 연결된 자유
하느님의 가난과 자기 비움을 배워야 나 자신을 온전하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내어 맡길 수 있다. (필립 2,6-12) 선은 위험을 감수하는 기쁨에서 시작되며 하느님이 감수하신 위험에 참여하기 위하여 나의 자유를 내어 맡기게 된다. 사랑받음에 대한 응답으로 표현되는 이 믿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의 선물이 될 때, 너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허용하고 놓아주기 위해 내려놓고 내려가는 가난과 겸손의 구체적 실재인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내어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은 내어주는 사랑에서 나오는 죽음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허용하시는 하느님께서 허용하시는 만큼 위험도 감수하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감동케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그것이었다. 자유를 주기 위한 대가를 치르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이것이 내가 나에게서 해방되는 비결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옳은 일이 아닌 변함없이 잘못된 일을 행함으로써 하느님께 오게 되었다. 우리는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으로 훨씬 더 많이 배우게 되었다. 나이가 많을수록 실패와 모욕, 고통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경험된 진실을 알게 된다. 허물어지는 체험이지만 자신을 붕괴하는 것만이 더 깊은 곳으로 가게 하는 비결이다. 변화는 여기서 일어난다. 내려가는 죽음과 내려놓는 죽음, 그리고 허용하고 놓아주기 위한 위험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더 큰 일치를 향해 자신을 초월해 나가려는 의지로 충만해진다. 삼위일체 생명은 신적 관계성이 인간성 안에서 내어주는 사랑으로 꽃피어 관계적 변화로 나아가도록 비추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는 내어주는 사랑이 하느님 안에서 쉬는 자유로 느껴질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여로써 경험되는 지식이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깨달음이었다. 우리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자유를 하느님과 너에게 내어놓음으로써 해방되는 자유이며 이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자유가 관계 안으로 흘러 들어가 관계 안에서 신적 생명으로 연결되어 원복을 발견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네가 자유로우면 나는 더 자유롭고
내가 자유로우면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좋아하실까?
네가 기쁘면 나는 더 기쁘고
내가 기쁠 때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크실까?
하느님 안에서 쉬는 자유야말로 신적 생명에 연결된 사람이 누리는 자유다.
내려갈수록 올라가는 길
내려놓을수록 풍요로워지는 길
허용하고 놓아줄수록 자유로워지는 길이 거기에 있다.
----------------------------------------------------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오늘은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4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 오른 편에 매달린 오른편의 죄수가 뉘우치는 겸허한 마음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당신과 함께 낙원에 들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 죄수처럼 우리 인간의 궁극적 바람은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엉적인 한해를 마치는 시기에 즈음해서 낙원에 대해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는 정원을 의미합니다. 중동지방의 종교는 현세의 권력자들의 생활에서 상징을 빌려 신들의 생활을 묘사합니다. 즉 신들은 생명의 물이 흐르고 여러 가지 기묘한 나무들 가운데 생명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궁전에서 축제를 지내며 사는데, 이 생명의 나무 열매는 불사신들에게 음식이 됩니다. 주위에 신성한 정원들로 둘러싸인 지상의 신전들은 바로 이 원형의 모방입니다. 이런 상징들은 일단 다신론적인 요소가 정화되자 성서 안에 당신의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을 주저없이 묘사하며, 정원과 나무도 잠언 형식으로 인용합니다(창세 13,10; 에제 31,8-9.16-18).
이 새 낙원에서는 하느님이 거처하는 성전으로부터 생명의 물이 솟아 나오고, 그 물가에는 신기한 나무들이 다 하느님 백성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치유를 줍니다. 구세사의 끝에 회복될 낙원생활은 태초에 에덴의 생활과 같은 특징으로 묘사됩니다. 즉 자연의 기막힌 풍요로움이 있고 태평성대, 곧 사람들 사이에 평화뿐만 아니라 자연 및 동물들과 함께 평화를 누리며 순수한 기쁨이 있고 모든 고통과 죽음이 극복되며 태고의 뱀은 정복되고 영생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표상들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죄가 초래한 현재의 처지와는 달리, 온갖 시련과 타락의 가능성이 베제되어 있는 인간 본래의 상태입니다.
신약은 하느님의 계획의 마지막 비밀을 알려줍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지혜의 원천이시고 바로 지혜 자체이시며 새 아담이시고 그분을 통해 인류는 종말론적 상태에로 가까이 갑니다. 유혹을 받으실 때 악마이며 사탄인 옛 뱀을 쳐 이기신 그분은 낙원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들짐승들과 같은 죄수와 함께 사십니다. 그분은 기적을 통해 죽음과 병고가 이제 극복 되었음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 영원한 생명, 다시 말해서 이제 열린 종말론적 낙원의 선물을 얻게 됩니다.
낙원은 하느님의 거소인 만큼 이 세상 밖에 있습니다. 성서의 언어로는 하느님의 거소는 하늘에 있습니다. 가끔 낙원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가장 높은 하늘과 동일시 되는 곳이며 바오로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관상하고 영적으로 황홀했던 곳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죄수든 그 누구든지 간에 그분과 함께하는 그 곳과 그 시간 자체가 참된 낙원이라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영적 수련 성월 3주간 감사/찬양✝️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10-13장 / 야고 1-5장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파베르니(Faverney)의 화염 속에서도 손상을 입지 않은 성체
프랑스 -1608년
파베르니의 기도
오, 전능하고 지극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시기 위해 파베르니의 불 속에서 기적적으로 성체를 지켜 주시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셨나이다. 이토록 거룩하신 성체께 우리가 언제나 마땅한 홈숭을 바쳐 드리기를 간절히 원하옵고 당신께 청하오니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들어 허락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만일 아홉 달 동안 계속해서 매주 금요일마다 성체를 영하면 나의 성심은 너희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확실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성녀 마가렛트 알라코크에게 이같은 약속을 하셨다)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 5).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 : 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 : 56).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 51).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요한 21 : 15).
묵상 기도
형제, 친척, 친구, 은인을 위한 기도
사람에게 의리를 따라 우애와 선의의 덕을 충실히 닦으라 명하시고
인류를 아름답게 꾸미신 하느님
저희도 사랑을 지키며 은혜 갚을 마음을 가슴에 지녔사오니,
이를 인자로이 굽어 보시고,
저희 형제, 친척과 친구와 은인들을 어렵고 곤란한 때에 돌보시어,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도우심으로 지기 임무를 다하여
안전한 구원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163)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기리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언제나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감사송>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단지 유다민족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참조),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제2독서>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시도록 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화해시키셨음을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신 이야기, 곧 당신이 ‘왕’이기에 조롱당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은 조롱받고 모독당하시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라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요 왕으로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여 도저히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 곧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다스림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일까?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회개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도가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봉사직무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와 용서와 섬김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면서 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 나 자신을 내어주고 죽어야만 이루는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쟈뷰(Déjà Vu)’라고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마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4년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구원파의 유병언을 잡는다고 방송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중계했습니다. 유병언이 평소에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이야기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계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 파악과 안전조치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유병언에 대한 보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를 끝까지 지켜야 할 선장은 도망갔고 주변에 구조 선박들이 있음에도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토끼머리를 한 사람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며 그 토끼머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112에 구조요청을 했던 전화가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 예상되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안전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할로윈 행사는 늘 있어왔고 안전조치가 있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할로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책임 있는 기관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대사제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숙고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의미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그는 옷 벗김을 당했고, 두들겨 맞고, 가시관을 썼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주위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죄수들 중 한 명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를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죄수는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구원도 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한 죄수는 그의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는 왕이심은 알아 뵈었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형벌을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화해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용서와 자비의 왕이십니다.
----------------------------------------------------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상 위가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된 집과 책상 위에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정리 정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일까요? 대부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동창 신부입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합니다.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늘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에게 부지런해서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을러서 방이 늘 엉망이라고 말했지요. 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더 게을러.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청소를 자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마 네가 더 청소를 많이 할걸? 나는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해. 청소하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게을러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부지런한 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의 방은 너무나 정신없거든요. 부지런히 살다 보니 늘 방이 어수선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실제와 같다고 단정 짓는 우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큰 죄를 짓고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우측에 매달린 죄수는 그를 꾸짖으면서 동시에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면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왕으로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진정한 뉘우침 후에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
절망은 극적인 변화를 위한 원료다. 자기가 믿었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만이 탈출을 꿈꿀 수 있다(윌리엄 버로우스).
---------------------
----------------------------------------------------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키엣 대주교님.
사랑과 자유의 나라 그리스도 왕국(성서주간)
오늘 복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님의 치욕스러운 죽음을 서술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왕이라고 하면 세상의 왕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의 나라는 인간의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이다” (요한 18, 36) 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왕은 인간세상의 왕과는 다르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효성스러운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마귀들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을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버린 인간을 다시 맺어주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효성스러운 아들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가장 처음하신 말씀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제 아버지의 일을 살펴봐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말씀이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땅에 사시는 평생 동안 예수님은 피를 흘릴지라도, 그 어떤 유혹에도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효성스런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온전한 ‘하느님의 왕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들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자유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품을 벗어나 마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이 만든 고귀한 사람을 명예와 돈, 본능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게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간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 억압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자유로운 삶의 본보기이십니다. 물질적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공 생활을 시작하신 후 마귀들로부터 수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셨고 아주 자유롭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명예도 없이 맨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치욕스런 순간에도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로운 세상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보살펴주셨고, 당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원수를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며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진 십자가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원수들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승리입니다. 효성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승리이며, 자유의 승리, 그리고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묶이신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회개하는 도둑을 주님의 나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문이 열려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명예와 이익, 본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왕이십니다. 주님 나라에 저를 받아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명예와 돈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까? 모든 욕망은 아니더라도 단 한 개의 욕망이라도 벗어나고 있습니까?
2. 효성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부모님께, 주님께 어떠한 자녀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3. 다른 누가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거룩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기다리는,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는, 따듯한 손결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나의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
2211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왕 중심의 삶
-찬미의 삶, 평화의 삶, 섬김의 삶-
오늘은 연중 제34주일, 마지막 주일이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또 제37차 세계 젊은이의 날이자 제38차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루카1,39참조)라는 제하에 “어려운 이들 향해 성모님처럼 나아가자”라며 담화문을 발표했고,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신호철 주교는 ‘말씀의 시편’이라는 시편119장중 “새벽부터 일어나 도움을 청하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시편119,147)라는 제하에 “직접접 만남과 소통으로 말씀을 선포해야한다.”는 시의적절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참 풍부하게 느껴집니다. 예나 이제나 힘들고 혼란스런 세상입니다. 대축일의 유래가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당시 세계에서 날로 확산되어 가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온 세상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성대히 기리는 축일을 제정하였고, 이어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으로 새로 명명하면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대림 제1주일 전주일로 옮겨 기념하게 합니다.
까닭인즉 그리스도는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구분없이 모두를 다스리는 왕이며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한 것이며, 축일도 최고 등급인 대축일로 지정합니다. 아침 성무일도의 하느님 찬미는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웠는지요!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이며,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반영입니다. 성가연습시 흥겹게 불렀던 아름다운 찬미들이 새삼 감동이었습니다.
1.“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2.“예수님 놀라우신 임금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온 승리자시여
말로다 표현못할 감미이시여, 온전히 갈망할수 있는님이여”-찬미가 1절
3.“보라, 떠오르는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분을, 그는 옥좌에 앉아 다스리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리라.”-아침기도 후렴1.
4.“그분은 땅 극변까지 찬양을 받으시고 평화를 이룩하시리라.”
-아침기도 후렴2.
5.“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께 영광과 주권이 있으소서.”-아침기도 후렴3.
우리 믿는 이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왕을 모시고 그리스도 왕국에서 내적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표를, 방향을, 중심을, 의미를, 길을 잃고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혼란중에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은 다릅니다. 궁극의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이신,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신, 삶의 길이신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늘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왕 중심의 삶을 새롭게 합시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합니다. 얼마전 2013년 교황님으로 등극한후 10년째, 다음과 같이 당신의 소감을 피력합니다.
“나의 성소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놓으시고 보내주신 곳에서 나는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나는 어떤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어느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교회가 나에게 그것을 요구했습니다. 성 이냐시오의 날마다의 양심 성찰이 나에겐 참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좋고 나쁜 일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사람들의 말을, 특히 작은 이들: 어린이들, 노인들, 가난한 이들의 말을 경청하게 합니다. 12월중 86회 생일이 가까워지는 지금 나는 고요함과 큰평화, 진정한 기쁨, 온전한 신심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중에, 미사거행중에, 만나는 모든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교황인지요! 어떻게 살아야 우리도 교황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날로 잘 닮아갈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한결같이 다음처럼 살면 됩니다.
첫째, ‘찬미의 삶’입니다.
한결같이 찬미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한결같은 찬미를 통해, 아버지를, 아드님을 닮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숨쉬듯이 아버지를 찬미하고 아드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콜로새서의 그리스도의 찬가는 얼마나 우주적이고 웅대하고 장엄하며 아름다운지요! 우리는 행복하게도 평생 매주간 수요일 저녁성무일도때마다 오늘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미가(콜로1,12-20)를 통째로 부릅니다. 어디서 이런 끝없는 신비와 깊이를 지닌 찬미가를 만날 수 있겠는지요!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어지는 그리스도왕께 대한 찬미에서 가슴 떨리는 감동을 선사하며 찬미의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왕의 정체가 환히 계시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왕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세상에 그리스도왕께 속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왕이기에 교회를 통해 서서히 확장되는 그리스도왕국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아드님을 찬미하는 삶에 늘 한결같은 열정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평화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제1독서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영도자가 된 다윗은 평화의 왕,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그리스도왕을 통한 화해, 평화, 충만함임을 깨닫습니다. 콜로새서 그리스도 찬미가 후반 내용이 참 반갑고 고무적입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
평화의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평화 역시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찬미와 더불어 평화의 삶입니다. 미사은총이 바로 우리를 주님을 닮은 평화의 사람, 화해의 사람이 되게 하고 또 충만한 삶으로 이끕니다. 오늘 감사송에서 주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안으로 수렴됨을 봅니다.
“그 나라는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옵니다.”
이런 그리스도왕께서 선사하시는 평화가 우리 모두 평화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참으로 평화가 절박한 작금의 시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인터뷰에서 전쟁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며, “한 세기에 무려 3개의 세계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배우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개탄했습니다. 주님이 간절히 바라는 바, 평화의 삶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셋째, ‘섬김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왕은 섬김의 왕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의 사랑은 섬김의 삶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섬김의 왕으로서 주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지도자들도, 군사들도, 죄수 하나도 무지에 눈이 가려 그리스도왕을 알아보지 못하고 조롱합니다만, 예수님은 의연하고 담담하고 침착합니다.
다만 눈밝은 죄수 하나만이 예수님을 알아 보며, 자신을 기억해 주십사 청하며 섬김의 왕, 그리스도께서 흔쾌히 이를 약속하십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늘 우리를 섬길 태세가 되어 있는 섬김의 왕, 그리스도왕입니다. 마침 금주 가톨릭평화신문 1면 기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섬김의 삶 모범 ‘영등포의 슈바이처’기리다. 서울대교구, ‘기억하다. 빛과 소금이 된 이들’ 두 번째 선우경식 원장 기림 미사 봉헌”이란 제목입니다. 그리스도왕을 닮는 길은 오직 하나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닮고 싶습니까?
1,늘 찬미의 삶을 사십시오.
2.늘 평화의 삶을 사십시오.
3.늘 섬김의 삶을 사십시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찬미의 삶, 평화의 삶,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상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