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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640年 서역(西域) 고창국(高昌國), 고려인(高麗人)의 나라였다.
2023년 12월 30일
○ 우리들의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 상식(常識)에서, 가장 흔하게 혼란(混亂)을 느끼고 있는 것이 「7세기(世紀) 때의 서역(西域)【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동구라파(東歐羅巴) 지역(地域)】 땅에 존재(存在)했던 “고려인(高麗人)=고구려인(高句麗人)”」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올바른, 신뢰(信賴)할 수 있는, 고증(考證)할 수 있는 기록(記錄)이나 유물(遺物)이나 유적(遺跡) 곧 역사적(歷史的) 발자취는 상존(尙存)할까?
【오늘의 ‘게재(揭載) 글’을 보면 : “맥(貊)[胡貉•胡貊] ‘동구(東歐), 아주(亞洲)’의 북방지대(北方地帶) 패자(霸者) [5편]”과도 같은 성격(性格)의 글 내용(內容)이다. 서로 중복(重複)되고, 동일(同一)한 내용(內容)도 포함(包含)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필자(筆者)의 답(答)은 당연(當然)히 『“전자(前者)”에 속하며, “기록(記錄)”으로 그 같은 사실(史實)을 입증(立證)할 수 있다』라고 자신(自信)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은,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주장(主張)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으로는 ➨➨➨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오직 『대륙(大陸)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만이 이를 증명(證明)할 수 있다』
➥➥➥ 곧 “반도 조선왕조(半島 朝鮮王朝)”란 :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편집(編輯) 공장(工場)에서 인간기계(人間器械)에 의해 “조립(組立)된 것이다”〉라는 것을 필자(筆者)가 이를 증명(證明)하려 한다.
(1) 이에 대하여【7세기(世紀) 이전(以前)의 “서역(西域)=서토(西土)”의 고려인(高麗人)에 대한 문제(問題)에 있어】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이렇게 설명(說明)한다. 즉(卽),
통전(通典) 7권 식화지(食貨志) : 《總章元年十月,司空李勣破高麗國,虜其王,下城百七十,戶六十九萬七千二百。二年,徙高麗民三萬,配江淮以南、山南、京西。: 총장(總章) 원년【元年 : AD 668】 시월에, 사공(司空) 이적(李勣)이 고려국(高麗國)을 깨뜨리고, 그 왕(王)을 포로로 하였는데, “170 성(城) 아래에, 697,200호(戶)”가 있었다. 총장(總章) 2년【AD 669】에, 고려(高麗) 백성(百姓) 3만(萬) 인을 옮겨, 강회(江淮) 이남(以南), 산남(山南), 경(京) 서(西)쪽으로 배치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이 기록(記錄)을 들먹이며, 이때 『경서(京西)로 끌려간 고구려인(高句麗人)들이다』라고 말하며,
이들이 “경서(京西)” 곧 “서역(西域) 땅에 있었다”라고 설명(說明)하면서 또한 이들의 후손(後孫)들이라는 설명(說明)은 빼놓지 않고 말한다. 이에 대한 의문(疑問)은 “경서(京西)”가 왜 꼭 서역(西域) 땅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경서(京西)”란 : 장안(長安) 서(西)쪽 땅을 말하는 것으로, 신강성(新疆省)까지 5-7 천리(千里)에 달하는, 아주 넓고 먼 땅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이 주장(主張)하는 그 설명(說明)이 과연(果然) 올바른 것일까?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일까?
➨➨➨ 단언(斷言)컨대 : 이는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이 아니다』라고 “필자(筆者)”는 말한다. 그 진실(眞實) 하나하나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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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우(杜佑) 통전(通典) 식화지(食貨志)」 편을 보면 :
《大唐貞觀戶不滿三百萬。三年,戶部奏,中國人因塞外來歸及突厥前後降附開四夷爲州縣,獲男女一百二十餘萬口。: 대당(大唐) 정관(貞觀) 때에 호수(戶數)가 불과(不過) 3백만(百萬)이었다. 정관(貞觀) 3년에 호부(戶部)에서 아뢰기를 : 중국인(中國人) 새외(塞外)에서 돌아오고 돌궐(突厥) 전후(前後)가 항복(降服)하고 의지(依支)하니 사이(四夷)를 위해 주현(州縣)을 열으니, 남녀(男女) 일백이십만(一百二十萬) 인(人)을 얻었다. 十四年,侯君集破高昌,得三郡、五縣、二十二城,戶八千四十六,口三萬七千七百三十一,馬四千三百匹。: 정관(貞觀) 14년에, 후군집(侯君集)이 고창(高昌)을 깨뜨리고, 3군(郡) 5현(縣), 22 성(城), 8,046호(戶), 37,731인(人), 4,300필(匹)의 말을 얻었다.》라고 『당(唐) 재상(宰相) ‘두우(杜佑)’는 ‘통전(通典) 식화지(食貨志)’에 기록(記錄)해 놓았다』
➥➥➥ 貞觀十四年 : AD 640年 [唐 太宗, 貞觀十四年] : [新羅 善德女王 9, 高駒驪 榮留王 23, 百濟 武王 41] : 이때 『十四年,侯君集破高昌,得三郡、五縣、二十二城,戶八千四十六,口三萬七千七百三十一,馬四千三百匹 : 정관(貞觀) 14년에, 후군집(侯君集)이 고창(高昌)을 깨뜨리고, 3군(郡) 5현(縣), 22 성(城), 8,046호(戶), 37,731인(人), 4,300필(匹)의 말을 얻었다.』라고 하였는데,
➨➨➨ 이때는 고구려(高駒驪)가 당(唐)에게 굴복(屈伏)하기 “수십(數十) 년(年) 전(前)”의 이야기다. 이때 이곳 『고창국(高昌國) 백성(百姓)들은 모두 “고려인(高麗人)”이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때의 “고려(高麗)”란 “고구려(高駒驪)”를 말하는 것이다.
【동서(同書) 서역(西域) 고창(高昌) 편에서는 : 十四年八月, 交河道行軍大總管侯君集平高昌國, 下其郡三, 縣五, 城三十二, 戶八千四十六, 口萬七千七百三十, 馬四千三百疋 : 정관(貞觀) 14년에, 교하도행군대총관(交河道行軍大總管) 후군집(侯君集)이 고창국(高昌國)을 평정(平定)하였는데, 그 아래에는 군(郡) 3개, 현(縣) 5개, 성(城) 32개소, 호(戶) 8,046, 구(口) 17,730, 말(馬) 4,300 필(疋)을 얻었다. 太宗以其地為西州, 以交河城為交河縣, 始昌城為天山縣,田地城為柳中縣, 東鎮城為蒲昌縣, 高昌城為高昌縣 : 태종(太宗)이 그 땅에 서주(西州)를 두었는데, 교하성(交河城)을 교하현(交河縣), 시창성(始昌城)을 천산현(天山縣), 전지성(田地城)을 동진성(東鎮城), 고창성(高昌城)을 고창현(高昌縣)으로 하였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통전(通典) 식화지(食貨志)와 신구당서(新舊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여러 사서(史書)의 내용(內容)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기술(記述)하고 있다.
➊ 「정관(貞觀) 14년(年)」은, “서력(西曆) 640년” : 후군집(侯君集)이 고창(高昌)을 깨뜨리고, 굴복(屈伏)시켰다.
➋ 「총장(總章) 2년(年)」은, “서력(西曆) 669년” : 고려인(高麗人) 포로(捕虜) 3만 여인(餘人) 중에서 일부(一部)를 경서(京西)로 이주(移住)시켰다.
◉ 위의 글 “➊”에서 보듯이 『AD 640년 【정관(貞觀) 14년】에 당태종(唐太宗)의 명(命)을 받은 “후군집(侯君集)”이 “서역(西域) 땅의 고창국(高昌國)을 깨뜨리고 굴복시켰다”』라고 하였는데,
동서(同書)【通典 卷第191, 邊防七, 西戎三 : 西戎總序, 樓蘭•且末•杅彌•車師高昌 附•龜茲】의 “서융(西戎) 고창(高昌)”편을 보면 : 『고창국(高昌國) 백성(百姓)들은, “고려인(高麗人)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게 문제(問題)다. 즉(卽),
『고구려(高駒驪)가 당(唐)에 의해 AD 668년(年)에 무너졌지만 : 이미 그 이전(以前) 수십(數十) 년(年) 전(前)의 서역(西域) 땅 고창국(高昌國)은, 고려인(高麗人)들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아래의 통전(通典) 원전(原典) 원문(原文) 기록(記錄)을 그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3) 通典 第191, 邊防七, 西戎三 : 西戎總序「樓蘭•且末•杅彌•車師 高昌 附•龜茲」
➊ 《車師 高昌 附 : 車師前王, 後王, 並漢時通焉. 前王國一曰前部, 理交河城. 今交河郡. 水分流繞城下, 故為號. : 거사(車師)【고창(高昌) 부(附)】: 거사전왕(車師前王), 후왕(後王)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나란히 한(漢)때 통(通)하였다. 거사전왕(車師前王)은 전부(前部)라고도 하는데 교하성(交河城)【교하군(交河郡)이다】에서 다스렸다. 물이 성(城) 아래를 둘러싸고 서로 나누어져 흘러, 교하성(交河城)이라고 불렀다. 去長安八千一百里. 戶千五百. 中略, 去燉煌十三日行. 其地東西三百里, 南北五百里, 四面多大山. : 장안(長安)에서 8,100리 떨어져 있다. 호(戶)가 1,500이다. 중략(中略), 돈황(燉煌)까지 13일을 간다. 그 땅은 동서(東西) 300리요, 남북(南北)이 500리로, 사면(四面)에 큰 산(山)이 많다. 後王, 國理務塗谷, 即今蒲城, 今北庭府蒲類縣也. 去長安八千九百里. 戶六百. 西南至都護理所一千二百三十餘里, 北與匈奴接 : 후왕(後王)은 나라를 무도곡(務塗谷)에서 다스렸는데, 【곧 포성(蒲城)으로, 북정부(北庭府) 포류현(蒲類縣)이다】장안(長安)까지 8,900리다. 호(戶)는 600이다. 서남(西南)으로 도호(都護)의 치소(治所)까지는 1,230 여리 떨어져 있는데, 북(北)쪽에는 흉노(匈奴)와 접해 있다.》라고 하였다.
【거사전왕국(車師前王國) : 장안(長安)에서 8,100리, 후왕국(後王國) : 장안(長安)에서 8,9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➋ 《服 飾, 丈 夫 從 胡 法, 婦 人 略 同 華 夏. : 文 字 亦 同 華 夏, 兼 用 胡 書. 中 略. 其 刑 法 、風 俗, 婚 姻, 喪 葬 與 華 夏 大 同 。 其 人 面 貌 類 高 麗, 辮 髮 施 之 於 背 ,女 子 頭 髮 辮 而 垂 。: 복식(服飾)은, 장부(丈夫)는 호법(胡法)을 따르고, 부인(婦人)은 대략 화하(華夏)와 같다. 문자(文字)는 또한 화하(華夏)와 같고(同), 오랑캐(胡)의 문자(書)도 함께 사용하였다. 모시(毛詩).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이 있었으며, 중략(中略). 그 형법. 풍속. 혼인. 장례 등 모두 화하(華夏)와 두루 같다.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面貌)은 고려(高麗=高句麗)의 무리(一族)이며, 변발이 널리 퍼지기 전에 여자들은 두발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 其 地 高 燥, 多 石 磧, 氣 候 溫 暖, 與 益 州 相 似. : 그 땅은 높고 메마르고, 돌과 모래벌판이 많으며, 기후(氣候)는 온난(溫暖)한데, 익주(益州)와 서로 닮았다. 穀 麥 再 熟 , 宜 蠶 , 多 五 果 。 有 草 名 為 羊 刺 , 其 上 生 蜜 , 而 味 甚 佳 。 赤 鹽 如 朱 , 白 鹽 如 玉 。多 蒲 萄 酒 。 : 맥곡(麥穀)은 두 번 열매를 맺고, 마땅히 누에를 치며, 오과(五果)가 많다. 양자(羊刺)라는 풀이름이 있는데, 그 위에 생밀(生蜜)이 있어, 아주 맛이 좋다. 적염(赤鹽)은 붉은 연지와 같고, 백염(白鹽)은 옥(玉)과 같다. 포도주(葡萄酒)가 많다. 俗 事 天 神 , 兼 信 佛 法 。 : 속세(俗世)에서는 천신(天神)을 믿는데, 아울러 불법(佛法)을 믿는다. 國 中 羊 馬 牧 於 隱 僻 ,以 避 外 寇 , 非 貴 人 不 知 其 所 。 : 나라 안에는 사람의 왕래가 드물고 구석지며 은밀한 곳에 양과 말을 키우는데, 외적(外敵)의 침입을 피할 수 있는데, 나라의 귀인(貴人)이 아니면 그곳을 알 수 없다. 又 有 草 實 如 繭 , 中 絲 如 細 纑 , 名 為 白 疊 子 , 國 人 取 織 以 為 布 , 交 市 用 焉 。: 또 풀 열매가 있는데 누에고치[견:繭]와 같아, 중사(中絲)가 가는 실과 같다. 그 이름이 백첩자(白疊子)로, 나라 사람들이 이를 취하여 포(包)를 짜, 시장에서 물물교환(物物交換)한다.》라고 하였다.
➌ 《其 國 北 有 赤 石 山 , 山 北 七 十 里 有 貪 汗 山 , 夏 有 積 雪 。 此 山 之 北, 鐵 勒 界 也 。: 그 나라 곧 거사(車師 : 高昌)의 북쪽에 적석산(赤石山)이 있으며, 산(山)의 북(北)쪽으로 70리(里)에 탐한산(貪汗山)이 있는데, 여름에도 눈이 쌓여있다. 이 산(山)의 북(北)쪽은 철륵(鐵勒)과 경계를 접한다. 從 武 威 西 北 有 捷 路 , 度 沙 磧 一 千 餘 里 , 四 面 茫 然 , 無 有 蹊 徑 。 : 무위(武威) 서북(西北)으로 따라가면 첩로【捷路 : 지름길】가 있는데, ‘사적(沙磧)=사막(沙漠)’ 1천 여리(餘里)를 건너야 하는데, 사방(四方)이 아득하여, 좁은 지름길은 없다. 欲 往 者 , 不 可 準 記 , 唯 以 人 畜 骸 骨 及 駝 糞 為 驗 。 路 中 或 聞 歌 哭 之 聲 , 行 人 尋 之 , 多 致 亡 失, 蓋 魑 魅 魍 魎 也 。 故 商 旅 往 來 , 多 取 伊 吾 路 。 : 이곳을 가고자 하는 자(者)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유일하게 사람과 가축의 해골(骸骨)과 낙타의 똥이 표징(標徵)이며, 길 중간에 혹은 노래나 통곡(慟哭)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행인(行人)은 찾는 것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많다. 모두가 온갖 도깨비가 하는 짓이다. 그래서 왕래하는 장사치무리들은, 이오(伊吾)의 길을 많이 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창(古昌) 곧 거사(車師)의 북(北)쪽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이 서(西)쪽으로부터 동(東)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此 山 之 北, 鐵 勒 界 也 : 이 산(山)의 북(北)쪽은 철륵(鐵勒)과 경계를 접한다.〉고 하였으니, 곧 준갈이(準喝爾) 분지(盆地)가 당시 철륵(鐵勒)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럴 때,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 철륵(鐵勒)을 속하(屬下)로 두고, 후백제(後百濟)를 평정(平定)하는데 ‘말갈(靺鞨), 달고(達姑), 철륵(鐵勒)의 일만(一萬) 기마(騎馬)’를 동원(動員), 출정(出征)시켰다.”라고 해설(解說)할 수 있는 것이다.】
“이매망량(魑魅魍魎)” : 「온갖 도깨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매(魑魅)’는, 사람을 홀려 해치는데, 몸은 짐승이요, 얼굴을 사람 모습이며, 네발을 가졌다고 한다. ‘망량(魍魎)’은, 비상한 재주로 사람을 홀리거나 짓궂은 장난,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하는데, 동물(動物)이나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다」라고 전(傳)한다.
➍ 《十四年八月, 交河道行軍大總管侯君集平高昌國, 下其郡三, 縣五, 城三十二, 戶八千四十六, 口萬七千七百三十, 馬四千三百疋 : 정관(貞觀) 14년에, 교하도행군대총관(交河道行軍大總管) 후군집(侯君集)이 고창국(高昌國)을 평정(平定)하였는데, 그 아래에는 군(郡) 3개, 현(縣) 5개, 성(城) 32개소, 호(戶) 8,046, 구(口) 17,730, 말(馬) 4,300 필(疋)을 얻었다. 太宗以其地為西州, 以交河城為交河縣, 始昌城為天山縣,田地城為柳中縣, 東鎮城為蒲昌縣, 高昌城為高昌縣 : 태종(太宗)이 그 땅에 서주(西州)를 두고, 교하성(交河城)을 교하현(交河縣), 시창성(始昌城)을 천산현(天山縣), 전지성(田地城)을 동진성(東鎮城), 고창성(高昌城)을 고창현(高昌縣)으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 위의 “통전(通典) 서역(西域)” 편의 『(3), 車師 高昌 附』편의 “➊+➋+➌+➍” 구절(句節) 중에서 “➋”의 구절(句節)은, 무엇보다도 중요(重要)한 증거(證據)요, 핵심(核心) 줄거리다.
즉(卽) 『고창국(高昌國)』은, 『고려인(高麗人)의 나라였다』라는 사실(史實)이다. 이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반론(反論)이 있느냐? 현재(現在)까지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 기록(記錄)이 “오류(誤謬)였다”는 “반론(反論)이 없다”라는 뜻이다.
곧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기록(記錄)은 : 『올바른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다』라는 것이다.
➥ 이를 자세(仔細)하게 설명(說明)하면 :
➎ 〈문자(文字)는 화하(華夏)와 같다.〉
➏ 〈형법(刑法), 풍속(風俗), 혼인(婚姻), 상장(喪葬)의 예식(禮式) 모두는 크게 화하(華夏)와 같다.〉
➐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은 고려(高麗=高句麗)의 무리(一族)이며, 변발이 널리 퍼지기 전에 여자들은 두발(頭髮)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라고 하였다.
➨ 고창국(高昌國) 사람들은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 종류(種類)이고, 문자(文字)와 형법(刑法), 풍속(風俗), 혼인(婚姻)과 상장(喪葬)의 예식(禮式) 등은 모두 “화하(華夏)”와 같다고 하였으니, 곧 고창(高昌) 땅은, 『고려인(高麗人) 곧 화하(華夏)들이 사는 고려(高麗) 땅』이었다는 것이다.
즉(卽), 『당시(當時) “고려(高麗 : 高駒驪)”는 “화하(華夏)였다”』는 것이다. 이걸 누가 “일천(一千) 오백년(五百年)”이 지난 지금에 와서 부정(否定)할 수 있겠는가!
➥ 여기서 다시 덧붙여보면 :
(4) 通典 第 192 邊防八, 西戎四 / 于闐 : 《自高昌以西, 諸國人多深目高鼻, 惟此一國, 貌不甚胡, 頗類華夏 : 고창(高昌)의 서(西)쪽 지방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은데, 눈은 깊고, 코는 높다. 유일하게 그 한 나라【우전(于闐)을 칭(稱)】는 얼굴 모양이 호(胡 : 오랑캐)와 같지 않은데, 자못(頗) 화하(華夏) 무리와 같다.》라고 하였으니,
위의 글 “(3)”에서 『“화하(華夏)”는 곧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얼굴 모양이 호(胡)와 같지 않은데, 약간(頗) 화하(華夏) 무리와 같다. : 貌 不 甚 胡, 頗 類 華 夏』라고 한 것은 화하(華夏)란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5) 通典 西戎 / 朱俱波 : 《朱俱波, 亦名朱居槃國, 在于闐國西千餘里, 其西至渴槃陀國, 南至女國三千里, 北至疏勒九百里, 南至蔥嶺二百里. 人貌多同華夏, 亦類疏勒》
위의 글 “(3) + (4) + (5)”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의 모습【面貌 : 얼굴 모양】이 화하(華夏)와 같은데, 또 소륵(疏勒)의 종류다 : 人 貌 多 同 華 夏, 亦 類 疏 勒』라고 한 것은 : 『화하(華夏)란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6) 해국도지(海國圖志) 卷 022 / 北 印 度 各 國
《聞見錄雲又 : 又一種人圓領大袖, 衣冠類漢唐, 貌清奇似朝鮮, 人或謂是後漢之遺種雲. : 문견록(聞見錄)에서 전하기를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넓고 크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유사(類似)고, 「얼굴(貌)이 맑고 선명하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닮았는데」, 사람들은 혹 본시 후한(後漢)【한(漢)의 후예 또는 한인(漢人)】의 유종(遺種)인가 하였다》라고 하였다.
곧 「계빈(罽賓) 땅」에 『조선인(朝鮮人)’을 닮은 종족(種族), 부족(部族)이 살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좀 더 그 범위(範圍)를 넓혀보면 :
〈의관(衣冠), 의복(衣服)은 한당(漢唐)과 같은 종류이고〉, 〈얼굴이 맑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같았다(似)〉, 〈사람들은(人), 혹은 후한(後漢)의 유종(遺種)이지 않을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위에서 설명(說明)한 내용(內容) 모두 대입(代入)시키면 :
➥➥➥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의관(衣冠)이나 의복(衣服)이 아닌 “사람(人)”임이 분명(分明)한 것이므로, 즉(卽) “한(漢) 또는 후한(後漢)이나 당(唐) 모두가 조선인(朝鮮人)들의 왕조(王朝)였다”라고 하면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일까?
➨ 필자(筆者)는, 그동안 ‘전한•서한(西漢)’과 ‘후한(後漢)•동한(東漢)’과 ‘당(唐)’은, “조선(朝鮮)의 별칭(別稱), 이칭(異稱)”이라고 주장(主張)했으며,
〈‘전한•서한(西漢)’과 ‘후한(後漢)•동한(東漢)’의 땅은, 고구려(高駒驪) 땅이요, 당(唐)의 땅은 신라(新羅)의 땅이었다〉 곧 그들은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자(者)들이라고 반복(反復)해서 말해왔다.
이를 뒷받침해 주듯, 오늘날 21세기(世紀)에도, “북인도(北印度)의 땅에 조선인(朝鮮人)과 꼭 닮은, DNA도 아주 근접(近接)한 부족(部族)들이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은, 엄연(儼然)한 사실(事實)이다.
“삼한(三韓)인들이 점점(漸漸) 동천(東遷)”하면서, 이때 동천(東遷)에 참여(參與)하지 못한 부족(部族)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存在)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은 논리(論理)를 제외(除外)시키면, 이들에 대한 설명(說明)은 불가능(不可能)하다,
(7) 중아(中亞 : 西土) 땅의『월지국(月支國)』: 마한(馬韓)의 국성(國城)
《“총령(葱嶺) 서북(西北)” 땅에 『‘맥족(貉族)=맥족(貊族)’의 ‘휴도국(休屠國)=휴순국(休循國)’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아랄해(Aral, 海)” 방향(方向)이며,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타슈켄트(Tashkent) 지방이다.
이러한 땅에 당시(當時) ‘맥족(貉族)=맥족(貊族)’의 『“휴도국(休屠國)=휴순국(休循國)”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이 주변(周邊)에 있었던 많은 불교유적(佛敎遺蹟)은 ‘7 – 8’세기(世紀)의 회교(回敎)가 전파(傳播)되면서부터 대부분(大部分) 파괴(破壞)되어 흔적(痕迹)조차 찾을 수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휴도국(休屠國) 주변의 『월지국(月支國)』은 또 뭔가?〉 삼한(三韓)의 우두머리였든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이 “월지국(月支國)에서 54개 속국(屬國)을 다스렸다”』라고 하였잖은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은 “월(月)” 자(字)가 아니라, “목(目)”자(字)라고 우기며, “충청도(忠淸道) 천안(天安) 땅에 있었다”라고 기만전술(欺瞞戰術)을 펼치고 있다. “중아(中亞) 땅과 천안(天安) 땅이 같은 곳”이라는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얘긴가?】
➥➥➥ 이 모든 나라들은 바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 또는 옛 한국(韓國)이라고 불렸던 한민족(韓民族)의 나라(國家)였다』라는 역사적사실(歷史的事實)을 잊어버린다면 :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그대로 “소멸(消滅)=소망(消亡)”되어버리는 것이다.
○ 「국가(國家)는 국가(國家)의 책무(責務)를 다해야 한다.」 국가(國家)에게 주어진 책무(責務)는 다하지 않으면서, 구성원(構成員)들에게 구성원(構成員)의 책무(責務)를 다하라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국가(國家)의 가장 큰 책무(責務)는 「국민(國民)의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보호(保護)하는 것이다」국가(國家)가 자신(自身)의 책무(責務)를 다하지 못하면서 국민(國民)들에게 책무(責務)를 다하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윤석열” 정권(政權)에게 딱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병사(兵士)의 억울(抑鬱)한 죽음”에 대한 지휘관(指揮官)의 책임(責任)을 면피(免避)시키려 한 “윤석열 정권(政權)”은, 그에 상응(相應)하는 국가기강(國家紀綱)을 무너뜨리려 한 행동(行動)에 대해서, 마땅히 책임(責任)져야 하며, “윤석열”도 결코 예외(例外)일 수 없다.
임기(任期) 중에 안 된다면, 퇴임(退任) 후에라도 반드시 밝혀내어 법(法)의 심판대(審判臺) 위에 세워야 한다. 이게 법치(法治)요, 정의(正義)요, 공정(公正)이다.
2023년 12월 3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편은 조선의 지리지라고 설명하고 있는 "동국여지비고"에서 말하고 있는 "동국"이 과연 조선왕조를 말하는 걸까?
"동국이 한반도"를 말하는 건가? "중원 대륙의 땅"을 말하고 있는 건가?
당시의 '동국의 땅'은 어디를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니다.
"동국(東國)"
"조선(朝鮮)"
동국(東國)이 조선(朝鮮)임은 확실한 건가?
동국속에 조선이 있는 건가?
조선속에 동국이 존재하는 건가?
참 알쏭달쏭합니다. 그런데 "동국여지비고"는 "고종"때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희한하게도 "신증동국여지승람"편에 부기되어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것도 원문은 없고, 번역본만 말입니다.
참 알 수 없는 것이 반도 땅의 역사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기록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후대인들이, 후손들이 믿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역사의 무지속에 살면서, 조상들이 일구어 놓은 땅이 어디인지 조차 모르면서 헤맬뿐입니다.
이 말이 정답같습니다.
오늘도 '친일사대주의자'들은 극성을 부립니다.
이제는 "영토분쟁지역"까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형편이니, 이 나라에 '망조'가 든 것은 확실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망조"를 거둬들이지 않는다면 제2의 식민시대가 도래할 수 있습니다
"망조의 원인 제공자는 윤석열"입니다.
이 자를 빨리 치우지 않는다면 : 이 땅에 뭔 일이 또 일어날지 예측불가합니다.
내년 4월에는 : 이러한 친일사대주의자들을 말끔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한민족이라는 민족이 살아 나가야 할 방향입니다.]
문무 선생님 올해도 저물어갑니다. 한 해 좋은 글 감사드리오며 새해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선생님 덕분에 역사인식이 조금씩 바로서게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맙기만 합니다. 외람되게 부탁드리고 싶은 내용은 실크로드와 관련된 내용도 다뤄주십사 합니다. 카페 회원님 모두 새해 힘찬 출발하시길 축원합니다♡
안녕하세요!
"구름언덕"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실크로드...자료를 찾아보도록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