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92
7월20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AkbIJa0ZeI (김동주 바오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의 눈으로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꽃봉오리입니다.>
맑고 깨어있는 영혼으로 말씀을 경청할 때, 신비로운 체험을 가끔 하곤 합니다. 말씀이 지니고 있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말씀이 마치 사람처럼 살아서 움직입니다.
말씀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와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고달프고 지친 나를 위로하고, 내 영혼 깊은 곳을 뒤흔들고, 나를 살게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도 생명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말씀의 씨앗이 세상곳곳에 뿌려지는데,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여러 유형을 보이고 있습니다.
길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돼지 발에 진주 격입니다. 그들은 말씀의 가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기에 아무리 소중한 생명의 씨앗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마음이 돌처럼 단단히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나 복음 말씀이 좋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이 너무나 완고하다 보니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생명의 씨앗을 적극적으로 가슴에 안고자 하는 수용성, 감성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그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조금도 열 기색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 귀로 듣지만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에 몸과 마음이 온전히 쏠려 있어 말씀이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으며 지상의 것들이 천상의 것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희망으로 시작했지만, 절망으로 끝나고 맙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씨앗을 자신 안에 소중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안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이뤄낸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놀랄만한 선물 한 가지를 선사하시는데, 그 선물은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
영의 눈, 생명의 눈,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경이로움과 축복의 대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꽃봉오리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다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생명의 이치를 한번 깨달은 사람의 삶은 점점 더 넉넉해지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더욱 풍성하게 내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 열매 맺는 삶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5Oe5p2y1r2I
++++++++++++++++++
<코로나가 무서워 성당에 못 나오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 백성 맞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농부는 씨를 길과 자갈밭, 가시밭에 뿌리고 좋은 땅에도 뿌립니다. 당연히 좋은 땅에서만 30배, 60배, 100배의 소출을 거둡니다. 길은 교만을, 자갈밭은 육욕을, 가시밭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뜻합니다. 이것이 있는 땅에서는 말씀이 죽습니다.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잃습니다. 삼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비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산도 돈이요, 물도 돈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9)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세속에 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져서 사회성이 떨어집니다. 대신 공부를 잘하고 모든 것의 이면을 바라볼 눈을 지녔습니다. 사건을 맡아서 해결할 때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런데 우영우가 가장 잘 먹는 음식이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김밥이라는 독특한 설정도 나옵니다. 저는 이것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나보다 위의 세상에 사는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은 다 비유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제가 끝까지 교만하였다면 어머니를 믿지 못하였을 것이고 지금도 다리 밑에서 진짜 엄마를 찾아다닐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야 그 다리가 어머니 다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의심될 때는 어머니가 주시는 음식은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비유를 이해하여 어머니가 참 어머니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머니가 주시는 음식 안에 어머니의 살과 피가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면 하나를 끓여주더라도 반찬 투정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생명의 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것들이 하나의 상징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례나 성체성사와 같은 교회의 성사가 하느님의 살과 피로 이루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체를 영하면서도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냉장고를 부탁해’란 프로에 보면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을 재현한 셰프의 요리를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출연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음식과 똑같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다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해하게 되는 것이 ‘밥’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코로나 때문에 성체를 영하러 오지 않는 이전의 신자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저는 그들이 아직은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혀서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이라 여겨집니다. 만약 말씀의 열매를 맺었다면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를 원치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본다면 수십 년을 신앙생활하고도 코로나라는 작은 병균에 생명의 양식을 포기한다는 것은 교만하거나 육욕에 빠졌거나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빵의 가치를 몰라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라고 합니다. 꿀을 먹어본 사람은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비유로밖에 꿀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을 배워갈수록 이 비유 말씀을 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들을 귀는 바로 ‘도움의 은총’입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묵상하여 말씀을 잉태하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셨다는 뜻은 성모님께서 세속-육신-마귀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들을 귀가 생기고 그래야 천상의 비유가 이해되며 그래야 순종할 수 있고 그래야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와도 싸워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햇빛으로 타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만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바라는 것은 결국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앗을 뿌린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 씨앗은 많은 열매를 맺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4절) 여기서 길이란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로 가는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나그넷길 세상이다.
이 길에는 하느님의 것은 조금도 모르고 세상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길은 단단하여 씨앗을 덮을 만큼 충분한 흙이 없다. 악의 세력이라고 하는 새가 그 씨앗을 먹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5-6절) 돌밭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들은 지나가는 악마들에게 채여 간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련의 겨울이라고는 없는 날씨가 맑고 편할 때만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고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어려운 시기나 박해가 닥치면 쉽게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7절) 신앙인은 가치관이 올바로 서 있어야 한다. 이 가시덤불은 하느님보다도 재물을 추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신앙의 진리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재물에 관한 관심과 욕망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씨를 고이 보존하고 가꾸는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엄청난 결실을 보장받고 있다. 이렇게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큰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여야 한다. 여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씨앗은 금방 효과를 내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 맺지 않는다. 오랜 기간을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제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싹을 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라는 밭에 있는 온갖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와 가시덤불을 걷어내어 좋은 땅이 되도록 하는 수고를 기꺼이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삶을 살 수 있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ㄴ-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꾸준히 노력해서 열매를 맺으라는, 즉 구원을 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당시의 농사법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비유의 배경 설명에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인 사람도 없고, 처음부터 나쁜 땅인 사람도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성인 성녀인 사람도 없고,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갓난아기일 뿐입니다. 처음에 ‘말씀’이라는 씨를 받을 때의 사람들의 상태는 백지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쁜 땅인 줄 알지만 좋은 땅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면서 일부러 나쁜 땅에 씨를 뿌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백지상태이고, 모두가 다 좋은 땅이 될 가능성과 나쁜 땅이 될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땅이 되었다가 죄를 짓고 나쁜 땅이 되기도 하고, 나쁜 땅이 되었다가 회개해서 좋은 땅이 되기도 합니다. 좋은 예가 사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좋은 땅이 되어 있었고, 말씀을 받아들여서 많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반자 유다는 변절해서 나쁜 땅이 되었고, 나쁜 땅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잠깐 나쁜 땅이 될 뻔했는데, 곧바로 회개하고 금방 좋은 땅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박해자 시절의 바오로 사도는 우리 교회로서는 나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좋은 땅이 되었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에 사제들은 대부분 박해자 편에 섰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많은 사제가 믿음을 받아들인 일은, 나쁜 땅이 좋은 땅으로 변화된 일이 대규모로 일어난 일입니다. 티모테오2서를 보면,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2티모 4,10)라는 말이 있습니다. ‘데마스’ 라는 사람은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였으니 좋은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현세를 사랑해서, 즉 복음 선포 활동을 하면서 고생하는 것보다 세속 일을 하면서 편안하게 사는 쪽을 선택해서, 그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좋은 땅에서 나쁜 땅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은 ‘악한 자(악마)’에게 말씀을 빼앗기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9) ‘듣고 깨닫지 못하면’은 ‘듣기는 하지만 믿지 않고 실천하지도 않으면’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참 좋은 말씀이다.’라고 생각만 하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듣기에 더 좋은 말을 하는 것 같은 쪽으로, 즉 이단 종파나 사이비 종교 쪽으로 잘 넘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밭’은 뿌리가 없어서 금방 넘어지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뿌리가 없다는 말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신념’이 없고, 또 ‘인내’와 ‘끈기’도 없다는 뜻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힘든 일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고난이 닥치면 금방 믿음이 흔들리고, 결국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덤불’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유혹을 물리치는 힘이 약한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이든 유혹이든 그런 것을 물리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가시덤불’의 우거진 모습을,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유혹하는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좋은 땅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박해와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을 믿음과 의지로 잘 극복하고, 넘어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더욱더 좋은 땅이 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황무지도 잘 개간하면 옥토가 됩니다. 지금 기름진 땅이라도 내버려 두면 황무지로 변해 버립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쉽고 편안하게 성인 성녀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수녀님들과 함께 LA에 있는 ‘예수 마리아 피정의 집’에서 8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산 위에 있는 마을처럼 피정의 집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교구에 있을 때면 매년 피정을 하였습니다. 피정은 1년을 살아가는 영적인 양식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수녀님들과 함께 피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수녀님들과의 피정은 신학생들과의 피정과는 달랐습니다. 신학생들은 젊기도 했고, 사제직으로 가는 과정에서 하는 피정이었기에 갈망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수녀님들은 먼 타국에서 지내는 어려움도 있고, 오랜 시간 수도자로 살았기 때문에 피정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모두 진지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하느님의 품 안에서 머물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례는 엄숙하면서 정갈하였습니다.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수녀님들은 강의 내용을 마음에 담으려고 하였습니다. 성당에서는 하느님 앞에 머물고 있는 수녀님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번 피정을 통해서 수녀님들은 100배의 열매를 맺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수녀님들의 마음이 좋은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100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텃밭에 흙을 고르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거름을 주고, 적당한 물을 주면 좋은 땅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망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 맺기 위해서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신앙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척박한 땅에 거름을 주면 싱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기도의 거름을 주면 주님의 말씀을 싱싱하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일은 기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놀라운 표징의 뒤에는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나눔입니다. 모든 암세포는 자신의 영양분을 받기만 하지 나누지 않는다고 합니다. 건강한 세포는 영양분을 나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희생입니다. 아담의 죄로 죽음이 이 세상에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영원한 생명이 왔습니다. 갈망과 기도 그리고 나눔과 희생이 있으면 하느님의 말씀은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라는 잡풀을 뽑아 주어야 합니다. 잎을 갉아 먹는 벌레도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 있다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그것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헛된 욕망과 욕심이 있다면 역시 버려야 할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옥하게 만들어야 ‘사랑, 희망, 믿음’은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마태오 복음 13장에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소개합니다. 이는 ‘예수님 삶의 신비’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말씀의 신비’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농부들은 밭을 갈기 전에 씨를 뿌렸기에 씨앗이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 또는 좋은 땅에 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이 어디든지 뿌려질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을 선별해서 말씀을 뿌리지 않으시기에 말씀이 떨어지는 곳은 준비가 안 된 곳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때문에 혜택을 본 사람들은 아닐까요?
예수님 말씀이라는 씨앗이 좋은 마음에 뿌려질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씨앗을 뿌리신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열매로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우리 각자 안에도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지 않으시고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에 대한 희망으로 씨를 뿌리십니다. 그 열매는 씨 뿌리는 과정의 수고와 손해를 모두 보상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 어디든>
마태오 13,1-9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그 어디든>
하느님께서
나를
세상에 뿌리시니
내
어찌
세상을 고르리오
그 어디든
기꺼이
뿌려질밖에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튼실해야 하고 땅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맞은 기후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힘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씨앗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졌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좋은 씨앗이 아니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맞은 기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좋은 땅이 아니라면 땅을 일구고 거름을 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또한, 좋은 씨앗을 구하려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후를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마음의 밭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좋은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 열매는 하느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씨앗인 말씀이 있어도 무관심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인 마음이 있어도 전해주는 말씀이 없으면 또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면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푀멘). 그리고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경청과 행동은 믿음을 견고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에 접하게 되고 서운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바닥, 돌 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실은 내 생각대로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씨앗의 법칙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4. 뿌린씨 전체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5. 뿌린 것 보다는 더 많이 거둔다.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7. 종자는 남겨두어야 한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 활동하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봉사 활동의 기쁨으로 성당 가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즐거움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의 부탁은 자기를 부려 먹는 것만 같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간섭하고 판단하는 사람을 보면서 미움이 가득해졌습니다. 이제는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봉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제 아예 성당 가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어느 날, 성당 동생이 이 자매에게 “언니! 나 성당 나오기 싫어졌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밝은 분위기를 만들며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동생이었기에, 성당 나오기 싫다는 동생의 말에 깜짝 놀라서 “왜?”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나 잘한다고 칭찬을 안 해줘. 언니도 전에는 칭찬을 많이 해주더니, 요즘에는 전혀 안 하잖아.” 그때 자신이 왜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동생처럼 ‘칭찬을 못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니, 먼저 칭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오늘 너무 예뻐 보여요.”라고 말하면, “당연하죠. 저 예쁘잖아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슨 말씀이에요? 자매님이 더 예쁘신데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칭찬한 사람을 향해 칭찬의 말을 건네줄 것입니다.
내가 칭찬하지 않으면 상대로부터 칭찬도 들을 수 없습니다. 칭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성당 나가는 것이 즐거워질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자신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도 퍼져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랑을 이기심과 욕심으로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받아야 나도 그만큼의 사랑을 베푼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먼저 사랑의 말과 행동을 해야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뿐 아니라 내 주위에도 많은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길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죽어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씨가 떨어진 곳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로지 사랑의 마음만이 주님의 말씀이 많은 열매를 이 세상에서 맺도록 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 절망은 없다 -
마태복음 13장에는 예수님의 하늘 나라 비유 7개가 나오는데 그중 첫째 번에 속하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처신은 물론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참 고맙고 귀한 비유들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중심은 바로 사람에 있습니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은 그대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어제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순간 퍼뜩 떠오른,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절망은 없다-” 강론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다 새벽에 일어나 제목을 바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절망은 없다-”로 바꿨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소설입니다. 프로방스의 알프스 끝자락에 있던 황량한 계곡에서 양치기 노인이 반백년 동안 꾸준히 나무를 심어 결국에는 풍요로운 숲으로 변모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편소설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님의 뜻밖의 방문을 잊지 못합니다. 한달 동안 매일 오후2시부터 4시까지 성전에서 기도를 바쳤던 암투병중의 자매입니다. 제가 드린 “희망의 여정” 작은 강의록을 외울 정도로 봤다는 고백에 강의 원고를 보니 얼마나 많이 봤던지 빛도 바랬고 너덜너덜 해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읽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말씀 처방전도 써드렸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바로 이 말씀은 저의 여섯째 숙부가 임종전 일주일간 꼭 붙잡고 산 말씀입니다. 몇 달전 살 희망이 없다 생각되어 버렸던 동양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저한테 허락을 받고 가져간 동양란인데 향기로운 꽃이 폈다길래 사진을 찍어 달라하여 후에 전송된 사진을 보니 정말 기적처럼 꽃이 피어있었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매님 역시 씨뿌리는 사람처럼,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난蘭을 살려 냈음이 분명합니다. 문득 오래전 난蘭을 선물한 고마운 분에게 즉시 써드린 시도 생각이 났습니다.
“당신
존재의 향기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있음자체만으로
향기롭고 평화로운
난같은 당신입니다”-1998.3.31.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하늘 나라 비유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 일희일비一喜一悲함이 없이 주어진 일상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길바닥이던 돌밭이던 가시덤불밭이든 좋은땅이던 상관없이 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한결같이 씨뿌리는 일상의 삶에 충실하다 보면 언젠가 어디서의 좋은 땅에는 풍요로운 결실이 있을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귀있는 사람을 들어라”, 예사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경청(傾聽, 敬聽)’은 물론 완전히 이해理解하고 수용受容하고 동화同化되어 씨뿌리는 사람처럼, 예수님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사람, 예수님의 내공이 한눈에 감지되는 하늘 나라 비유입니다.
저역시 씨뿌리는 사람처럼 사제서품후 33년 동안 거의 빠짐없이 미사를 봉헌하며 강론을 써서 나눴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좋은 땅의 말씀밭에서는 큰 수확이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누가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 다면 저는 주저없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시를, 특히 첫연과 마지막 연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이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2012.9.15
이런 삶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습니다. 환상이나 거품이 사라진 오늘 지금 여기서 단순투명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내일은 추호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내일은 내일대로 하느님이 잘 해 줄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한결같은 말씀의 씨뿌리는 삶에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이 견고한 토대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정말 하느님 향한 신망애信望愛의 향주삼덕向主三德이 이런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한결같은 삶의 원동력임을 깨닫습니다. 저역시 예수님을 닮고 싶어 수시로 바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2021,12.8.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주인공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씨뿌리는 사람 예수님처럼 그의 소명체험에, 평생 씨뿌리는 삶에 항구했음을 봅니다. 아마 이런 소명체험이 평생 예레미야의 마르지 않는 내적 샘이 되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를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聖別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하리라.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 준다.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고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으려는 것이다.”
어찌 예언자 예레미야뿐이겠습니까? 삶의 양상은 달라도 우리 하나하나가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께 불림 받은 “섭리적 존재”임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절박한 삶에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우리 성소聖召를 깨닫게 합니다.
이래야 헛된 유령같은, 좀비같은 무지의 삶에서 벗어나,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참나의 참사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분투의 노력을 다해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좋은 땅에 떨어졌다."(마태13,1-9 참조)
<내 마음의 밭?>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씨'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말씀이라는 씨앗이 떨어지는 '땅'은 '마음의 밭'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마음의 밭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고, 이것이 너와 세상이라는 또 다른 밭으로 전해져서 더 큰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는 '내 마음의 밭'이 중요합니다. 내 마음의 밭이 비유에서 말하는 길이거나 돌밭이거나 가시덤불 같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지만 좋은 땅의 모습이면 백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내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 행하는 '영적인 행위들', 곧 미사 참례나 말씀 필사나 묵상이나 기도 등은 내 마음의 밭을 잘 가꾸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백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는 바로 '성령의 열매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또 있을까? 내 마음의 상태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로 가득하다면, 이것이 바로 말씀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 곧 기원전 536년 남유다 왕국이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완전히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전한 주님의 말씀은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과 유배의 삶'은 이를 외면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늘 나의 첫째 자리에 주님께서 머무실 수 있도록, 그래서 멸망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산교구 이영창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 햇볕에 말라 죽었고, 어떤 씨는 가시밭에 떨어져 열매를 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몇몇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많은 수확을 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 농부는 참 이상한 농부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농부가 자신의 소중한 씨앗을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밭에 던지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농사법과 이스라엘의 농사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건기와 우기가 우리나라하고 반대인데 건기인 4월에서 10월까지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서 많은 나무와 풀이 말라죽습니다.
그들의 밭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의 비옥한 땅이 아니라 그야말로 척박한 밭이고 흙이라는 것도 우리의 찰흙이 아니라 돌이 깨져 생긴 부스러기들로 비가 오지 않으면 먼지만 휘날리는 그러한 흙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에 있는 농토 대부분이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암석 위에 흙이 얇게 덮힌 돌밭과 자갈이 섞인 자갈밭이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농한기에는 그 밭에 가시덤불이나 엉겅퀴 같은 잡초가 자라기도 했고, 사람들이 가로질러 다녀 밭 가운데 길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 우리나라로 치면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우기가 시작되고 비가 와서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때 내리는 비의 양이 워낙 엄청나서 어제 사막이었던 곳에 갑자기 강물이 흐를 정도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농부는 좋은 땅, 나쁜 땅 가려내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여기저기 씨를 뿌려보는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농부들은 우리처럼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덮는 방식이 아니라, 우선 씨를 뿌립니다. 넓은 평지에 일일이 손으로 정성스레 뿌리는 것이 아니라 나귀에다 씨앗 주머니를 싣고 그 주머니에 구멍을 내서 나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씨앗을 뿌립니다.
뚫어진 구멍으로 씨앗이 다 떨어지고 나면 괭이로 조금씩 흙을 덮습니다. 이런 식으로 씨앗을 심기에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새들이 날아와서 집어삼킵니다. 또 어떤 씨는 돌들이 많은 틈에 떨어져 습기가 있는 동안은 싹이 나지만 해가 쨍쨍 내리쬐면 돌 틈에서 수분을 얻을 수 없어 뿌리가 내리지 못하고 즉시 말라 버립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집니다. 그 씨는 싹이 나기는 하지만 가시덤불에 가려 잘 자라지 못하고 싹은 기운 없이 비틀거리다가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어떤 씨는 보드라운 흙에 떨어져 흙을 갈아 덮으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로 풍성하게 수확하게 됩니다.
새가 쪼아 먹거나 말라죽거나 해서 잃어버린 씨앗쯤은 전혀 대수로울 게 못 됩니다. 씨앗 한 톨에서 여러 줄기가 돋아난다는 것을 농부들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풍성한 수확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에 차서 씨를 뿌립니다.
씨앗 한 알이 백 배, 예순 배, 삼십 배 소출을 낸다는 것도 과장이 아니고 자연스런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처럼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농부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할 비유라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를 들으면서 시장사목의 어려움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매일 매일 시장을 찾아다니며 신자, 냉담자, 비신자들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어떤 이는 본체만체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는 뒤에서 욕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하기도 전에 얼굴을 돌리는 이들도 있고요.
그들을 만날 때면 너무나 힘들어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요. 마치 오늘 복음의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같이 소용없게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정말로 정답게 정겹게 맞이하는 이들이 있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말씀에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갈라진 손으로 제 손을 잡고 주름 깊은 얼굴로 웃어주시는 할머니들이 있기에,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봅니다.
또다시 보드라운 흙에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수확을 하리라는 확신을 가지며 오늘도 시장을 돌며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아멘.
=====================
[부산교구 한건 도미니코 신부님]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청자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습니까? 저는 도시에 태어나고 자라서 농사짓는 일은 잘 모르지만, 어떤 농부도 씨를 돌밭이나 길바닥,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뿌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농부의 삶과는 다른 비유를 들면서 알아들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알아보며 작년 동창 신부들과 함께한 성지순례를 돌이켜보니,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생활하신 팔레시티나는 대체로 바위투성이의 땅이었으며 가장 더운 여름 5개월은 거의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시 농부들은 메마르고 굳은 들판에 먼저 씨를 뿌린 다음에 비가 와서 땅이 물러지면 쟁기질을 해서 흙을 갈아엎는 식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따라서 복음 말씀대로 농부는 돌밭에, 길바닥에, 가시덤불 속에도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는 농부가 뿌린 씨앗을 새들이 쪼아 먹고 해가 태워 버리고 가시덤불이 숨을 막아 죽여 버리지마는 많은 씨앗이 결국 풍성하게 수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때, 그 땅은 어떠했다고 보십니까? 그 당시의 이 땅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돌밭이나 길바닥 그리고 가시덤불보다 더 열악한 상태였습니다.
학문 연구를 통한 몇몇 학자들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그 씨앗을 중국에서 가져와서 뿌렸지만, 곧이어 박해라는 지독하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그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근근이 다음에 뿌릴 씨앗만 수확했습니다.
약 100여 년 동안 만여 명의 순교자의 피를 흘리고 나서야 제대로 이 땅의 토양이 조금씩 복음의 씨앗을 가꾸는 땅으로 변모되었습니다.
1784년에 1명에게 내려진 씨앗이 220년이 지난 지금 약 440만 명이 복음의 씨앗을 가질 정도로 놀라운 수확을 이루었습니다.
100여 년을 척박한 환경 속에서 꾸준히 참고 기다려온 우리 선조 신앙인들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길이 그들을 감싸주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처럼 우리들에게도 그 참 진리를 전해 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들을 귀가 있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씨 뿌리는 비유를 잘 이해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이 땅의 토양과 우리 자신을 보며 옛 신앙 선조를 생각하니 그분들께 미안한 감이 앞섭니다.
지금 이 땅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은 없습니다. 단지 걸림돌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과, 그 마음을 빼앗아 가는 주변 환경입니다.
440여 만의 복음의 씨앗이 제대로 결실을 낸다면 이 땅은 곧바로 하느님 나라라 불릴 수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불평등과 불의, 평화와 사랑보다는 시기와 질투 속에서 사회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씨앗을 뿌리내리지 못함에 반성하지 않고, 남의 탓을 잘 돌립니다.
마치 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해 주신 주님을 잊고, 희망의 땅을 가기 위한 광야의 수고로움을 불평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을 것을 내어 주시듯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은총의 손길을 뻗치고 계십니다.
애청자 여러분들께서 하느님의 은총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신다면, 그것은 아마 여러분들이 가진 고귀한 복음의 씨앗을 버려두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의 씨앗이 우리의 신앙 선조처럼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간직하며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런 사람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 있는 복음의 씨앗은 백 배의 결실을 볼 것입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LC8LI9hgg8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 3)
씨를 뿌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씨를 뿌리시는
주님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를
살게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끝을 알 수 없는
주님의
마음이시다.
주님의
농사법은
우리를 향한
믿음과
희망이다.
씨앗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의 씨앗이며
주님의 열매이다.
주님의 자리에서
주님의 열매가
자라난다.
열매는
씨앗의
가장 큰
기쁨이다.
주님을 알게되는
우리 삶의
모든 여정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모든 시간이
실은 열매라는
은총의 시간이다.
은총임을
잊고 살았다.
은총을 통해
우리가
가야할 길이
열매의 길임을
알게된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있는지를
씨 뿌리시는
주님을 통하여
묻는다.
어제의 열매가
아니라 오늘의
열매이다.
사랑은
씨앗으로
시작되고
은총은
열매로
드러난다.
은총의
주님께서
은총의 씨를
뿌리신다.
주님을
사랑한다.
+++++++++++++++++++
(2)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좋은 땅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좋은 이웃이 되어야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이웃은 언제나 좋은 땅처럼 자신을 낮춥니다. 자신을 낮추면 모두가 소중한 열매가 됩니다.
좋은 땅도 좋은 열매도 모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믿는 만큼 좋아지는 땅과 열매입니다.
좋은 땅은 고통 속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평화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씨앗은 땅을 향해 뿌리를 내리고 땅은 씨앗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는 열매는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좋은 땅은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겸손한 마리아처럼 주님께 언제나 청합니다.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마다 좋은 땅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 마음이라는 땅을 주신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겸손해지고 모든 것 안에서 낮아지는 좋은 땅이 되는 기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땅은 언제나 말씀의 씨앗, 말씀의 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열매를 키워나갑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