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어린이를 위하여
아직 정상적 등교는 멀었지만 백신접종이
시작됐다
작년보단 분명
희망의 꽃밭에 다가섰다
조만간 수선화 노란 꽃대가 피어오를 것이다
전라매일관리자 기자 / jlmi1400@hanmail.net
뾰족뾰족 솟는 수선화. 바야흐로 경칩을 몰고 온다.
땅속으로부터 오르는 번개. 수선화 꽃밭에 대지진이 났다. 침묵의 대지가 들썩거리며 고인돌처럼 무너진다. 사막여우처럼 쫑긋쫑긋 귀부터 깨어나는 수선화. 피라미드 같은 귀, 제 몸집만 한 귀를 올리며 세상과의 첫 대면을 시도한다. 별안간 꽃샘이 급습해도 얼음눈을 즐기는 아이들 같다.
학교도 개학 시즌이다. 출근길 승강기에서 이웃집 아이들을 만난다. 볼수록 예쁘다. 수선화 꽃밭에 들어선 기분이다. 등에 멘 가방도 훌쩍 자랐다.
구석으로 나는 몰렸지만 아침부터 행운의 여신을 만난 느낌이다. 그들은 수줍은 향기를 품고 있다.
그런데 수선화는 왜 슬픈 신화를 간직한 걸까? 물속에 비친 자기를 사랑하다 죽은 미소년 나르시스. 그 자리에서 부활한 수선화.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고 했다.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 수선화를 위로하고 있다. 그리고 고독한 길을 갈 수밖에 없는 모든 존재론적 운명을 수용하고 있다. 뚜벅뚜벅 인내하며 자기의 길을 가라 한다.
고재종 시인은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이라 예찬했다.
동토로부터 솟구치는 여린 줄기, 그것은 수억 킬로미터를 외롭게 날아 착륙을 시도하는 우주탐사선이다.
그야말로 천체가 숨죽이는 순간. 파리한 잎은 곧 날개를 펴고 태양의 맛, 흙의 맛, 바람의 맛을 정탐할 것이다. 그리하여 환한 꽃대를 불러 새로운 세상을 밝힐 것이다.
이처럼 수선화는 슬픈 신화에서 고결하고 신비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다. 그저 잘난 멋에 빠진 유아독존적 자아도취가 아니다. 깊고 서늘한 자기성찰이다. 나약한 존재를 넘어 치열한 실존에 이르는 깊은 자기애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수선화는 신명창(信明創)의 꽃이다.
마치 어린이를 닮았다. 첫째, 수선화는 약속의 전령사다. 아무리 덥고 춥더라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다. 그리하여 그곳이 세상의 꽃밭임을 선구적으로 파란 깃발로 증명한다.
둘째, 수선화는 등불의 전령사다. 등불의 관건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피워 주느냐다. 수선화는 남들에 앞서 깨어나 희망의 꽃대를 살포시 올린다. 비 맞고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끝내 등불을 켠다. 높은 곳이 아닌 가장 낮은 곳부터 구석구석 비추는 성자와 같다.
셋째, 수선화는 개척의 전령사다. 원래의 자리를 잊지 않고 한걸음씩 새롭고 황량한 길을 나선다. 난초처럼 부드러운 칼을 키우며 질투의 꽃샘도 안고 걸어간다. 타인의 정복이 아닌 고개를 끄덕이며 화합과 풋풋한 향기를 피워간다.
벌써 코로나19로 두 번째 맞는 봄학기다. 맘껏 함성을 지르지 못하는 아이들이 짠하다.
아직 정상적 등교는 멀었지만 백신접종이 시작됐다. 작년보단 분명 희망의 꽃밭에 다가섰다.
조만간 수선화 노란 꽃대가 피어오를 것이다. 파리한 매무시 초록치마 속에서 호리호리 솟을 꽃대궁. 이 땅의 어린이들이 수선화처럼 훤하게 자라길 희망한다.
그러나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백척간두에 있다. 정원사의 마음처럼 어린 수선화들이 맘껏 공평히 뿌리를 뻗도록 환경을 객토하자.
깨끗한 땅과 시기적절한 물과 따뜻한 눈빛을 드리우자. 그러면 수선화 어린이들은 지구의 꽃이 되고 나아가 우주의 꽃이 될 것이다.
저기 뜨락 전체가 문득 /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 저토록 환한 꽃을 밀어 올리다니 // 거기 문득 네가 오롯함으로 /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 고재종, <수선화, 그 환한 자리>
왕태삼
전북시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