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은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으며, 정신이나 의식 따위는 물질의 산물이라고 보는 이론은,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본래의 의미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이라는 의미 중에서
以民爲天 뒤의 문구 以食爲天의 뜻은,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맑스의 유물론은 자유시장에서 물질 만능의 현대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어울리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자본주의가 있기전의 과거의 사회에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산업혁명 시대의 프롤레타리아가 물적 토대를 이루고 현재의 소비자가 됨으로서 물적숭배(fetishism)의 천박한 인간형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어쩌면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노름빛에 허덕이던 그 당시의 맑스의 입장에서는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로 둔갑한 정치권력은 철학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고, 예술을 권력의 애처로 만들었고, 과학을 권력의 무기로 만들었고, 드디어 종교는 권력과 야합을 하게 된 것이다.
맑스가 이야기한 유물론은 다음과 같다.
사회의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등의 2차의 정신적 가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1차의 물질적 경제 행위 즉, 생산 수단, 분배 방식 등 사람들이 먹고 살아가는 방식에 의해 규정 지어 진다는 것이다.
즉, 먹고사는 1차적 가치에서 모든 2차적 가치가 탄생되어 진다는 것이다.
유물론자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유신론의 반대되는 말로도 착각하고 있다.
'신이 있다' 와 '신이 없다' 과연,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의 신들은 상당히 권위적이고 심지어 강압적이기까지 하다.
국가가 그것을 규정 지어주기도 한다.
이른바, 국교다. 종교가 그 사회의 통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신의 품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신론자로 불리우는 사람들 역시 그것의 통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른 바, 종교는 또는 신은 권력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이른 것이다.
그것은 신이 있다 없다 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구석기인들이 살던 동굴에 들소를 그린 벽화가 있는데, 그것의 사실적인 묘사에 대해 현대인들은 놀랐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서 들소를 그린 벽화는 구석기인들의 그것보다 상당히 사실감이 떨어지고 추상화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들소의 사실감 보다 그것에 대한 기호와 상징성이 더욱 부각되어 마치 추상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들소를 그린 벽화에서 예술의 단서를 찾는다면, 예술은 다분히 그 공동체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구석기인들이 들소를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린 것은, 들소를 그리면서 예술적 가치를 찾거나 여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들소를 사냥하기 위해 들소를 그렸다는 것이다.
집단 사냥을 하기 전에, 들소를 정확히 그려놓고, 급소와 공격 부위를 설명하고, 사냥 전에 집단으로 들소를 잡는 행위를 연습했는데, 그것이 춤과 그림으로 승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서, 들소의 그림이 추상화 되었을까?
그 이유는 들소 사냥에 대한 절박하고 구체적인 진실이 이미 관념이 되어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관념이란 이른 바, 문자와 언어로서 표현이 된다. 신석기인들의 들소에 대한 기호는 원시적인 문자와 언어의 형태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 한다면, 구석기인들이 그린 들소와 신석기인들의 들소의 차이는 이른바, 진실과 관념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곳에, 권력이라는 끼어들기 시작했다.구석기인들의 집단 공산 모계 사회에서, 신석기인들의 부계 부족사회에서는 부족장과 제사장이 혼합된 권력의 질서가 자리잡게 되었고, 들소에 대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자는 오로지 제사장이라는 권력자만이었다.
이제, 예술은 권력에 포섭되고, 제사장은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종교와 예술이 권력화 되는 지점인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관념이 되는 순간이 것이다.
유물론은, 그것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있다.
유물론 속에도 우리의 소박한 신들은 살아있다.
다만, 그 신은 권력화 된 신이 아닐 뿐이다.
유물론 속에도 예술은 살아있다.
다만, 그 예술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
유물론 속에도 철학은 살아있다.
다만, 그 철학은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완성되고 성숙하고 타락하면서, 맑스가 예견한 물질 만능 시대를 살고 있다.
즉, 물신 숭배(物神崇拜,fetishism)가 된 것이다.
유물론(唯物論,materialism)
유물론은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으며, 정신이나 의식 따위는 물질의 산물이라고 보는 이론은,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라는 본래의 의미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이라는 의미 중에서
以民爲天 뒤의 문구 以食爲天의 뜻은,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맑스의 유물론은 자유시장에서 물질 만능의 현대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어울리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자본주의가 있기전의 과거의 사회에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산업혁명 시대의 프롤레타리아가 물적 토대를 이루고 현재의 소비자가 됨으로서 물적숭배(fetishism)의 천박한 인간형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어쩌면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노름빛에 허덕이던 그 당시의 맑스의 입장에서는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로 둔갑한 정치권력은 철학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고, 예술을 권력의 애처로 만들었고, 과학을 권력의 무기로 만들었고, 드디어 종교는 권력과 야합을 하게 된 것이다.
맑스가 이야기한 유물론은 다음과 같다.
사회의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등의 2차의 정신적 가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1차의 물질적 경제 행위 즉, 생산 수단, 분배 방식 등 사람들이 먹고 살아가는 방식에 의해 규정 지어 진다는 것이다.
즉, 먹고사는 1차적 가치에서 모든 2차적 가치가 탄생되어 진다는 것이다.
유물론자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유신론의 반대되는 말로도 착각하고 있다.
'신이 있다' 와 '신이 없다' 과연,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의 신들은 상당히 권위적이고 심지어 강압적이기까지 하다.
국가가 그것을 규정 지어주기도 한다.
이른바, 국교다. 종교가 그 사회의 통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신의 품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신론자로 불리우는 사람들 역시 그것의 통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른 바, 종교는 또는 신은 권력으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이른 것이다.
그것은 신이 있다 없다 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구석기인들이 살던 동굴에 들소를 그린 벽화가 있는데, 그것의 사실적인 묘사에 대해 현대인들은 놀랐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서 들소를 그린 벽화는 구석기인들의 그것보다 상당히 사실감이 떨어지고 추상화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들소의 사실감 보다 그것에 대한 기호와 상징성이 더욱 부각되어 마치 추상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들소를 그린 벽화에서 예술의 단서를 찾는다면, 예술은 다분히 그 공동체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구석기인들이 들소를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린 것은, 들소를 그리면서 예술적 가치를 찾거나 여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들소를 사냥하기 위해 들소를 그렸다는 것이다.
집단 사냥을 하기 전에, 들소를 정확히 그려놓고, 급소와 공격 부위를 설명하고, 사냥 전에 집단으로 들소를 잡는 행위를 연습했는데, 그것이 춤과 그림으로 승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서, 들소의 그림이 추상화 되었을까?
그 이유는 들소 사냥에 대한 절박하고 구체적인 진실이 이미 관념이 되어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관념이란 이른 바, 문자와 언어로서 표현이 된다. 신석기인들의 들소에 대한 기호는 원시적인 문자와 언어의 형태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 한다면, 구석기인들이 그린 들소와 신석기인들의 들소의 차이는 이른바, 진실과 관념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곳에, 권력이라는 끼어들기 시작했다.구석기인들의 집단 공산 모계 사회에서, 신석기인들의 부계 부족사회에서는 부족장과 제사장이 혼합된 권력의 질서가 자리잡게 되었고, 들소에 대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자는 오로지 제사장이라는 권력자만이었다.
이제, 예술은 권력에 포섭되고, 제사장은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종교와 예술이 권력화 되는 지점인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관념이 되는 순간이 것이다.
유물론은, 그것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있다.
유물론 속에도 우리의 소박한 신들은 살아있다.
다만, 그 신은 권력화 된 신이 아닐 뿐이다.
유물론 속에도 예술은 살아있다.
다만, 그 예술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
유물론 속에도 철학은 살아있다.
다만, 그 철학은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완성되고 성숙하고 타락하면서, 맑스가 예견한 물질 만능 시대를 살고 있다.
즉, 물신 숭배(物神崇拜,fetishism)가 된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물신숭배는 '악마의 배설물'"이라고 했지만, 1000 년전 중세 시대에 이미 카톨릭은 物神崇拜를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을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자본주의는 모든 신을 物神으로 통합하고, 과학, 예술, 종교, 정치를 장악하였다.
맑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