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 지혜
지혜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적 능력”으로 되어 있다. 이제까지 지혜는 진리에 가까운 개념으로 생각해 왔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가끔가다 진리나 팩트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경우를 종종 목격하면서 지혜 밖의 지혜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더러 하게 되었다.
나는 평생토록 빛을 지고는 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 왔고, 그것이 절대적 가치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한 지인은 본인은 은행에 빛을 지지 않고는 치열하게 생존해 나갈 동력을 잃게 되어 평생동안 빛을 갚기 위해 오늘날까지 열심히 살다보니 오늘의 부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당시 나에게 역설적 가설로 받아들여졌다. 또 부동산 상승기에 아파트를 구입할 때 적절한 은행 대출을 받아 구입한 사람과 전세 살며 목돈을 마련한 사람 사이에는 얼마 뒤 부의 지도가 확 바뀐 경우를 보면서 한편으로 빛은 필요선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맹자는 오상(五常) 중에서 지(智)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으로 규정했으며 별도의 학습 없이 습득할 수 있는 선험적인 미덕으로 간주했다. 반면에 같은 시대의 순자(荀子)는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적인 미덕으로 간주했다. 서양의 경우 지혜라는 미덕은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다. 즉 이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의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보통 생활의 지혜나 삶의 지혜는 순자의 주장처럼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 곧 깨달음의 결실이다. 그런데 인간이 지식을 축적했을 경우 본성적인 나약함으로 인해서 그 지식과 함께 편협한 아집을 갖기 쉽고, 그러기에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에 지혜는 어리석음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상식의 오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상식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잘못인 경우를 종종 발견했다. 또 시대가 변하면서 기존 가치관이 변하는 경우를 요즘 너무 자주 직면하게 된다. 또 그동안의 내가 배운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내 생각만이 옳다고 강변하는 배타적인 시니어들 속에서 살고 있다.
- 서대문 현저동에 가면 독립문이 있는데, 이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문이 아니라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독립협회가 세운 건축물이다.
- 골프(Golf: Green, Oxygen, Light, Foot)는 “햇빛 내리쬐는 그린을 걸으며 산소를 마음껏 마시는” 오늘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지만, 18세기 초 스코트랜드에서는 “신사 전용 여성 금지”(Gentleman Only Lady forbidden)” 스포츠였는데 20세기 되서야 남녀차별 제한이 철폐되었다.
- 요즘 정파에 따라 역사적 사건·대북 햇볕정책·주한미군 주둔·전작권 회수·경중안미정책·소득 또는 수출주도성장에 대한 견해가 극명하게 갈리는데, 그 투쟁의 목표가 국익인가 정권쟁탈인가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 정권이 바뀌면 정책 입안 및 추진과 관련하여 잘 나가던 전정부 요직인사들이 된서리를 맞게 되면서, 뒤늦게 전정부 고위층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는 해명이나 고발이 난무하는데, 이를 두고 주군에 대한 훼절(毁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정의구현의 용기로 볼 것인가에 대한 견해도 각자가 다를 것으로 본다.
- 요즘 안보 문제에 대한 정치권의 극명한 대립과 마찬가지로 동기회나 동호회 카페 내에서도 심심찮게 흑묘백묘 논쟁이 벌어지는데 팩트에 입각한주장보다는 신념과 아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을 많이 느끼고 있다.
- 겨우 70 고개를 넘었음에도 103세의 노철학자가 종교적 영성과 철학적 연찬 그리고 삶의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후세들에게 주는 멘토적 일갈을 노망난 노인의 넉두리로 평가절하하는 지인의 경솔함에서 주관과 아집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았다.
위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우리는 그동안 내가 배운 지식과 연마해 온 지성을 뛰어넘는 지혜 밖의 지혜-초월 지혜를 발휘할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지혜로운 인간이라고 하여 반드시 지혜로운 통치를 하는 것도 아니니, 나의 지혜에만 의존할 일도 아닌 것 같다.
나는 70 고개를 넘으면서 <늘그막에 보이는 것들>이란 산문집을 발간한 바 있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법문처럼 색과 공이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종종 썻던 글들의 모음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고전을 읽을 때마다 영감을 주었던 글귀를 발췌하여 ‘지혜의 이삭’이란 메모장을 만들고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편적 지혜일 뿐 내가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집합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자가 절대적 존엄성을 가지는 천상천하유아독존적 인격체이다. 세상은 전쟁·자연재해·인재 등으로 예측불가능한 사회이다. 이제 우리는 한 국가의 국민임과 동시에 세계시민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사회적 인간으로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더불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시공간적 제약으로 세상에 대한 이해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바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긴 하지만 때때로 내가 가진 지식·앎·경험·지혜를 뛰어넘은 초월 지혜적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자 폴 발테스도 “지혜란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실용적 지식만이 아니다. 복잡성, 불확실성, 모순성 등에 대한 이해와 자신의 한계 그리고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관용을 포함한다.”라고 했다. (2023. 10. 06)
첫댓글 지혜란 어떤상황에서 최상의 현명한
판단능력을 의미하는데 지혜에 가
장 큰 장애물은 자기욕심이라고 봅
니다.
요즘 이재명과 공천때문에 이재명에
맹종하는 더블당 의원들을 보면 과
거 DJ 민주당의 자유ㆍ민주라는
정체성은 완전실종된 나머지 마치
김정은 전체주의를 연상케합니다
과연 대한민국 국회와 사법부에
양심ㆍ정의가 있는지? 국민들은
이런것들을 냉철히 평가할 수
있는 이성이 있는지를 의심케합
니다.
나라가 혼탁하고 말세일수록 국민
들은 최소한 지성과 행동하는 양심
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진리, 지혜, 초월지혜?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모든 상황과 여건에서 참이라고 할 수 있는 진리란 것은 대충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개념일 듯도 한데, 지혜나 초월 지혜 또는 절대 지혜라는 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지향 가치나 목표를 어디에, 그 정도나 수준을 얼마에 두느냐에 때라 그것은 달라질 것도 같은데요~
제가 쓴 초월 지혜란 나의 지혜만 전적으로 믿지 말고, 혹시 내생각에 잘못은 없는지라고 생각하며 타인의 견해에 경청할 바는 없는지 고려할 여유를 갖자는 의미이지요.
대단히 어려운 명제를 다루셨군요. 답답함이나 안타까움의 표현이리라 생각합니다만.
지식, 경험, 지혜, 그리고 갈헌께서 말하는 초월 지혜, 이 모든 것도 결국은 인간의 선택의 범주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상대적 인간으로서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수용한다면, 결국 그 선택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부정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갈헌의 말씀대로. '이게 아닌가벼' 하는 때가 있읍니다. 가끔 편협한 선입견적인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도 바꾸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요즘 다행인 것이 누가 말하면 귀담아 듣기도 하는 내가 대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과학의 발달이 우리의 지혜를 좀먹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타인이 물어다 주는 정보와 지식이 내 마음에 들면 그게 지혜안 줄 알고 았을 때가 많습니다.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에 따른 판단이 주가 되다보니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는 것 같군요. 올바른 지혜와 양식 그리고 포용이 절실한 시대인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