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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계속되던 장맛비가 그쳤다. 남편은 시작하는 장맛비 치곤 길고 굵다, 했다. 유월 중순, 고국은 벌써 우기에 접어들었겠다. 40℃를 넘나드는 끈적끈적한 고국, 베트남 중부 호아빈과 이곳의 날씨가 사뭇 달랐다. 비온 뒤끝, 고요하고 선선했다. 열무김치 송송 썰어 쌀국수를 말아먹은 점심으로 입안이 얼얼했다.
“머(뭐) 해요?”
설거지 마치고 안방에 들었다. 남편이 옷장을 열고 옷가지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뜨악해져 눈을 크게 치켜뜨고 남편의 손놀림을 훑어보았다.
“다녀올 데가 있어서.”
“어디 가는데?”
“씨드림.”
남편이 가입하여 드나들곤 하는 인터넷 까페 이름이었다. 토종씨앗을 서로 나눠 갖고 전통방식의 농사법을 공유하는 모임이다. 고국에서도 전통방식의 농사에 고래의 씨앗을 사용하곤 하여서 그나마 고개를 끄떡이며 함께 들여다보곤 했다.
“거기(거기서) 머 하는데?”
응엔 티 투이의 속내가 편치 않다. 고개를 남편 쪽으로 휘익 치켜세웠다.
“오프라인 행사.”
남편 역시 투이의 짜증 묻은 속내를 읽었을 테지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1월에 해, 했는데, 또?”
“이번에는 가을걷이 씨앗이지.”
“어제(언제) 오는데?”
남편이 배낭에 옷가지를 이것저것 챙겨 주섬주섬 쑤셔 넣는 게 투이 눈에 밟혔다. ∼요. 하지 않고 ∼데? 로 묻는 말투에는 신경질이 더더기 붙어 있다.
“….”
남편은 팬티와 런닝을 여러 벌 챙겨 넣었다.
“며칠, 이, 있으려고 그게(그렇게) 채(챙)기나?”
“카페지기네 황토집 짓는 일도 거들어야 한다, 해서.”
남편 역시 쌀국수를 열무김치에 말아먹은 게 뭔가 개운하지 않은 어감이 묻어 있다. 남편은 잔치국수를 더 좋아한다. 재료가 부족해 말아주지 못했다.
“화(황)토, 지(집) 지, 짓는데, 거드(든)다고?”
남편이 집을 비운 건 결혼 5년 동안 토종씨앗 나눔 모임에 1박 2일 다녀온 것이 유일했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월이었다. 까페 가입 후 처음이어선지 남편은 설렜다. 투이 또한 함께 가지 않았으나 들떴었다. 혼자 있게 된다는 묘한 해방감이 스며든 탓이었다.
“투이도 가(갈)래. 투이도 배우(울)래.”
곧장 따라나설 태세를 하자, 남편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딘데, 나서겠다는 거야.”
“투이 호(혼)자 두는 거, 괜차(찮)나?”
그동안 투이 혼자 나서는 원거리 출입을 남편은 적극 통제했다. 가까운 소도시에 고국의 동갑내기 친구가 살고 있었다.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 고향 또한 투이가 살았던 호아빈 인근이었다. 가끔 아니 자주 외롭다, 호소하는 친구에게 쉬이 갈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장보러 시내에 갈 때 말고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여권과 외국인등록증도 남편 수중에 있다. 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이런 부분 외엔 남편은 투이에게 잘했다.
“투이 호자 두는 거, 위, 위험하지 아(않)냐고?”
외롭다, 고 전화도 문자도 곧잘 하는 그 친구는 투이처럼 농촌남과 결혼한 지 1년 만에 도망쳐왔다. 인근 소도시에서 식당일하며 숨어 살고 있다. 그 친구와 통화하고 난 후면 ‘나도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하는 반문을 갖기도 했다. 그녀가 가르쳐준 베트남어 채팅 방에 남편 몰래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베트남에서 온 산업연수생 남자들이 신랑을 바꾸라는 의미인 ‘심장 바꿔’라며 홀리는 글귀가 난무했다. 남편 몰래 베트남어 채팅방에 지금도 드나든다. 하지만 그런 글귀는 외면했다. 현재보다 불투명하게 나락하는 앞날이 두려웠고, 싫었다. 투이 자신을 위해서든, 고국의 부모님과 가족을 생각해서든 이보다 더한 불안한 미래를 엮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차, 최근 시아버지한테서 들은 말로 해서 남편과 다투게 되었다.
시아버지가 마을 우산각에서 마을 어르신과 다퉜다는 뒤끝에 투이에게 묻던 말이 떠올랐다.
‘니는 베트남이서 온 KS표제. 그러제, 이?’
최근 들어, 2세를 갖자는 투이의 의사를 남편이 묵묵부답으로 외면하는 것과 시아버지의 물음은 다른 표기, 같은 뜻으로 와 닿았다. 한국에 온 첫해부터 아이를 가지려 했고 남편도 그러했다. 쉽지 않았다. 남편에게 이상이 있는지 묻진 않았으나 문제는 없는 듯했다. 투이에게도 신체적 결함은 없었다. 정서적 불안 상태가 지속되는 탓이라 여겼다. 전망하기 어려운 결합이 그토록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이 차가 많은 남편은 안정감 있게 대해줬다. 투이 또한 정착하려는 마음을 애써 키워왔다.
“고추밭에 나갈 일 말고는 좀 뜸하니까, 황토집 짓는 거, 배울까 하기도 하고.”
“투이도 하게(함께) 배(우겠)다고. 그, 그런 집 지어 사(살)자고. 그고(그리고), 어제 이야기 해(했)어야지. 이게(이렇게) 그, 급하게 간다고 하면 투이는 어쩌라고. 당신도 어제 고, 고추바(밭), 오가벼(갈병) 드(들)어서 뽀(뽑아)줘야 할 거 마은(많은) 거 봐자아(봤잖아).”
“못 뽑아서 그래?”
“호자서는 모(못)해요.”
남편은 잔등 너머 고추밭 위 소나무 숲 언저리에 있는 누군가의 묘소 잔디밭에 투이를 눕히기도 하였다. 처음엔 화들짝 놀랐으나, 주위는 적요했고 하늘은 높았으며 바람은 낯을 간질였다. 묘하게 고조되는 성합의 감흥을 느꼈다. 낮거리라 하였다. 남편의 손길은 거칠었으나 달콤했다. 그 처음도 땡볕 좋은 유월이었다. 그렇듯 몸을 섞는 건 부부 사이를 더 싱싱하고 생기가 돌게 했다.
언뜻, 멀티탭에 꽂힌 전자모기향 상표를 보자 시아버지 물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LG상표였다.
“KS표, 으, 의미 알아요. 그(런)데, 베트남과 여과(연관이) 머죠?”
“믿는다, 아니겠어?”
남편이 투이를 째려봤다.
“해(행)실이 KS다? 베트남을 나주(낮추)는 말로 드려(들렸)다고.”
“욱생각 갖지 말어.”
“무슨 뜨, 뜻인데?”
“허물없이 지내는 마을 어르신들끼리 우산각에서 나눈 말이라잖아.”
“그(근)데 왜 다투(다퉜)데?”
“동식이 안사람이 서울내기잖아. ‘거그서 먼 짓을 혔는가, 어치케 알어?’ 했대, 아버지가.”
“미경 씨가 서우(울)서 머 해, 했기에?”
“서울처녀가 시골로 시집왔다, 이거지, 뭐.”
“그게 왜?”
“알았어. 그만해.”
남편이 손을 저으며 막 문지방을 나서려 했다. 투이가 앞을 막고서 정면으로 남편을 응시했다.
“고금(고급) 지조(직종), 처한(천한) 지조(직종), 머, 그런 거(건)가?”
“서울이라는 곳이 하도 다양한 직업을 갖도록 하는 곳이니까.”
“미경 씨가 서우에서 머 하다가 시고(골)로 와(왔)데?”
“투이, 그만하자.”
“서우처녀가 시고로 시집오는 게 한구(국)에선 우, 웃음거, 린가?”
“베트남은 어떤데?”
남편이 피식 웃음기를 흘리며 농담처럼 물었다.
“베트남 여서(성)이 한구 노촌(농촌)남에게 오는 거도 그게 보는 거야?”
투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남편이 심중을 들킨 듯 말문을 닫았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투이는 남편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하지 못한 처지를 남편은 비관하는 터였다. 동식이 삼촌은 결혼하기 위해 도시 노동자로 농촌을 잠시 떠났다가 결혼한 뒤 다시 시골로 왔다고 했다. 남편도 결혼하기 위해 도시로 이주할 생각을 했더라면 한국 처녀와 결혼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못내 피력한 적이 있었다. 결국 남편은 혼기를 놓쳤고, 국제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울음이 복받쳤다. 그러나 남편 앞에서 울지 않았다. 그건, 베트남에서 이곳에 온 서러움 이상의 치욕인 까닭이었다. 베트남에서의 궁핍한 삶이 아니었던들 이곳에 왔겠는가? 다섯 동생들 앞에 두고 입 하나라도 줄여야 했다는 게 한국행 이주여성이 된 주된 이유였다. 한국 남성이 친정에 건네는 지참금 조의 액수가 적지 않아 친정 살림에 안정을 주었다. 드물긴 했지만 한국으로 결혼해 간 동포 여성들이 부치는 생활비 조의 송금은 고국의 가족에게 보탬이 참 넓었다. 코리안 드림의 환상 역시 유인의 한 동력이었다. 남편과는 16살이나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듬직해 보여 호감마저 없지 않았다. 한류 역시 한몫을 했다.
미경 씨가 서울에서 무엇인가를 하다 시골로 시집와 ‘KS표’ 언쟁을 일으켰듯 베트남 역시 도시에서 농촌으로 낙향하려는 사례는 드물었다. 베트남에서도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려는 기류는 ‘도이머이(Doi Moi)’라는 개혁‧개방 정책이 도입된 이후 더욱 뚜렷했다. 투이가 태어날 무렵부터 시작했다는 ‘도이머이’가 사실은 투이네 가족으로서는 입에 풀칠하기에 더욱 어려운 형편으로 몰아갔다고 어머니는 때때로 불만을 토로하곤 하였다. 정작 상급학교 진학마저 그만두어야 할 형편으로까지 내몰리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지적처럼 토대가 약한 약자에겐 그다지 배려하지 않는 정책으로 받아들여져 야속하게 여기며 떠나온 고국이었다. 한국에 와서 농민운동 하는 남편에게서 세계의 이모저모 흐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고국의 ‘도이머이’정책에 대해서도 좀 더 깊게 해득할 수 있었다.
남편이 해준 말 가운데 여태껏 가슴 깊이 새겨둔 말이 있다. ‘투이는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유배당한 디아스포라, 이산이야’라는 말이었다.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이산(離散), 이산… 오랜 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머무르며 감정선을 자극하는 단어였다. 결혼하고 5년을 살면서 다툼이라곤 거의 없었다. 투이는 현실을 수긍했고, 남편은 배려가 있는 농민운동가였다. 그럼에도, 시아버지의 짜증나는 표현을 듣게 된 최근에 남편과 다퉜다. 덧붙여, 남편이 씨드림의 씨앗 나눔 행사인 1월 모임에 다녀온 이후부터 남편에게서 투이는 은연중 잠자리에서의 관계 기피 현상을 느꼈고, 그로인해 심기가 뒤틀렸다. 요즘은 등마저 돌리고 잤다.
남편이 올 1월, 씨드림 오프라인 행사에서 가져온 토종씨앗으로 모종을 내고 밭에 옮긴 종류가 다양했다. 토종고추는 안질뱅이초였다. 거기에 오갈병이 든 것이었다. 쥐이빨옥수수와 주먹찰옥수수는 쑥쑥 컸다. 수확도 좋을 듯했다. 호박참외는 신통치 않은데, 노지여서 그럴까, 하고 남편은 읊조렸다. 담배상추는 시장에 내놓을 만큼의 품종은 아니라고 하였다. 괴산 적상추는 상품성도 좋았다. 거기에 이름을 듣고도 기억해내지 못 하는 서너 가지 토종씨앗을 파종했다. 토종씨앗이 밭에서 튼실하게 잘 자라고 있는데, 남편과의 잠자리 관계는 혹은 잔등 너머 고추밭 위 소나무 숲 언저리에 있는 묘소에서 등골 휘어질 듯 투이를 끌어안았던 남편의 손길, 숨길은 뜸했다. 근래에는 아주 거둬졌다.
“당신도 미경 씨가 KS표 아니(라고) 미(믿)는구나?”
남편이 대꾸도 없이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투이가 베트남 KS표 아니, 어, 었으면 어쩌(려)고 해, 했는데?”
남편을 향해 고함쳤다.
여름 해가 어떻게 함지로 자빠졌는지 모르게 밤이 왔다. 꼬박 밤을 샜다. 분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삭여지긴 했다.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스스로 다짐한 게 있었다. 한국 남편과 잘 살겠노라고. 투이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각단지게 그 맹서를 지켜내고 있었다.
같은 군 지역, 인근에 살고 있는 동포 여성들에게서는 여전히 고국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한국에서 산 기간과 무관해 보였다. 그네들은 고국에서의 지난한 삶을 다시 쫒고 싶은 심중인 듯했다. 그건 아니라고 투이는 생각했다. 고국을 버릴 수는 없었다. 더욱이나 고국의 부모님과 가족은 늘 그리웠다. 그렇다고 여기서의 삶을 내려놓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기어이 붙박고 살려는 마음을 도져야 했다. 혹 동포 여성을 만날 때도 투이는 되도록 한국말을 썼다. 그네들의 의아한 눈총을 받으면서도 고집했다. 면민의 날 행사 때 태생국가 음식 소개 부스를 운영한다고 참여하라 했을 때도 투이는 나가지 않았다. 남편이 나가도 좋다고 했지만 투이는 거절했다. 마찬가지로 다문화가정의 이주여성을 위한 한글교육에도 투이는 참가하지 않았다. 남편이 가르쳐주었다. 투이는 어렵지 않게 한글을 깨칠 수 있었다. 발음은 여전히 서툴렀다. 읽기와 쓰기는 정확했다. 남편은 투이가 참 영리하다고 칭찬해줬다. 하나 가르치면 둘 아니라, 셋과 넷을 깨닫는다고 추켜세웠다.
밤을 새는 동안에도 남편에게서는 문자 한 구절 없다. 지난 1월, 씨드림 첫 번째 행사에 갔을 땐 뻔질나게 문자를 날렸었다. 투이는 핸드폰을 봤다. 새벽 네 시 무렵이었다. 외롭다, 고 문자 날리곤 하는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는 이 시각에도 식당에서 일 하고 있을지 몰랐다. 콩나물국밥을 내놓는 식당은 밤샘 영업을 하였다. 밤새 술을 마신 젊은 사람들이 주된 손님이라 했다. 새벽녘에 콩나물국밥집을 찾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술꾼이며 너무 자주 보는 얼굴들이라고도 했었다. 문자를 나눈 지도 꽤 되었고 한 동안 만나지도 못했다. 문자를 넣었다.
―투이는 지금 외롭다, 너처럼. 남편이 외박 모임에 갔다. 남편에게선 문자도 없다.
곧장 답을 주던 친구에게서 한참 지나 답신이 왔다.
―여기, 지금 안산이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 됐다. 전에 말 했던 베트남 남친과 함께 있다. 동질감 느껴!!! 이곳에 베트남 젊은남 많다. 다들 열심히 산다. 투이도 왔으면 좋겠다.
투이도 아는 베트남 남자였다. 친구가 보낸 사진에서 봤다. 호쾌하게 생긴 남자였다.
―이틀 동안, 이곳 쌈채소 하우스에서 일했다. 지금은 남친 다니는 공장으로 옮겼다. 월급 괜찮고 사장, 좋은 사람이라고 해, 남친과 함께 일한다. 와라. 이곳에 자리 있다. 고향 가까이 있다는, …뭐랄까, 그런 기분!
친구에게서 다시 온 문자를 보고 투이가 짤막하게 문자를 날렸다.
―흔들지마. 아직, 난….
친구가 곧 바로 답신을 보냈다.
―ㅋㅋ. …투이는 여리다. 기다릴게! 투이에게 호감 간다는 남자 있다!
투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려 했다. 남편에게선 여전히 문자가 없다.
동이 트려 했다. 들일은 나가야 했다. 입안이 컬컬했다. 물에 밥 한 숟갈 말아 겨우 한 입 떴다. 동녘이 부옇다. 딴은, 이 시기에 고추 따고 오갈병 든 고춧대 뽑는 일 말고 마땅히 할 일이 없었지만 서둘러 채비했다. 여기나 고국이나 농업일꾼들이라는 게 해뜨기 전 밭일, 논일에 진력이 나 있는 사람들이다. 유월 햇볕이 동천에 오르기 전, 하루의 반나절 일을 한다고 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투이, 나가나?”
바로 옆집이 시댁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일상을 늘 간섭했다. 처음엔 감시라 여겼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의식하진 않는다. 감시의 눈초리는 시어머니에게서 만이 아니었다. 작게는 집안, 넓게는 마을 전체가 그런 시선으로 번득였다. 그토록 느끼게끔 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그랬다. 혼자 있거나, 여럿이 함께 있어도 발가벗겨지는 듯한 갈증의 눈초리를 의식하곤 했다.
“그〜은데, 엄마. 그(근)수씨, 무슨 여(연), 락, 없었나요.”
시어머니는 투이의 어눌한 발음도 곧잘 알아들었다. 고국에서도 시어머니란 존재는 엄한 상대였다. 그래도 제일 먼저 정분 있게 대해준 분이다.
“안 왔나?”
남편의 출타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서운함이 더 보태졌다. 시어머니의 말투는 고국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였다. 고국의 어머니도 늘 짧은 한 마디였다.
“잔∼등, 너메 고추바에 가요.”
“이파리 말라 비틀어지더만.”
‘그예, 약도 안 치고, 머헌다고, 집을 비우는 지, 원.’하는 속내를 담은 말품이었다. 드물게, 시어머니가 남편을 탓했다. 며느리가 안고 있는 속내를 감지해서가 아니다. 고추이파리에 병이 왔다는 게 아들의 필요조건이 된다. 잎이 마르는 오갈병엔 천연황토유황합제를 7-10일 간격으로 살포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초기에 세 차례 하고 말았다. 칼슘 제재의 농약제 살포를 해야 효과가 더 있다고 주위에선 그랬다. 남편은 유기농업 하는 사람이었다. 농약은 살충만 하는 게 아니었다. 고국의 전쟁 동안 산림에 뿌려진 제초제인 에이전트 오렌지는 고국의 산천을 갉아먹었으며, 지금도 고엽제에 함유된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이 음식과 모유에서 발견될 정도로 폐해가 깊다, 했다. 한국에서도 고엽제 피해 월남전 참전병들이 차에다 구호를 써서 몰고 다니는 걸 보았다. 투이는 유기농업은 고무적인 농사법이라 여겼다.
“바(방), 제야(약), 아, 안, 쓰거든요.”
시어머니 앞에선 더욱이나 더 말투가 어눌했고, 흔들렸다.
“땅심을 높이던지, 밭이서 살던지.”
남편이 유기농을 하려한다고 할 때, 집안에서는 염려했다. 아니, 말렸다. 힘은 더 들면서 수익은 적다는 게 이유였다. 삼 년째였으나, 남편은 그런대로 이겨내고 있었다.
“푸, 풀로 따, 땅심 노(높)이고 처(천)연? 머라 야(약)제도 뿌려(렸), 거든요.”
“아침, 저녁 발질이 농삿일인 게다.”
차양 넓은 모자를 쓰고 나서는 투이 등 뒤에 대고 시어머니가 한 마디 거들었다. 시어머니는 지금도 투이보다 더 부지런했다. 정작, 남편에게 건네야 할 진언이라 여기며, 투이는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오늘이 3일째다.
남편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다. 먼저 문자를 넣고 싶진 않았다. 애정이 식었나, 싶었다. 애초에 애정이 있기나 했나, 하는 의구심마저 떨쳐 일어났다. 남편이 잠자리에서 등 돌리고 투이의 손길을 거절할 때 남편 등에 대고 물었었다.
“무, 무슨 이유, 지요?”
“뭐….”
남편이 얼버무렸다. 뚜렷한 전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까닭을 모르니, 상의하려 해도 참 난감했다. 남편이 토종씨앗에 관해 열을 내고 모임에 깊숙이 관여해 가는 게 싫지 않았다.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관여와 관심의 정도가 깊어갈수록 잠자리에서의 관계 횟수가 줄었다는 어떤 조짐도 감지하지 못했다. 토종씨앗과 잠자리에서의 관계 연관성을 연관해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처럼 코가 뭉툭하면 영, 이상하지 않을까?”
남편이 투이 몸을 열어젖힌 채 진지하게 묻는 것이었다.
“전신 성형도 한다는데, 뭐.”
덧붙이는 말이 그동안의 남편답지 않다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투이는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나날이 지날수록 남편이 초췌해 보였다. 이후, 남편의 잠자리 관계 요구 횟수가 현저히 줄고 있다는 사실감을 거둘 수 없었다. 남편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게 되었다. 한국에 오면서 마지막으로 본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런 남편 얼굴 위로 겹쳐졌다.
할아버지는 민족해방 전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한국에 대해, 고국해방 전투 당시 한국군에 대해 분노했다. 한국으로 올 즈음, 치매에 걸려 있던 할아버지를 큰집으로 보러 갔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알아보지도 알아듣지도 못했다. 투이가 한국으로 시집가게 됐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망연하게 눈망울 굴리며 알아들은 듯,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듯 허둥대는 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투이가 눈물을 보이자 할아버지 또한 슬픈 눈빛을 드러냈다. 할아버지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떨어졌다. 할아버지의 눈물 속에서 투이의 삶의 여정이 비루해질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감정이 묻어 있다고 여겼지만, 투이는 눈물을 거뒀다. 작별 인사를 올리곤 냉정하게 할아버지와 헤어졌다. 그런 할아버지가 다시금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아직 생존해 계셨다. 불현듯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고(곳)이 투이, 뼈, 무(묻)을 고(곳)이라 여기는 거, 걸요. ‘그지(집) 며느리는 그지에 뼈 무, 묻어라.’며요.”
남편의 말뜻을 알아채면서도 투이는 그날 밤, 그렇게 대답했다. 할아버지 손을 놓고 돌아서던 5년 전 고국의 하늘은 그나마 맑았었다. 그날 낮, 역시 몇 점의 구름이 하늘 끝으로 밀려난 해맑은 오후를 지나 휘영청 보름달이 밝았었다.
“속담도 익혔네, 제법.”
투이의 정서가 그런들 남편의 손길은 부드럽지 않고 차가웠다. 남편의 숨길은 이내 잦아들었다. 남편이 토종씨앗으로 모종을 낼 때만 해도, 남편도 그랬지만 투이 역시 전래의 농사법에 전래의 씨앗이 제격이라 여겼고, 흐뭇했다.
밤이 더욱 깊어 갔다. 투이에게 연정 보였던 고국 농부의 얼굴이 조심스레 떠올랐다. 투이는 고국의 고향에 있는 호이안 중앙시장에서 채소노점을 하던 어머니 대신 시장에 나가곤 했었다. 채소를 재배해서 가지고 나오는 농부들은 늘 웃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대신 노점을 보는 투이를 보고 연정을 내보인 남자 역시 젊은 농사꾼이었다. 그 남자 역시 참 맑았었다. 베트남의 논농사는 지금도 기계화율이 높지 않았다. 더구나 밭농사는 손으로 일궜다. 농업이 산업화되어 갔지만 또한 널리 퍼져 있지는 않았기에,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작물의 씨앗 역시 재래종일 게 분명했다. 그때는 몰랐다. 한국의 농촌남에게 시집온 이후 고국의 농사일을 떠올리게 되면, 고국의 농사가 더 전통농업에 가깝다고 되새겨졌다.
고국의 그 농부가 생각나자 시아버지가 했던 ‘베트남 KS표’의 의미와 토종씨앗에 대한 남편의 애착이 겹쳐졌다. 잠자리에서 내뱉은 ‘당신처럼 코가 뭉툭하면 영, 이상하지 않을까?’ 하던 남편의 우려가 보태졌다. 등 돌리고 자는 남편의 잠자리를 떠올리자, 그 표현들이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하고 깊은 의구심이 일었다. 딴은, 지금에 와서는 토종씨앗보다 GMO(유전자변형생물체)가 더 많이 파종되는 연유여서 KS표, 이를테면 씨앗에 있어서의 토종을 더더욱 찾게 되는 거 아닌가, 짚어졌다. 서울처녀가 시골로 시집와 웃음거리가 된다한들 정작 미경 씨가 토종이지 투이는 끝내 유입된 외래종이었다. 씨앗보다 땅의 기운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이가 있다고 하지만 남편은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남편의 잠자리 기피 현상에 그런 견해가 담겨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솟구쳤다.
어디선가 새벽닭이 울었다.
투이가 컴퓨터를 켰다. 남편과 함께 들여다보곤 했던 ‘씨드림’ 까페에 토종씨앗과 GMO 혹은 디아스포라와의 연관성을 담은 내용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일어선 까닭이었다. 남편이 혹시나 그런 내용의 글을 올려놓았을 지도 몰랐다. 충북 괴산에서 오프라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궁시렁덩시렁(자유게시판)’을 먼저 뒤졌다. 최근에 올린 글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무릇 남자란…’,
무릇 남자란...|궁시렁덩시렁(자유게시판)
…조회 34 |추천 0 |2015.03.21. 02:36
…http://cafe.daum.net/seedream/9dBw/2433
(영화)'와일드'가 보고 싶다... (그보다 백만배 더) 걷고 싶다... 농사도 상당히 걷는 일 이나 뱅뱅돈다. 왜 난 여기 남겨졌을까? 나머지 무리들이 시호테 알린으로 떠나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는 그녀가 남쪽으로 간다는 말 한마디를 잊지 않았을터. 그래 그가 그녀를 만났기에 내가 있는건가? 하지만 왜 내게 베가본드의 피를 전해 주셨는가? 그대여 당신이 동쪽으로 떠나지 못한 한을 왜 피에 새기셨나요. ㅜ 한진희 버전으로 말하고 싶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30대는 모르리 ;;) 떠나는게 진정한 남자일진데...
영화 이야기인 듯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30대는 모르리 ::) 떠나는 게 진정한 남자일진데, 하는 마지막 글귀가 의미심장하게 닿았다. 하지만, 문맥만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다. 다시 읽어보았다. 왜 난 여기 남겨졌을까?, 하는 대목이 더 다가왔다. 사실, ‘투이는 남겨진 게 아닌 걸.’ 그랬다. ‘투이가 선택한 한국행이야. 5년을 살면서도 투이는 여태껏 농촌에서 아니 농촌남에게서 도망치려 하지 않았잖아.’ 되뇌었다. 한국 여성인 미경 씨가 웃음거리인 게 농촌행이라 한다면, 투이는 이국에서 온 농촌행 여성으로 ‘베트남은 어떤데?’ 하며 의문을 품는 남편 생각의 밑바닥을 느껍게 감지할 것 같았다.
투이 자신이 스스로 믿는 건 베트남 토종씨앗이라는 징표였다. 시아버지 표현대로 ‘베트남 KS표’라는 의미 역시 남편에게서는 처녀성일 것이라는 판단을 그 동안 어렴풋, 아니 지금껏 털어내지 못한 채 지니고 있었다. 신혼 첫 밤에 투이의 선홍빛 피를 본 남편은 투이를 더욱 깊게 끌어안았었다. 그렇게 시작한 신혼의 잠자리는 깊고 푸르렀었다.
그러했던 남편의 손길과 숨결이 멎은 지금, 토종씨앗을 선호하는 남편이 정작 놓치고 있는 게 있다고 투이는 여겼다. 아니, 알면서도 거부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남편이 가르쳐준 때문에 더욱 그렇게 믿었다. 씨앗의 기후적응성과 지역역병성을 이겨내는 데에는 생물의 종다양성이 한몫을 하게 되므로 같은 품종이라도 여러 종류의 씨앗이 다양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게 토종씨앗 나눔 모임에서의 지적이었다. 그 지적에 대해 남편과 함께 까페를 통해 공유하고 있었다. 남편이 토종씨앗에 대해 주입해준 견해이기도 했다.
다시금 의문이 솟구쳤다.
‘생물 종다양성을 인정하던 남편의 견해는 결국 거짓말 아닌가?’
남편이 이처럼 연락 없이, 문자 한 자 보내지 않고 투이 혼자 놔두는 게 더욱이나 괴이쩍게 닿았다. 결혼 생활 5년 동안 딱 두 번째 맞는 혼자만의 밤이다. 올 1월의 씨드림 씨앗 나눔 행사에 남편이 간 뒤, 투이 홀로 지샌다는 외로움은 없었다. 즐겁게 맞은 밤이었다. 남편과 밤 늦게까지 문자를 나누기도 했다. 씨드림 모임으로 해서 두 번째 맞는 3일째의 눅눅한 밤은 치미는 부아를 삭이기 쉽지 않은 여정으로 흘렀다. 물론, 그 동안의 정리로 보아 이렇듯 며칠간이나 집을 비우는 남편이 투이에게 갖는 신뢰의 표증일까, 하는 심경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그런 탓에 더 헷갈리기도 했다.
다시, 까페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전통농사배움터’, ‘토종씨앗배움터’, ‘생활문화바꿈터’, ‘자료 곳간’ 여기저기를 들고났다. 토종씨앗과 GMO 혹은 디아스포라 즉, 이산의 문제를 다룬 내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글 올린 지 꽤 지난 ‘궁시렁덩시렁(자유게시판)’ 뒤쪽에 또 다시 들어갔다. 특별히 투이 눈에 밟히는 내용을 찾지 못했다. ‘공부방’을 거쳐 각 지역 ‘씨앗나눔터’에 이르렀다. 몇 지역에서 새로 글이 올라와 있다는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처음에 놓인 ‘제주도 모임’부터 봤다. 언젠가 아이 낳으면 아이와 함께 제주도로 여행 가자던 남편 말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들여다 볼만한 제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씨앗나눔터’로 커서를 옮겼다. 작년 9월에 올린 댓글 많이 달린 글을 보았다. ‘개똥참외 나눔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눈에 찍혔다. 개똥참외는 별난 참외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서였다. 변종의 의미를 찾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제주도 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이라서 그럴까? 한국말도 아직 다 여물지 않은 투이였다. 투이의 ‘뭉툭한 코’를 남편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이질감을 투이 또한 제주도 말에서 느꼈다. 육지 여자가 제주도로 시집가는 건 웃음거리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를 일이었다.
전라도 모임으로 넘어갔다. 최근에는 들어가 보질 못했다. 전라도 모임에 남편의 글이 혹 있을 지도 몰랐다. 논리적이고 유머 감각도 좋았지만, 남편이 글을 쓰는 것 같진 않았다. 남편의 글은 없었다. 여기저기 드나들다 끝으로 별반 기대가 되지 않는 ‘추천 토종도서’ 창에 들어갔다. ‘토종 곡식(씨앗에 깃든 우리의 미래)’에 들어가 보았다. 『씨앗에 깃든 우리의 미래 토종곡식』이라는 책이 소개되어 있었다. 2012년 11월 25일에 실린 책 소개 글이었다. 책 제목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씨앗과 미래가 어떤 함수 관계에 있는지 궁금했다.
…이렇게 이 땅에서 오랜 시간 여러 대에 걸쳐서 선별되고 고정된 씨앗을 ‘토종’이라 부를 수 있
을 것이다. 그래서 밀의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이지만 ‘앉은뱅이밀’의 원산지는 한반도가 된
다.
우리
땅과 하늘과 비와 바람이 농사꾼의 손을 빌어 선택한 씨앗,
이것이
토종이다.
밀의 원산지가 아프가니스탄 지역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앉은뱅이밀’은 토종이라고 했다. 이해가 될 듯 말 듯 혼란스러웠다. 댓글을 보았다. 아, 거기에 남편의 닉네임이 있는 게 아닌가.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2015년 1월 21일에 올린 글이었다. 올 1월, 씨드림 오프라인 행사에 다녀온 뒤였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아프가니스탄
밀이 ‘앉은뱅이밀’로
토종화 되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이듯 현재 제게는 베트남 아내로부터 잉태될 2세가
아프가니스탄 밀의 단계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 다.
지역역병성
즉,
‘우리
땅과 하늘과 비와 바람’의
역경을 딛고 서지 못할 거라는 엄혹한 현실이 아프게 닿습니다..
└
아직 2세가 태어나지 않았나요? 낳으십시오. ‘우리 땅과 하늘과 비와 바람’이 단지 장벽으로 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고 결국 그 환경에 맞춰 가는 존재니 까요.
└
너무 쉽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 님은? 이른바 혼혈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대가 여전히 배달민 족적 관점에서 벌어지고 있잖습니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들의 선택에 의해 그걸 견 뎌야 하는 2세의 고통을 부모 세대가 조장하는 게 과연 옳을까요?
└
다산의 시대여야 합니다. 세계화의 시대이기도 하지요. 국제결혼 이주여성 시대가 열린 지 20여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그네들 자녀가 사회진출을 하는 성인이 되어 있는 시기에, 아직 도… 님의 그런 민족적 관점은 낡은 유물 아닌감요?
└
님은 왜 토종씨앗 모임인 ‘씨드림’에 들어 왔나요? 우리 땅에 우리 씨앗이 제격이라 여겨서 아닌가요? 국제결혼에 의한 이주여성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토종씨앗의 관점 에선 결국 외래종으로 혹은 더 나아가 GMO로 인식하고 있는 게 현재 한국의 민낯 아닙 니까? 음, 그러니…고민, 고민 중입니다.
└
GMO, GMO라고까지…. 지나치군요. 국제 이주민과 혼혈을 포함한 디아스포라가 21세기 전 지구적 발전 동력이라는 견해에 찬동하는 사람입니다. 중국의 화교, 컴퓨터 기술자 들인 미주에서의 인도인, 유럽 특히 프랑스로 건너간 아프리카 흑인들, 한민족의 해외동 포 역시 그렇고요. 한국 내 동남아 이주민 또한 같은 시각으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
…? 어이쿠, 아내가 깼네요. 그럼, 이만.
‘푸르른 들’의 댓글은 최근이었다. ‘씨드림’ 오프라인 행사가 열리기 일주일 전이었다. 남편의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 투이는 머릿속이 텅 빈 듯 멍먹해지는 기분에 빠졌다. 서서히 담담해져 갔다. 의외였다. 잔뜩 기대했다, 기대대로 되었을 경우에 느끼는 허망함 같은 것이었다.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반문했다.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돌아가 고향집에 닻을 내리는 건, 여기서의 삶보다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다고 농촌에서, 남편에게서 도망쳐 이주노동자로 살려는 의지 또한 엷었다.
남편에게 문자를 넣었다.
―씨드림 행사에 간 이유를 알겠군요. 당신이 잠자리에서 관계를 마다한 까닭이 그래서였군요. 태어날 아이가 GMO일 것 같아서요? 왜 투이와 결혼했나요. 당신에게서 투이의 존재는 성적 대상일 뿐인가요? 그런데도, 당신은 최근에는 등 돌리고 잤잖아요. 답해 보세요?
남편에게서는 답이 없다. 해가 서산에 걸렸다. 곧 해가 졌다. 노을이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닷새째의 밤이 또 서둘러 왔다.
남편은 여전히 ‘고민 중’인가 보다. 나흘 밤을 꼬박 홀로 지새며 투이는 더욱 단호해져 가는 자신을 만났다. 오늘 밤에도 남편에게서는 답신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줄곧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충전기에 연결하라는 신호가 몇 차례 이어졌다. 이내, 밧데리가 꺼졌다. 충전할까, 말까 망설이다 밧데리를 충전기에 꽂았다. 밤이 깊어 갔다. 어둠은 더욱 쌓였다. 충전 완료 불빛이 떴다.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 기계음이 퍼드덕 울렸다. 문자가 와 있었다.
―생물종다양성〈지역역병성.
‘생물종다양성〈지역역병성.…이라니?’
남편의 답신에 담긴 속내가 이내, 읽혀졌다.
―외래종이 토종으로 바뀔 만큼의 시간으로 5년은 부족하다? 아니, 50년이 지난다한들 베트남 여자일 뿐, 서울에서 온 미경씨일 수 없다는 것…?
밤이 두 겹, 세 겹 더 깊어졌다. 어둠은 그만큼 더 두터워졌다. 답신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새벽녘, 투이는 집을 나섰다. 시댁의 닭들도 기척하지 않았다. 마을의 개들도 짖지 않았다. 남편의 문자가 다시 입력된 건 투이가 집을 나선 지 이틀 후다.
―돌아와요, 사랑하니.
남편의 평소답지 않은 건조한 문구다.
투이가 핸드폰 번호를 바꾸는 데는 한 시간이 채 안 걸렸다. 안산의 여름, 밤거리는 베트남 중부 호아빈 지역처럼 후덥지근하다. 하지만, 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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