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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 친구 따라 강남? 친구 따라 주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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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친구 따라 강남? 친구 따라 주님?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오늘 복음은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얘기입니다.
성탄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와서 보는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고,
이제 곧 공현 축일을 지낼 터인데 주님께서 점차 공적으로 드러나시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필립보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하는데
나자렛 출신임을 이유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나엘이 부정하자
그래도 “와서 보라”고 권유하고 나타나엘은 마지못해 그 권유를 받아들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 안 좋은 말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친구 따라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친구 따라 주님께 간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이때 친구는 주님께로 가는 징검다리 또는 사다리입니다.
필립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했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고 친구라고 해도
껄렁껄렁한 친구였다면 도무지 갈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진실한 친구였고
사랑하기에 주님을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믿었을 것이고,
이때까지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은 믿을 수 없어도
친구는 믿을 수 있었고 친구의 사랑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들을 본보기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필립보처럼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어야 하고,
나타나엘처럼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서 보고는
같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길을 같이 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의 역사 안에는 이런 관계가 참으로 많습니다.
서로 인도자와 동반자가 되는 경우요,
홀로 성인이 되지 않고 같이 성인이 되는 경우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안드레아를 비롯한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분도 성인과 스콜라라스티카 성녀,
이냐시오 성인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
클라라 성녀와 같이 수도자가 되고 성인이 된 그의 동생들이 그러했지요.
이런 관계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관계가 부러우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저의 형제들은 이런 관계인지,
저의 공동체는 이런 관계로 형성된 공동체인지,
수도 공동체뿐 아니라 지금 제가 하는 일을 통해서 만난 분들도,
그저 일의 동업자일 뿐인지 주님께 함께 가는 동반자들인지 성찰할 때
저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닮지 못해도 한참 닮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닮기로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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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오늘 <복음>은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안드레아의 증언을 들었는데, 오늘은 필립보의 증언과 나타나엘의 증언을 듣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을까?
오늘 <복음>은 그들이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 그 ‘만남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었을 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하며 핀잔을 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와서 보시오”(요한 1,46)라는 필립보의 확신에 찬 초대에 따라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두렵고 떨리는 ‘만남의 순간’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예수님의 신적인 전지함, 곧 ‘거짓이 없음을 보는 거짓이 없는 눈’, ‘진실을 보는 눈’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48)하고, 당혹할 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이는 예수님께서 그를 “보았다. 알았다”는 예지적인 면만이 아니라, ‘내가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랑의 측면을 말해줍니다.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 ‘진실을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 그것은 사랑의 다른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에서 사도요한이 말하는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타나엘은 예수님께 대한 모든 의혹과 편견이 말끔히 사라지고, 마침내 믿음과 감격이 샘솟았습니다. 사실, 바로 이 순간, 나타나엘은 비로소 메시아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뵙는다면, 그분의 눈동자 안에서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바로 이 분이 나를 온전히 아시는 나의 구원자요, 주님임을 보았습니다.
이를 오늘 <독서>에서 요한사도는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9-20)
비로소 나타나엘은 눈이 맑아지고 환해져 깨달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입술을 타고 신앙고백으로 흘러나옵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이렇게 해서, 대전환이 발생한 것입니다. ‘진실을 바라보는 눈’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빈정거리던 그에게 이제 대역전이 생긴 것입니다. ‘진리’가 그를 전복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가 ‘주님을 만난’ 까닭입니다. 동시에 주님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심연으로부터 만난 까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만남의 신비’가 믿음을 불러오게 되었고 그를 전환시켰습니다. 그리고 증언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고,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사이의 만남 안에서도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니고, 예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신비’를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요한 1,48)
주님!
저를 주목하여 바라보고 계신 당신 눈동자 안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보게 하소서.
제 눈이 맑아져 거짓 없는 진실을 보게 하소서.
하늘이 열리고 진리를 보게 하소서!
제 마음에 거짓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이 퍼부은 사랑을 퍼 올리게 하시고
당신 만남의 거룩한 신비를 담아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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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기다리시고 찾아 오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중에는 본받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은 벳사이다인데 필립보도 벳사이다 출신입니다.벳사이다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입니다. 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나를 따라라’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5,1). 많은 유다인은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나 삶이 달라져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의해 발길을 옮길 때 먼저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쿤둥한 반응을 보인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에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2절 이하를 보면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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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부간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합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줄 돈인데 몇 달씩 미루다가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약속을 정했는데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항상 일찍 도착하는 편이라 짜증이 났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그렇고, 자라온 환경이 그래서인지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바꿀 수 없다면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타인과 소통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조급한 성격에 정해진 일을 몇 번씩 확인하곤 합니다. 상대방은 저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짜증이 날 때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함께 여행을 가서도 새벽에 일어나 불을 키곤 했습니다. 상대방은 여행 와서도 일찍 일어난다고, 잠을 자는데 깨운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배려심이 부족한 편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먼저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소통의 강으로 이해의 배가 하느님께로 갈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었습니다. 천사 미카엘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알몸으로 교회 옆에 떨어진 미카엘은 자신을 돌봐준 가난한 구두 수선공과 그의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만하고 교만한 부자가 통가죽을 가져와서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미카엘은 죽은 다음에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깜짝 놀라서 장화를 만들지 않는 미카엘에게 왜 슬리퍼를 만드는지 물었습니다. 슬리퍼를 다 만들었을 때 부자의 시종이 와서 장화는 필요 없고 슬리퍼를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미카엘은 미리 만들어 둔 슬리퍼를 주었습니다. 부자의 옆에 죽음의 사신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앞날을 모른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미카엘은 쌍둥이 자매를 위해서 신발을 사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인은 고아가 된 쌍둥이를 돌보았습니다. 한 아이는 다리를 절었지만 그 아이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미카엘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23년에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면 좋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일로 미리 걱정하기 보다는 오늘 주어진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톨스토이가 이야기하기 전에 성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톨스토이는 3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지나간 과거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2023년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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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행복은 전염된다고 합니다. 이는 실제로 많은 학자의 연구 조사로 밝혀진 결과입니다. 이 행복은 반드시 접촉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행복이 있으면 전파되어 행복 지수를 높여줍니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자신이 행복하면 내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5%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가 행복하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0%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어떻게 될까요? 0%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6%나 증가한다고 합니다.
결국 나의 행복을 나와 직접적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전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가까운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맞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며 예수님과의 만남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자기 생각을 이렇게 쉽게 바꿀 수 있을까요?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요?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곧바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神性)이 전달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막고,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 역시 변화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집중한다면 분명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변화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그 행복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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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자신보다 하느님의 선물을 더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악이다(십자가의 성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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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형제애의 실천
-주님께 인도하는 사랑-
“주님은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주님의 진실하심, 세세에미치리라.”(시편100,5)
예전 10대말, 고등학교 시절 바둑을 좋아할 때 말그대로 침식(寢食)을 잊을 때가 많았습니다. 음식을 좋아하는 이를 미식가(美食家)라 한다면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를 미독가(美讀家)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저는 미식가는 전혀 아니지만 미독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전주 이씨, 세종대왕의 후손답게 침식을 잊을 정도의 독서 애호가이기 때문입니다. 흡사 책읽을 때는 배고팠을 때 게걸린 듯 밥을 먹듯이 좋은 책을 읽을 때는 지금도 역시 배고팠을 때 음식을 먹듯 책들도 여러 권을 동시에 펼쳐놓고 전투하듯이 읽습니다.
지금도 좋은 책만 보면 행복해지고 침식을 잊을 정도이지만 기도와 미사, 강론보다 엄중한 것은 없기에 절대로 독서나 그 무엇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바둑은 수도생활과 시간상 너무 아니기에 끊은지 오래지만 여전히 좋아하여 때로 애기가(愛棋家)로서 명국(名局)은 틈틈이 감상하곤 합니다. 아마 저의 기력은 아마 5단은 될 것입니다.
요즘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인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진리의 협력자이기 때문입니다. 87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얼마나 베네딕도 교황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무수한 강론 글들을 보며 절절히 깨닫습니다. 어제도 미구에 있을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대한 이탈리아판 출간 소식을 듣고 원장에게 영문으로 출간되면 주문해달라 부탁했고 흔쾌히 약속했습니다.
미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문판 서문을 읽었는데 정말 핵심을 꿰뚫는 명쾌한 내용의 명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베네딕도 교황의 신학에 정통한 프란치스코 교황인지! 그분의 엄청난 기억력과 총명함에 감탄했습니다. 95세로 선종하기 까지 베네딕도 교황의 의식도 매우 명료하고 투명했다 합니다.
곧 출간될 책 베네딕도 교황의 전기 영문판 제목부터 마음 설레게 합니다. “God is Always New”(하느님은 언제나 지금이시다), 얼마나 멋집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문은 구구절절 감동의 명문이지만 몇구절만 인용하여 나눕니다.
“베네딕도 16세는 무릎을 꿇고 기도중에 신학을 한 분이시다(Benedict did theology on his knees in prayer)”
“하느님은 사랑의 한 사건이다(God is an event of love)”
“지상에서 사랑아닌 그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What on earth could save us if not love?)”
“성서와 교회 교부들에 바탕한 요셉 라칭거 사고의 깊이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여전히 도움이 된다(The depth of Joseph Razinger’s thought, based on Holy Scripture and Church Fathers is still helpful us today)”
“온교회가 그분께 영원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The whole Church will be forever grateful to him)”
“우리에게 베네딕도16세 교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하자(Let us thank God for having given us Pope Benedict)”
내용이 너무 감동스러워 독수리 타법으로 조각하듯 영문을 병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통해 우리를 예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니 이게 진정 형제애의 실천입니다. 최고의 형제애는 형제자매들을 더욱 예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사랑입니다. 어제 저는 자매들의 격려 글을 받고 감사했습니다. 과찬의 메시지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대로 인용합니다.
“베네딕도 교황님의 영적유언을 보면서 신부님 생각이 났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주시는 신부님 역시 교황님에 손색이 없으시니 존경하고 기도합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신부님, 저희에겐 신부님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축복이지요! 신부님께서도 지금까지의 삶은 예수님의 얼굴을 찾으셨지요! 신부님 사랑합니다.”
새삼 형제자매들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으로 이끄는 것이 진짜 형제애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하느님 사랑의 갈망이, 염원이 잠재해 있습니다. 참평화, 참기쁨, 참행복도 이런 하느님 사랑에 있기 때문이요, 이런 행복은 사람 누구나의 근원적 소망입니다. 정말 하느님 사랑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요한 사도의 말씀 역시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대로 죽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이처럼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요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은 예수님 사랑에서 나옵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형제 사랑에 투신하게 됩니다. 성인들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할 일은 형제들을 주님께로 안내하는,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요한 세례자는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를 예수님께, 또 안드레아는 자기의 형 시몬을 예수님께,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을 직접 부르셨지만 필립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나타나엘 역시 단순하고 순수하지만 녹녹치 않습니다. 전개되는 대화를 보십시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타나엘은 물론 그 누구도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성된 편견에서 벗어나기는 참 힘들 것입니다.
“와서 보시오.”
‘와서’란 말을 보니, 제 강론집 제본소 “와서”란 이름이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착안했다면 참 기막힌 발상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직접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필립이요, 아, 바로 이게 진정 형제애입니다. 이에 본격적 참사람들간의 운명적 만남이 펼쳐집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나타나엘보다 더 나타나엘을 잘 아시는 주님이듯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세상에 예수님 CCTV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눈길을 피해 숨을 곳은 어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참자기를 발견함으로 경악한, 또 감격한 나타나엘의 예수님 고백입니다. 참사람과 참사람의 참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나타나엘의 고백을 통해 자기 신원을 새롭게 확인한 예수님 역시 감격하여 나타나엘에게 놀라운 축복을 예고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새삼 우리의 영적 여정은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관계도 날로 깊어졌을 것이며, 우리 또한 날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관계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발광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성인들처럼 우리는 더욱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 살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선교도, 이웃 형제애의 실천도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예닮의 여정에 충실한 주님의 반사체로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온 세상에,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시편100,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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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을 따르는 사람>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을
따름으로써
그분을
닮는 사람입니다
그분을
닮는 사람은
그분을
만나지 못하여
그분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
그분을
만나게 함으로써
그분을
따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을
따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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