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나들길.,'1 ~20'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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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며.
본섬 강화도 외 석모도와 교동도 그리고 볼음도
등 세 개의 큰 섬과 부속도서를 합해 총 10여개 섬.
현재, 나들길은 강화 본도와 석모도, 교동도, 볼음도 정도.
그러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강화나들길이 생길 수가 있다.
북한이 바라보이는 강화 북쪽은 아직 나들길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강화나들길은 '미완의 길'이다.
민통선 안의 동네를 두루 걸을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강화나들길은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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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대교 근처에 있는 갑곶돈대에서 출발해
초지진까지 가는 총 길이 17km인 '호국돈대길'
강화도가 천헤의 지리적 요충지 임을 잘 보여준다.
강화해협은 강화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바다로
조선시대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수많은 군사 시설물이 만들어졌다.
지금으로 보자면 대대급 규모인 진(鎭)과 보(堡)를
4개씩이나 이곳에 두었고 그 아래 소대급 규모인
돈대(墩臺)도 십여 곳이나 있으며 말하자면
호국돈대길은 나라를 지킨 선조들의
얼을 떠올려 보며 걷는 길이다.
갑곶돈대에서부터 길을 걷기 시작하면
고려시대 몽골침입을 막기 위한 강화외성.
지금은 흙으로 쌓은 성의 흔적이 많이 사라졌다.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성의 자취는
찾아보기가 더 어려워진 곳도 있다.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강화외성의 흔적을 찾다보면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을 져다 나르고 다지며
성을 쌓았을 선조들의 노고가 보이는 듯하다.
바닷가에 난 둑길 위를 걷는다.
햇빛을 받은 갯벌이 번쩍인다.
갯벌 흙을 품은 바다는 마치 모내기를 하려고
써레질을 해놓은 논처럼 진흙탕 색을 띠고 있다.
망둥이를 잡는 걸까, 낚싯대를 던져놓고 물고기가
물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고요하고 한가로운 풍경 속.
우리 또한 한 점의
그림이 되어 걷는다.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염하 길이 24km, 폭은 500~600m.
바다라고 부르기에는 비좁다는 느낌.
그러나, 예전에 뱃길로 서울을 오가자면
반드시 이곳 해협을 거쳐야 했으며 말하자면
강화와 김포 사이의 강화해협 이 비좁은 바다는
조선시대에는 서울로 들어가기 위한 대문과 같았다.
바다라고 하지만 강처럼 보여서
처음 보는 이들은 만만하게 여긴다.
"애걔, 무슨 바다가 이렇게 좁아?"
"여긴 헤엄쳐서 건널 수도 있겠다."
어떤 이들은 '강 이름이 뭐냐'고
하면서 강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염하(鹽河)는 언제 어디서 온 이름일까?'
지도 상에는 '강화해협'이라고 나와 있지만
대부분 "염하(鹽河)"라고 부르는 이곳의 지명.
강화해협을 따라 가는 호국돈대길을 걷다가 문득
옛 강화 사람들은 이 바다를 어떻게 불렀는지 궁금.
그래서, 강화읍 출신이라는 강화 주민에게 물어본다.
"우리 어릴 때는 그냥 갑고지 앞 바다라고 불렀어요."
갑고지는 갑곶을 뜻하는 말이다.
갑곶은 강화에서 서울로 오갈 때
이용하던 갑곶나루가 있던 곳이니
'갑고지 앞 바다'는 곧 갑곶 앞바다.
강화해협 중간 지점
불은면이 고향인 원주민
'터진개 앞 바다'라 불렀단다.
터진개는 광성보 인근에 있는 지명인데
들판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터진개 앞 바다라고 불렀는가 보다.
길상면 주민들은., '초지 앞 바다'.
바다 근처 동네가 '초지리'이기도 하고
또 초지진이 있으니 그렇게 불렀던듯 하다.
이처럼 강화 동쪽 바다인 이 강화해협은
근처의 동네 이름을 따서., '무슨 앞 바다'
해협이란 육지와 육지 사이에 끼여 있는
좁고 긴 바다를 뜻하는 말이니.,강화해협.
김포와 강화 사이의 이 바다도 해협이 분명.
학술 저서와 교과서 등에는 '강화해협'이라지만,
일반인들은 "염하"라고 흔히 부르는 역사의 아픔.
천주교가 조선에 전해진 뒤 천주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조선시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임금보다 천주(하느님)를
더 높이 받드는 천주교인들을 조선 조정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또 서양 세력이 조선을 넘보는 것은
천주교인들이 서양 오랑캐들과 내통.
그래서, 그들을 찾아내어 처벌했던 것.
1866년(병인년) 3월에 조선에서 몰래 포교활동 하던
프랑스 주교와 신부 12명 중 아홉 명이 사형을 당했다.
조선과 통상 기회를 엿보던 프랑스는 이것을 빌미로 침공.
병인년 봄에 병인박해는 양인들의 난리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으니 그해 가을에 병인양요가 바로 그것.
간신히 목숨을 건져 중국으로 탈출한 3명의 선교사들로부터
이 사실을 들은 프랑스 정부는 중국 해안에 있던 극동 함대의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조선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한다.
로즈 제독은 공격하기에 앞서 정확한 뱃길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서해안과 한강의
뱃길정찰, 조선군 해안 방어시설과 수비체계를 알아낼
목적으로 1866년 9월 18일에 세 척의 군함을 출항시켰다.
앙리 쥐베르(Henri Zuber) 프랑스 해군 견습 소위도
이때 조선원정대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1873년에
<르 투르뒤몽드>라는 잡지에 '쥐베르의 조선원정기'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강화해협의 모습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강화도에 속하는 서안(西岸)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총안을 낸 성벽으로 보강되어 있고
성벽 따라 고지 위에 축조한 요새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 통로를 뚫고 진입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았다. 실제로
나중에 우리가 강화도에 들어가서 그 섬에
수많은 요새들과 화약고들과 무기고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이 통로가 조선 군사(軍史)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9월 18일에 출항한 프랑스 군함은 강화해협에서
조선군의 저항이 있었으나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우수한 화력으로 조선군을 제압후 한강 뱃길을 조사하면서
행주 나루를 지나 지금의 양천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조선은 프랑스함대를 막으려 많은 배를 염창으로 보내 한강을 막았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신식 무기를 당할 재간이 없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함대는 대포로 조선수군을 제압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양화진을 거쳐서
25일에는 한양 서강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상 처음으로 극동에서 세 번째 가는 나라의
수도 앞에 정박했다면서 쥐베르는 자랑을 한다.
그들은 한강을 따라 다시 내려오면서도
계속 수로측량, 자연물을 관찰하여 수집.
프랑스군은 수도인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해협과 한강의 해도를 작성했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군이 작성한 해도(海圖)에는
강화와 김포 사이의 바다가 "Rivière Salèe".
salèe는 '짠, 짭짤한, 염분이 있는'의 뜻을 가진 말
Rivière는 하천(河川)이니 강화해협을 소금기 많은 강.
프랑스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작성한 해도에 표기된
'Rivière Salèe'가 그후 강화해협을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1년 뒤인 1867년에 일본 해군성은 프랑스에서 이 해도를 입수.
일본어로 번역하여 다시 펴냈는데 이때 "River Salèe"를 '염하'.
'고려서안 염하지도(高麗西岸 鹽河地圖)'라고 제목을 붙였던 것.
그로부터 4년 뒤인 1871년 신미년에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과
개항을 목적으로 쳐들어왔던 미 해군도
프랑스 해도의 원본을 편집한 해도를
가지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조선시대 한자로 '甲串津 前洋(갑곶진 전양)',
'草芝鎭 前洋(초지진 전양)' 같이 표기를 했다.
'갑곶나루 앞 바다', '초지진 앞 바다'와 같은 말.
'염하'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은
버리고 '강화해협'이라고 부르자.
그러고 보니 강화해협을 따라서 걷는 호국돈대길은
본래 우리 이름인 '강화해협'을 찾는 길일지도 모른다.
2017.6.8/ 인천 강화군(군수 이상복)은 강화나들길 2코스가
‘걷기 여행길’에서 '6월의 길'로 선정됐다고 지난 8일 밝혔다.
강화도는 옛부터 나라를 지켜낸 터전이자
외국의 문화와 물자가 들고 나던 관문이었다.
그만큼 외국과의 교류 및 충돌이 잦았던 곳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광성보는 1871년 4월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함대를 이끌고
침공때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
초지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광성보 백병전
강화나들길 2코스에는 항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갑곶돈대, 광성보 등 진과 보, 돈대가 유독 많이 남아있다.
‘호국돈대길’은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길이지만 풍경만은
전국의 여느 코스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
강화나들길 2코스는 총 17km 둑길로 6시간 소요거리.
유적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와 시원한 바다풍경
고즈넉한 숲길을 걷다 보면, 풀꽃도 아름다워 지루할 틈이 없다.
풀꽃이 해안도로 따라 피어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군 관계자 -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피와 땀이 녹아 있는 강화나들길 2코스를
걸으며 호국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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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포리선착장 바다 건너
석모도가 보이는 해안길 따라
고려 항쟁역사와 근대사를 볼 수 있는
망양돈대 등 자연역사와 문화역사 나들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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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나들길 11 코스 - 석모도 바람길
강화도 고려산
강화도 장하리 낙조마을
강화나들길 2코스., 더러미 장어마을
더리미
포구
분오마을
2018년 행정자치부 공모사업에 어촌체험 및 탐조를
테마로 한 화도면 사기리 분오마을 선정 3년간 25억원을
지원받게 됐다고 인천 강화군(군수 이상복)은 6월 13일 밝혔다.
2018년도 올해의 관광도시 개최를 앞둔 강화군은
이번 공모사업을 통해 기존 역사‧문화 관광과 더불어
생태관광을 강화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는다는 방침.
강화군은 분오마을 분오선착장이 탐조 특화 마을로 최적인 이유를
넓은 갯벌과 분오저수지, 저어새 번식지인 각시바위, 선두리 석축 등
철새 서식과 휴식에 필요한 안정적 공간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라 밝혔다.
강화군은 풍부한 바다어족자원과 국내 유일의 대형 하구 갯벌에
칠게, 도요물떼새, 두루미, 저어새 생물종이 서식하는 생태 지역.
계절별 다양한 종류의 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탐조관광의 최적지.
분오마을은 강화군 남단갯벌 80%(48㎢)인 농어촌.
마니산 중심으로 서해 바다와 드넓은 갯벌이 있고,
동막해수욕장, 분오돈대, 각시암, 함허동천, 정수사,
마니산 등 다양한 주요 관광지가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 공모사업을 통해 인천공항 환승객을 유혹할
탐조투어 및 생태관광 네트워크, 철새 테마파크 등
사계절 탐조관광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탐조 마을이
강화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할 것" - 강화군 관계자.
8코스 동검도
호국돈대길
겨울 염하
구 강화대교
카돌릭 갑곤돈대 순교지
조선시대 목판화
호국돈대길~강화해협
김포 문수산성
염하 철책길(14km(4시간)
총 191km 길이에서 12코스.
김포 문수산성
1871년 범선
강화해협 유빙
강화나들길 12-13 코스 주문도길 - 볼음도길 24.9km
동막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