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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하강.,평화누리길1코스(철책길)
2015.02.01 염하강.,평화의 길.
2018.02.02 염하강 유빙을 타고.,철책길 여행
2018.02.12 강화도 염하
강화도 염하
마지막 빙하기
빙하기
빙하기 한반도 주변 지형도
지구온난화
북극.,빙하
알래스카.,빙하.
남극.,유빙.
볼음도 갯벌
볼음도
강화군 서도면 3섬을 연결하는 연도교 건설.
인천 강화군은 서도면 주문도·아차도·볼음도를
연결하는 서도 연도교 사업은 사업비 700억원을
들여 1.6㎞ 해상 교량 건설계획(2023년 개통 목표).
단군조선(檀君紀元) 또는 단기(檀紀)는 한민족 역사.
단군의 고조선 건국연대 기준으로 하는 상징적인 기년.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기원전 2333년이 단기 1년이다.
서기 2017년은
단기 4350년이다
서력 기원 + 2333년.
단기는 전설에 따른 것으로
전근대 한민족의 조상들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긍심.
오늘날에도 한민족의 상징적·
신화적인 기년으로 인정된다.
지구 상에서 '간만의 차'가
가장 극심한.,강화해협 염하.
..........강화해협(江華海峽).........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해협.,이를 염하(鹽河)라 부른다.
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 차가 커서 물살이 빠르다.
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
간조와 만조에 따라 달라지는
해수면 높이의 차이.,"간만의 차"
조차(潮差), 간만의 차(tidal range)
썰물이 빠져나가 해변 해수면이 가장 낮아진 상태.,"간조"
밀물이 가장 높은 해면까지 꽉 차게 들어온 상태를.,"만조"
'간조와 만조 차이'를 "간만의 차" "조수 간만의 차"라 한다.
간조와 만조는 지구와 달, 태양
그 사이의 인력에 의해 발생한다.
하루 2회씩 일어나는 반일주조
하루 1회씩 일어나는 일주조.
이는 달과 태양의 위치 외에도 지구의 자전,
각 해안선 모양, 위도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대체로 해수면이 가장 낮은 간조에서
높은 지점으로 올라가는데 6시간 소요.
다시 약 6시간 동안 서서히 빠져 나간다.
간조 때 드러나는 해저지형을 "갯벌(간석지)"
우리나라 서해안은 간만의 차가 평균 5m 정도.
특히, 강화해협 간만의 차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
교동도.,유빙.
칼바람 부는.,석모도
석모수로.,유빙
석모도 석포선착장 앞바다.,유빙.
2011.2.5 입춘 다음날 동막해수욕장.,유빙.
강화해협 썰물이 빚어낸.,유빙.
강 江
빛날 華
섬 島
강화도(江華島)는 섬이지만
어업보다는 농업이 발달했다.
농사짓는 집이 9000가구 넘는데
물일하는 집은 300가구도 안된다.
옛부터 전략적 요충지여서 식량확보가 중요하였기에
많은 평지가 고려시대 이후에 간척과 매립으로 생겼다.
강화군에는 역사 유적이 많다.
고인돌부터 시작해서 하도 많아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운다.
개성이 건너다 보이는 곳에는 고려 궁궐터가 있다.
몽고와 싸우기 위해 39년간 수도를 옮겼던 흔적이다.
갑곶돈대
갑곶돈대
갑곶돈대
강화도 동부해안에 4대 전쟁 역사 유적지.
갑곶돈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이 있다.
역사의 고비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곳.
신미양요 격전지 광성보에는
당시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과
장수 어재연을 기리는 쌍충비각.
병인양요 격전지 정족산성(길이 2300m)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막아냈던 요새.
인근 전등사는 고구려 때 세워진 고찰이다.
강화읍 관청길에 있는 강화성당은 한옥성당.
동막해변과 민머루해변의 일몰은 동양화 같다.
아이들과 조개, 낙지를 잡으며 갯벌체험까지 할 수 있다.
장어요리와 밴댕이회·무침, 단호박 넣은 꽃게탕 등 맛기행.
가끔은 7㎏이 넘는 민어가 강화 앞바다에서 잡히기도 한다.
강화해협 염하(鹽河)
.
.
...............손돌목(孫乭項)..........................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
강화해협 지형 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데
대안(對岸)의 강화도 광성보(廣城堡)가 있는 곳 또한
바다로 돌출해 있어 두 지역 사이가 좁은 여울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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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대명포구 ~ 갑곶나루' 여울.,손돌목.
옛부터 '김포 대곶 ~강화도 갑곶'을 잇는 뱃길.
그러나, 손돌목 급류로 인해 사고가 잦았던.,여울.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 갑곶이라는 명칭은
고려 고종이 몽골군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할 때
이곳이 육지와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이 별로 없이 갯벌만 있었으나
1419년(세종 1년)에 박신(朴信)이 사재(私財)를 털어
양쪽 언덕에 석축로를 만들어 주민 통행의 편의를 도모.
그뒤 이곳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건넜던 사실이 있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봉림대군이 수비(守備)를 하였던 곳.
1866년 병인양요 때에도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렀던 역사적 현장.
이 석축로는 1900년대까지
강화도와 육지를 오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통행시설로 이용되었던 갑곶나루.
1920년 성동리와 강화군 용정리 사이에 나루터 신설.
옛 나루터는 폐쇄되었고 1945년 8.15 광복 후 나루터 부근에
자동차를 나르는 도선장이 생겨 이용되다가 1970년 강화대교 건설.
그후로 강화도의 두 나루터는 모두 폐쇄되었고
주변 제방공사로 원래 시설들도 상당부분 없어졌다
김포 대명포구.
........................김포 대명포구......................
서울에서 가까운 김포 대명항은 서해에 작은 포구.
강화해협을 사이로 강화도와 마주보는 곳에 있으며
김포시에서는 유일한 포구. 원래는 대명나루 대명포구.
2000년 2종 어항으로 승격하면서
'대명항'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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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대명포구 선주들이 소유한 어선들.
그 어선들이 어물을 팔던 곳에 시장이 형성.
대명나루, 대명포구 대명항으로 차츰 발전한 것.
그래서, 대명항은
항구라고 하기에는
약간 규모가 작은 항.
.
김포 대명항 어시장.
평화누리길 1코스.,염하 철책길.
북녁 땅이 바라보이는.,애기봉.
애기봉에서 바라본 한강하류.,북녁 땅.
김포 애기봉.,라이딩.
김포시 애기봉 평화공원 조감도.
김포시 애기봉은 서울에서 가깝고 인근 함상공원과
역사의 현장 덕포진과 덕포진교육박물관, 약암온천
등이 있어 주말에는 크게 붐비는 곳이다.(주차 무료).
손돌목 뱃길을 지키는.,강화도 용두돈대.
손돌목 뱃길을 지키는 용두돈대
강화포구
강화해협은 강화군과 김포시 사이 염하(鹽河).
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 차이가 커서 물살이 빠르며 이 해협을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가 있다.
김포 대명포구 ~ 손돌목 ~ 강화포구.
조선시대 주로 썰물 때 뱃길이 열렸다.
밀물 때 손돌목에서 소용돌이치는 해류가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 다니기 어렵던 곳.
손돌 지명은 이곳 뱃사공 이름에서 나왔는데
손돌목에 관한 전설은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매년 11월(음 10월 20일경)에 부는 손돌풍.
........................손돌풍(孫乭風)., 전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 쪽으로 몰자 위험을 느낀 왕이 의심해
그를 죽이려 하자 손돌은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다 한다.
"제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띠워
그 바가지가 흘러 가는대로 배를 몬다면
배는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 - 손돌.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넌후 왕은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
음 10월 20일경 이때는 겨울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혹한이 본격 시작되는 이때의 바람이 손돌풍(孫乭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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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광성보에서 바라본 손돌목과 덕포진,
그리고 손돌의 묘, 다른 곳에 비해 해협이 비좁다.
인조 5년(1627) 후금 침공때
왕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
..........................손돌목 뱃사공 전설.......................
'손돌'이 안내를 맡았다는데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로 뒤집힐 것 같은 배는 인조를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히 노를 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 가운데로 배를 몰았다.
인조는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였다. 손돌은 죽기 전에 말했다.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만
배를 몰면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이 죽고 나서 다른 뱃사공을 시켜
배를 몰게 하였는데, 배가 나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손돌이 시킨대로 바가지를 띄웠다.
그리고, 그 바가지를 따라가도록 하였더니,
배가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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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에는 큰 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강화주민들은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부른다.
손돌목 강화나루 건너편에는 김포.,대명나루.
조선시대 강화와 김포를 이어주는 유일한.,뱃길.
월곶면 성동리에 문수산성(사적 제139호),
대곶면 신안리에 덕포진(사적 제292호) 포대.
조선시대 대명나루 뱃길을 지키는 관문이었다.
문수사풍담대사부도(文殊寺楓潭大師浮屠) 및 비.
통진면 고정리에 고정리지석묘(경기도 기념물 제91호),
풍무동에 조선 인조 부모 원종과 인헌왕후 능묘.,장릉(章陵)
,
유교문화재로 감정동에 우저서원(牛渚書院)·
조헌선생유허추모비 그리고 김포향교,·통진향교.
문수사·금정사·용화사·광은사·약천사·계향사·묘각사.
전설이 깃든 손돌묘는 대곶면 신안리.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손돌제를 지낸다.
월곶면에는 김포의 금강이라 불리는 문수산.
이곳에 문수산성과 신라시대에 창건된 문수사.
하성면 가금리에 있는 애기봉은 현재 군주둔지역.
성탄절에 점화행사, 문수산성과 함께 안보사적지.
장릉은 사시사철 소풍지로 인기 좋은 명승지.
천연기념물인 재두루미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대곶면 대명리 대명나루.
'김포~ 강화' 중요한 나루.
현재 강화군 초지나루 간 배가 왕래하는데
주말이면,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2000년대까지 경기도 서해안지역 임해관광지 4개권.
개발의 하나로 강화권 안보관광단지와 연계·개발된다.
특히, 약암온천 주변이 온천휴양단지로,
문수산성 일대가 안보관광지로 조성 계획.
.......................김포 연혁....................................
옛 김포군은 백제(고구려로 기록한 곳도 있음)의 금포현.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 김포현., 장제군(부평) 영현.
1018년(고려 현종 9)에 수주(부평)의 속현.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하고,
1198년에 왕의 태를 묻었다 하여 현으로 승격했다.
조선 초 군현제 개편 때 양천현을 병합., 금양현.
부평에 병합, 1416년(태종 16) 현으로 복구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능인
장릉을 양주로부터 이장함에 따라 군으로 승격되었다.
옛 김포군 별호는 금릉이었다.
한강하류 김포와 통진 지역은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의 관문.
김포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
조운사고가 잦았던 강화 손돌목을 지나지 않고
김포평야를 가로질러 아라뱃길 20km 연결 시도.
'고려~조선'시대 운하 굴착흔적.,고촌면 굴포천.
두 지역은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군이 되었고,
1896년 경기도. 1914년 통진군. 양천군이 김포군에 병합.
이때 옛 김포군 군내면·석한면·고현내면을 통합
만든 군내면이 1934년에 김포면으로 개칭되었다.
1975년 이후 서울 시내버스가 연장 운행되면서
서울 통근권으로 성장하면서 1979년 읍으로 승격.
옛 양천군(양동면·양서면)이 1963년에 서울로 이관.
1973년 부천군 폐지되어 오정면·계양면을 편입.
1975년에 오정면은 다시 부천시로 옮겨 갔으며,
1989년 계양면은 인천직할시 북구로 편입되었다.
1983년 양촌·월곶·대곶면 일부를 통합, 통진면을 신설.
1995년 인천시에 인접한 검단면이 인천광역시에 편입.
1998년 김포시로 승격되면서 김포읍이 폐지되고 행정동
김포1, 2,3동으로 분할. 2004년 통진면이 통진읍으로 승격.
..............................................................................
조선시대 강화해협은 위치 상으로 한반도 중심.
1866년 10월 15일 강화부성(江華府城)을 점령한
프랑스군이 처음 상륙한 곳이 강화해협 갑곶나루.
.........................갑곶.............................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 갑곶이라는 명칭은
고려고종이 몽고군 침입 당시 강화도로 피난할 때
이곳이 육지와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이 없이 갯벌만 있었으나
1419년(세종 1년)박신(朴信)이 사재(私財)를 털어
양쪽 언덕에 돌을 모아 석축로를 만들어서
주민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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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이곳은 1627년 정묘호란때 인조가 건넜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이 수비를 하였던 곳.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격전을 치렀던 현장.
이 석축로는 1900년대까지 강화도와 육지를 오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통행시설로 이용되었으나 1920년경에
성동리와 강화군 용정리 사이에 나루터 신설로 옛나루터 폐쇄.
1945년 광복 후 나루터 부근에 자동차 도선장이 생겨 이용.
1970년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두 나루터 모두 폐쇄되었고
주변 제방공사로 원래 시설들도 상당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
특히, 갑곶나루와 대안인 문수산 일대는
프랑스군이 강화해협 지형까지 자세히 묘사.
당시 프랑스군 지도가 오늘날 항공사진과 일치.
.
1875년 일본이 운양호 사건을 일으키고
결국, 군대를 상륙시킨 곳 또한.,갑곶나루
프랑스군이 조선 침공 때 지도를 갖고 침략.
프랑스나 일본이
조선침략 시발점으로
삼았던., 강화해협 염하.
...........................강화지맥..........................
강화도는 남북 28 km, 동서 16 km, 면적 302.14 ㎢.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국내 4번째 큰 섬이다.
강화도는 원래, 강화도(江華島)와
마니산 중심으로 한 고가도(古加島)
2개 섬이었으나 고려시대 이후 꾸준한
간척사업으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한다.
강화도는 태초에는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오랜 침식작용에 의하여 구릉성 섬으로 분리 되었다가
염하가 김포와 강화도 사이에 해협을 이루며 섬이 된 것.
...........................................................................
마니산
.
강화도에 해발 400m 이상인 산으로는., 마니산(469m),
혈구산(460m), 진강산(441m), 고려산(436m), 별립산 등.
강화지맥 최고봉 혈구산은
한반의 중심지에 위치한 지점
혈구산~백두산 정상까지 499km,
혈구산~한라산까지 486km의 거리.
강화지맥은 대간, 정맥 등 지맥(枝脈)이 아닌
단순히 강화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산줄기이다.
'강화도 최북단' 양사면 철산리 북장관돈대에서 시작
제적봉(115m), 별악봉(130m), 저담산(167m), 성덕산(215m),
봉천산(291m), 시루메산(250m), 고려산(436m), 혈구산(460m),
퇴미산(339m), 덕정산(320m)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한 정족산(220m),
길상산(336m), '강화도 최남단' 길상면 장흥리 택리나루터.,총 34.1km.
또 덕정산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한., 진강산, 마니산,
분오리둔대, 강화만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도 있다.
^ 강화해협(염하)
함초
.................강화만...............
강화만은 한강하류 강화도 주변
크게는 경기만의 일부에 속한다.
만 안에는 강화도·교동도·장봉도 섬들이 있다.
조차가 커서 인천 앞바다의 경우 9m에 이른다.
수심이 얕아 썰물 때는 넓은 간석지가 펼쳐진다.
...............................................................
예로부터 만 연안과 주위 도서지방은 강수량이 적고
일조시수가 많은 것을 이용하여 염전업이 활발했으나,
강화만 일대는 최근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연평도 조기잡이 중심 주변 해역에서는
새우·삼치·도미 등이 비교적 많이 잡힌다.
6·25전쟁 전까지 물자교역, 운반 및 하역작업이 활발.
한강 하구에 군사분계선이 생기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
강화만은 공업지와 신흥택지가 해안 일대에 조성되고 있고,
서울의 외항 항로가 발달하여 해상교통로로서 중요해지고 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쇄국정책(鎖國政策)은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정책
정치·외교·통상에서는 이윤확보, 자기방위, 국제적 고립상태.
외국인의 입국이나 무역을 통제하는 정책을 일컬어 쇄국정책.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사상을., 쇄국주의(鎖國主義).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강한 자세로
구미 열강은 통상 시도를 포기했으며,
일본에서는 정한론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를 위요한 국제 정세는
문호 개방의 필요성과 열강으로부터의
국권 수호라는 상호 모순된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1875년(고종 12년) 운요호사건 폭발.
그 결과 타의에 의해 문호 개방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
조선시대에는 강화해협을 봉쇄하면
'강화만~한강~한양' 수로 진입은 불가.
조선의 쇄국정책은 곧, 강화해협 염하 봉쇄.
그러므로, 조선시대 강화해협 염하(鹽河)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자.,최후의 보루였다.
삼국시대부터 강화해협은., 전술 전략적인 요충지.
강화해협에는 어떠한 군사시설물들이 있는걸까?
^ 강화해협(염하)
한강 하구 & 강화해협.
강화해협.,썰물.
강화해협(염하 : 鹽河)
정족산성(삼량성)
.................강화 삼량성(三郞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130호. 둘레 약 1㎞. 245,997㎡ 축성연대 미상.
단군의 3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 한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성벽은 거친 할석으로 축조되어 있다.
1259년(고종 46)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고종은 왕업을 연장하기 위해 성안에 가궐을 지었다.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1660년(현종 1) 삼랑성 안에 새 사고를 짓고 옮겨놓았다.
이를 정족산사고라 한다.
1739년(영조 15) 중수하면서
남문에 건립한 문루가.,종해루.
1764년 다시금 성을 중수했다.
1866년(고종 3) 양헌수 장군 승전지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친 병인양요 승첩지.
정족산성 성안에는 양헌수의 승전비가 있다.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종해루를 세웠다.
.................................................................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鼎足山)에 위치한 산성.
고려∼조선시대 수도 개경과 한양 외곽방어 중요한 관방시설.
흔히 “강도(江都)는 서울의 목구멍이고, 정족은 강도의 두뇌”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 대문과 함께 복원된 남문이 있고, 4곳 치(雉)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문은 막돌로 문 기둥을 쌓고
그위에 벽돌 아치를 올린 모습이며, 서문도 아치식 모습이다.
성 안에는 고려시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등사(傳燈寺).
절 주변에 1259년(고종 46) 지었다고 하는 고려가궐(高麗假闕)터.
1264년(원종 5) 불사(佛事)가 설행되어 원종이 행차하였다고 전한다.
전등사
그뒤 1660년(현종 1)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마니산사고가
정족산성 안으로 옮겨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는데,
이 때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도 함께 건립.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김포시.......................
경기도 북서부에 있는.,김포시(金浦市)
시의 3면이 한강 하구부와 염하, 강화만으로
둘러쌓여 있어 곡창지대 김포반도를 이루고 있다.
하천의 퇴적작용으로 비옥한 김포평야를 이룬다.
일대에서 생산되는 경기미는 우수한 품질로 유명하다.
문수산성· 문수사· 김포향교· 통진향교 등 유적지가 있다.
장릉은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도래지
경기도 북부 면적 276.606㎢, 인구 353,494
..........................................................
^ 문수산
한성백제의 관문.,문수산성.
.................김포 문수산성(文殊山城)..........................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산성.
사적 제139호. 둘레 약 2,400m, 면적 약 208㎢. 김포시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의 험준한 산줄기에서 해안지대까지 연결.
강화의 갑곶진과 마주보면서 강화도 입구를 지키던 산성.
1694년(숙종 20)에 쌓고, 1812년(순조 12)에 대규모로 중수.
산성 안에 '문수사' 절이 있어, 문수산성 이름이 유래되었다.
성벽은 다듬은 돌로 튼튼하게 쌓았고,
그 위에 성가퀴[女墻:낮은 담]를 둘렀다.
성문은 취예루·공해루 등 3 문루와 3개 암문.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했던 문.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침입했던 격전지.
이때 전투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어 없어졌고
지금은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이 남았다가 151년 만에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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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성 장대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면적 25.7㎡ 규모로 복원된 것.
문수산성 장대는 문수산의 동쪽 최정상(376.1m)에 위치.
서해, 강화, 파주, 서울, 김포, 인천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한양 도성으로 향하는 '해로 입구의 전초적 방어기지'였다.
문수산성
김포 문수산성
김포 문수산성 남문 밖.,산성마을
김포 평화누리길 1구간
................김포반도................
김포시는 경기도 북서부에 있는 시.
시의 3면이 한강 하구부와 염하, 강화만.
김포는 삼면(三面)이 물길로 둘러쌓인 김포반도.
하천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비옥한 김포평야를 이룬다.
일대에서 생산되는 경기미는 우수한 품질로 유명.
문수산성·문수사·김포향교·통진향교 등 문화유적지.
장릉은 천연기념물 재두루미 도래지. 면적 276.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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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북단에서 바라본., 한강하구.
북한 주민이 가끔 한강 하구로 귀순.
김포시에서 마주 바라보이는.,북한 땅.
'문수산성~김포 갑곶진~파주' 평화누리 길 2코스.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성 남문~애기봉'.,조강철책길.
조강(祖江)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부터
서해안으로 흐르다가 유도를 지나 예성강 지나 서해.
즉 김포반도 북단과 북한 개풍군 사이를 흐르는게 조강
강화도.,강화산성
강화산성 & 북장대
강화해협(염하)
겨울 염하(鹽河)
......................강화해협......................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경기도 김포시 사이의
강화해협(江華海峽)은 염화(鹽河)라고도 한다.
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사이의
해수면 높이차가 커서 물살이 빠르다.
강화대교와 강화초지대교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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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가을 진미' 전어
동막해수욕장 야영장.
1871년 신미양요 사진.
당시 미국 아시아함대
종군기자 펠리스 비토로
강화 덕진진
....덕진진(德津鎭 ; 사적 제 226호).....
고려시대부터 강화해협 12진보 중 하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진(鎭)
병자호란 뒤 강화도 보호하기 위해 만든 12진보
그중에서 가장 강화해협의 요충지에 있는 진이다.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는 강화해협 가장 강력한 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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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 반월형 돈대. 포대
병인양요(1866)때는 양현수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으며
신미양요(1871)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
이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에 의해 강화도는 점령당했다.
신미양요 덕진진 남장포대
1976년 무너진 성곽과 돈대. 포대 등을 복원하고 대포도 설치.
외적의 침입을 사전에 방지하고 적의 동태를 관찰할 목적으로
해안 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물을 돈대라 한다,
덕진진에 가면 남장포대가 있는데
강화해협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염하 해상에서 적에 노출되지 않은
반월형 천연 요새를 확인할 수 있다.
남장포대
강화나들길.
광성보
신미양요 격전지.,광성보 전투
강화나들길.,광성보.
강화도 정족산길
강화나들길 7코스
장하리 해넘이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