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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 싸워야 한다. 싸우되...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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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싸워야 한다. 싸우되...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싸움의 고수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하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여기에도 이것이 똑같이 적용될까요?
예를 들어, 세상의 불의가 있는데 이 불의에 대해
우리 교회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우리 신앙생활만 충실히 하면
그것이 싸우지 않고도 세상을 이기는 고수의 방법일까요?
오늘 독서도 이와 비슷한 뜻으로 얘기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건가요?
이런 뜻이라면 일제 강점기 우리 한국 교회가 취한 태도와 비슷하고,
지금도 세상의 불의에 대해 침묵하라고 하는 많은 신자의 주장과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교회는 일제의 억압과 만행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동양 평화를 외치며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에게 성사조차 불허했는데
이것은 일제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의에 침묵한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독재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고,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침묵할 것을 독재정권은 강요했고,
일부 신자도 같은 논리로 사회 문제나 불의에 교회가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잘 알아야 할 것은,
교회가 사회 문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면 안 되는 것이지
복음적으로 증거하고 싸우는 것까지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도 세상과 싸우지 않으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와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을 진정 사랑한다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싸웁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이요,
메시아라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둘입니다.
물의 방법과 피의 방법입니다.
박해시대 때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 하는 것과
복음적인 삶으로 신앙을 증거 하는 것 두 가지 방식이 있었듯이
말과 행위로 그러니까 삶으로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물의 방법과,
어린 양처럼 피 흘리고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는 피의 방법 두 가지입니다.
간디가 불의와 싸우지 않은 것이 아니고, 다만 비폭력적으로 싸운 것뿐이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랑하셨기에 싸우셨고, 사랑으로 싸우셨습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의 죄와 싸우셨습니다.
우리도 개인의 죄든 세상의 죄든, 비겁하게 못 본 척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되 감정적 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폭력적으로 싸우지 말고,
이념적 정치적으로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우면 됩니다.
사랑 때문에 싸우고
사랑으로 싸우는 것이 최고수의 싸움임을 한 수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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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주님 세례 장면’ 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세 가지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곧 그분을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마르 1,7)이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요한 1,7)이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요한 1,8)으로 증언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세례 장면’에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마지막 순간에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마감하셨듯이, 공생활의 시작을 죄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시면서 여십니다.
그런데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받으신 것일까?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율법에 순명하여 성전에 봉헌되었듯이, 이제 하느님의 의로운 뜻을 이루기 위해 죄인인 우리와 하나 되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리낌 없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더없이 겸손한 자세로 율법의 모든 의로움을 이루시는 한편, 당신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요한이 베푸는 세례의 정당성을 인정하시고, 또 그 물을 성화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의 세례 안에 성령께서 내려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셨다.”
그런데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마르 1,10)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이처럼, 세례는 당신 아드님의 장엄한 공현입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공적인 축성임과 동시에, 만천하에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확인받는 장엄한 의식입니다. 구원역사의 시작은 이렇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보여 지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장엄한 장면을 통해 연출됩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라는 아버지의 이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역시 세례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사랑받은 존재, 이미 은총을 입은 존재인 까닭입니다.
또한 우리도 ‘당신의 마음에 드는 아들’입니다.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말하듯이, “마음에 드는” 이란 “주님의 종”임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구원의 협조자요, 구원의 도구로 소명을 지닌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를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미 은총을 입었기에 그 사랑과 용서를 베풀며, 우리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에 의탁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할 사명입니다. 그 일을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의 영께서 우리에게서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주님!
제가 당신 마음 안에서 탄생되었으니. 당신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을 옷 입었으니, 당신의 영으로 살게 하소서.
당신 마음 안에서, 당신 사랑의 향기 품게 하소서.
사랑을 입었으니,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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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가정 방문을 하면 신발을 바로 놓아주고 먼지도 털어주고 가끔은 구두약도 발라 윤을 내주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미쳐 단정하게 하지 못한 미안함도 있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예수님 당시 풍습은 주인이 외출을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종이 신발 끈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뒤에 오실 주님을 선포하며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다”(마르1,7)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자기 자신은 감히 예수님 앞에서 종노릇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품위가 높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 는 지극히 겸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한창 인기가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그 인기를 누릴만한데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오실 주님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큰 겸손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나를 추켜세우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그 바보의 몫, 겸손이 모두가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겸손으로 세례자 요한의 뒤에 오신 주님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1). 이는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이사43,4)라는 말과 같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세상이 인간의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사63,19)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에게 내려왔다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활동이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을 택하셨습니다.
가끔 신자들이 나는 추기경님께 세례를 받았네, 어떤 주교님께 세례를 받았네 하면서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한테 세례를 받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오는 은총은 베푸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내려오는 것은 하늘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물론 세례를 주신 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은총을 얻게 되었으니 그분이 영적 은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마운 만큼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에 마음을 더 두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무리에 섞여서 마치 당신 자신도 죄를 고백하여야 할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듯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처지가 되어서 오신 것입니다. 무능력한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할 능력을 지니고 죄인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어둠 속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의 코에 입김을 불어 넣어 숨을 쉬게 하신 생명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겸손의 옷을 입고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성 예로니모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겸손의 그림자를 가진 사람은 많지만, 그 덕을 가진 사람은 적습니다”(성 예로니모).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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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행성’을 읽었습니다. 전작 ‘문명’의 후속작품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인류와 고양이가 새로운 대표를 뽑으면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새로운 대표로 7명의 후보가 등록하고 자신들의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정치인의 대표는 지난 어려움을 자신이 대표로 있는 동안에 해결했으니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군인의 대표는 자신이 군대를 동원해서 지난 어려움을 해결했으니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생명공학자는 바벨 바이러스를 퍼트려 상대방의 소통을 차단했고 어려움을 해결했으니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호모사피엔스의 시대는 지나갔기에 생명공학을 이용해서 새로운 인류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원주민 대표는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류의 탐욕과 발전 때문이라고 하면서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오기 전에 아메리카는 생명이 가득한 풍요로운 땅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종교인 대표는 이런 모든 불행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문학자의 대표는 지구는 포기하고 이제 다른 행성을 찾아가자고 했습니다. 먼저 달에 기지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 태양계를 넘어 새로운 행성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다른 행성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고양이 바스테트는 후보로 등록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이 함께 소통하고 연대하자고 합니다. 인간이 자신만의 욕심과 교만으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면 ‘감염병, 테러, 전쟁’의 악순환은 계속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석유를 무작정 뽑아내면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환경을 오염시키면 기후변화로 가뭄, 태풍,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3의 눈을 통해서 다른 종들에게 나누자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제3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꽃이 피어 향기 가득한 세상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어린아이와 늑대가 손을 잡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어쩌면 소설을 통해서 탐욕의 눈이 아닌, 욕망의 눈이 아닌 겸손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구를 떠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기존의 방법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버팀목’이 있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입니다. 그 버팀목을 얻기 위해서 때로 누군가를 속여야 하고, 양심을 팔아야 하고, 폭력을 사용해야하고, 소중한 것들까지 버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지켜주는, 영원한 생명에로 안내해주는 버팀목이 될 수 없습니다. 가까이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내면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불꽃을 꺼지게 합니다. 아버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아직도 제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십니다. 성인이 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사제들에게는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십니다. 돌아보니 수많은 분들이 제게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분들의 기도와 사랑이 오늘 저를 있게 한 것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야기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분이 오십니다. 온 우주의 버팀목이 되 주시는 분이 오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희생하고, 자신을 봉헌하며 온전히 사랑할 때 참다운 세상이 도래하고, 모든 이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용서와 화해가 진정한 승리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하면, 주님을 믿으면 참된 평화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고, 주님과 함께하면 우리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으며, 주님께 의지하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023년에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해주는 ‘성체성사’와 가까이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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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지를 산책하다가 문득 처음 성지개발을 시작했던 2004년 1월이 생각났습니다. 혼자 와서 성지의 황량함에 참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성당도 없고, 사제관도 없었습니다. 야외에는 나무도 거의 없어서 부족함 그 자체가 갑곶성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봄에 선배 신부님께서 성지가 너무 휑하다면서 벚나무 15주를 가져다주셨습니다. 직접 땅을 파서 심으면서도 이런 척박한 땅에서 과연 나무들이 잘 자랄까 싶었습니다. 이 벚나무를 시작으로 계속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자갈 많은 척박한 땅이라 죽는 나무가 더 많았습니다.
올해가 2023년이니, 벌써 20년이 되어갑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성지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은 변하지 않을까요? 30대의 젊고 열정이 넘쳤던 저 역시 변해서, 게으른 50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 변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다른 이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면서 다른 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부정하고 자기 고집만을 내세웁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당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가득 받고 있었던 요한입니다. 그래서 섬김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을 겸손하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큰 겸손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겸손함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렇게 겸손함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나의 겸손함으로 이웃의 변화,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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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자기를 이기는 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끝없이 배우는 자, 가장 부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할 줄 아는 자,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번 감사하며 사는 자(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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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진리이신 예수님을 잘 증언하는 삶-
-“바위를 굴리려면 있는 힘 힘껏 함께, ‘내 알 바 아니다’는 말은 사회를 어둡고 차갑고 험난하게 한다. 누군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작은 손이나마 내미는 것으로도 세상은 변할 수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50대 넘으면 마음 같은 것 좀 꺾여도 된다. 나이 들어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세상은 아집이나 꼰대짓이라고 한다. 괜한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가슴에 새기지 말고 마음은 꺾고, 허리는 세우는 새해 되시길 바란다.”-
어제 컬럼을 읽던 중 마음에 와 닿은 글입니다. 이 또한 넓게 보면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겠습니다. 요즘 가톨릭 교회는 어제 장례미사를 치른 교황 베네딕도 16세 일화로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한평생 주님을 증언했던 삶에 대한 찬사들입니다.
-“위대한 인간에 위대한 신학자”
“탁월한 겸손의 증거”
“끝까지 주님을 사랑했던, 예수님 얼굴을 찾았던 분”
“우리 시대의 예언자”
“참으로 놀라운 사람”
“복음 안에 푹 젖어 살았던 신학자”
“교리에 있어 위대한 거장”
“베네딕도, 이제 당신의 기쁨이 완성되었습니다!”-
어제 미구에 출간될 신선했던 책 제목 “God is Always New(하느님은 언제나 새롭다)”를 순간 ‘New’를 ‘Now’로 착각하여, “God is Always Now(하느님은 언제나 지금이시다)’ 오역했던 것이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 하느님은 언제나 ‘새로움’의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 역시,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겠습니다.
오랫동안 지근 거리에서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도와드렸던 겐스바인 비서 대주교와의 인터뷰중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베네딕도 교황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진리의 협력자’가 그분의 모토다. 진리는 생각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의 인격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자렛의 예수 안에서 육화되셨다. 이것이 그분의 메시지다. 그러니 진리는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것이 그분의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짐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의 모든 짐을 날라다 주는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기쁨을 준다.”
참으로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이신 주님을 증언하는데 전생애를 바친, 평생 예수님의 얼굴을 찾은 베네딕도 교황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히 주님을 증언하고 예수님도 이에 화답하듯 겸손히 하느님을 증언하며, 하느님도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요한 세례자의 주님을 증언하는,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어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요한에게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증언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에 감격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친히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증언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어떻게 주님을 증언해야 할까요? 예닮의 여정을 살면서 진리이신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믿는 사람입니다. 물과 피로써 오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은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증언하십니다. 바로 물과 성령의 ‘세례성사’로, 피의 ‘성체성사’로 당신 아드님을 증언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은 증언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신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세례성사와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된 우리들이요 바로 이것이 주님을 증언하는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참으로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닮의 여정’중에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일 때, 발광체發光體 주님을 날로 환하게 잘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로서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겸손히, 항구히, 사랑이자 진리이신 주님을 잘 증언하는 삶을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을 믿는 저희를 인자로이 비추시고, 주님 영광의 찬란한 빛으로 저희를 밝히시어, 저희가 구세주를 올바로 알아보고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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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6.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하늘에서
땅으로
그분 오시어
하늘과 땅
그 사이에
그분 계시니
하늘은 땅으로
땅은 하늘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하늘이 되어
그분 안에서
하늘도 땅도
오롯이 하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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