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 한 길
가정 형편을 고려해 선택한 육사 입학이었지만, 학과·체육·훈육·군사훈련·내무생활 등의 면에서 야전 즉응의 정예간부를 양성하는 육사교육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겨우 턱걸이로 졸업하고 부임한 야전생활은 더욱 험난했고, 더군다나 소대장을 마치자마자 차출된, 몸으로 떼우는 공수부대 근무는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낙하를 하다가 생명줄이 목에 감기는 위험천만한 사고가 있었다. 이어서 정찰을 나가 선두에서 지대원을 이끌다가 넘어져 나뭇꾼이 낫으로 밴 예리한 나무에 넘어져 허벅지를 다쳐 과다출혈로 야전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병원에서 부대 복귀하자마자 천리행군과 해양훈련이 이어졌다. 천리행군은 그렇다쳐도 동해 바다에 던져놓고 헤엄쳐 나오게 하는 해양훈련은 맥주병 수준인 나에게 사지에 밀어넣는 너무나 가혹한 훈련이었다.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나날이었다. 비상탈출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질식할 것만 같았다. 공수부대에서 전출할 수 있는 방법은 전과(轉科: 병과 변경)를 하는 것인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국방일보에 3사관학교 교수요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와 국어과목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바 있어 국어 교수로 응모하여 1차시험 후 선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일단 공수부대를 떠날 수 있다는 점에 긴 한숨을 쉬었다. 미리 예측한 것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공수부대를 떠난 후 광주민주화 운동이 발발하여 내가 소속된 부대가 광주 진압부대로 출동하여 초급 간부 중에서도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사관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군교수 요원으로 다시 대학 국문학과 3학년으로 학사 편입한 후 다시 석사·박사과정을 밟아야 한다. 군인이 국문학을 전공한다고 하면 조금 의아스럽게 생각하는데, 나의 적성에 딱 맞았다. 이제 내가 갈 길이 결정되었다. 더 이상 곁눈질 할 필요도 없고, 재겨 디딜 곳도 없는 나에게는 ‘오직 이 한 길’이었다. 그런 각오로 공부에 전념하니 전공지식도 쌓이고 창조적 사고와 넓게 보는 시야도 길러지는 것 같았다. 학사과정을 마치고 생도를 가르치면서 1년이 지나자 석사과정에 입학할 기회가 왔다.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배전의 노력을 경주하여 석사학위 취득과 동시에 자비로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특별한 경우였다. 도합 4년동안 관악산 아래에서 공부했지만 재경지역 관광지를 가본 곳이 없다. 두문불출하고 매일 새벽 3시까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둔한 머리를 가지고 준재를 따라가는 방법은 오직 이 길밖에 없었다. 남들은 3년만에 이수하는 박사과정을 무리좀하여 2년만에 수료하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당시 먼 미래를 내다본 것이 아니라 그저 좌고우면없이 당장의 코앞만 보고 달린 것 같다.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목숨을 바치는데, 사관학교 교수를 하면서 그런 교수부장님을 만나 신바람나게 근무했다. 제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고, 칼 교수로 악명이 높았다. 기회가 되어 박사과정 수료 후 4년만에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욕심이 생겼다. 서울대 국문학박사라고 하면 세계 최고의 박사가 아닌가?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면서 가까운 대학에 시간강사로 8년 동안 출강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처럼 의무복무기간인 18년을 채운 다음 해에 고향과 내가 출강해 온 대학에서 내가 전공한 분야의 교수초빙이 있었다. 정성을 다해 자기소개서를 써서 응모서류를 제출했다. 결과 두 곳 모두로부터 채용하겠다는 최종 연락을 받았다. 고민 끝에 내가 8년동안 출강했던 대학을 선택했다.
조교수로 대학 첫 강단에 서면서 육사 출신을 대학교수로 채용해준 재단에 감사드리면서, 정년퇴직 때까지 위교헌신이라는 초심을 잃지 말자고 맹세했다. 제자들을 내 아들딸이라고 생각했고, 남들이 기피하는 힘든 보직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연구와 학술용역에 매진하여 스타 교수의 반열에 오를 수가 있었다. 중요 보직을 하면서 남들처럼 골프채를 들고 필드에 나가는 것이 마뜩치 않아 절제했고, 하는 일보다 많은 1억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 것이 황송하여 21년 동안 재직하면서 5천만원에 가까운 발전기금과 학과 장학금을 출연하였다. 그리고도 건강상 61세에 명예퇴직할 때 명퇴수당 포함 5억원의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 나는 너무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육사 출신으로 나라에서 투자한 만큼 군에 기여도 하지 못하고 퇴직하였다. 야전과 사관학교에서 복무할 때 따뜻한 지휘관과 교수가 되지 못했다. 성격도 원만하지 못하고 젊은 시절 감정의 지배를 많이 받아왔다. 부모님께 효도도 제대로 하지 못한 불효자였다. 주변 사람을 배려하고 살가운 정을 베풀지 못한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대학으로 진출하면서 조금 철이 들어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역지사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실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명석한 두뇌도, 강인한 체력도, 원만한 품성도, 든든한 가정적 배경도 없는 아주 평범한 남자였다. 그런 내가 초급장교 때 장차 내가 걸어갈 ‘오직 이 한 길’을 어렵게 선택하여 좌고우면없이 뚜벅뚜벅 걸어온 결과, 운좋게 따뜻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노년이 된 것 같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야전근무에 잘 적응하지 못해 교수직능을 선택하고 의무연한만 겨우 마치고 전역했으면서, 나의 뒤를 이어 21년째 힘든 군복무를 하고 있는 아들 내외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그리고 어려웠던 신혼시절부터 오늘날까지 근검절약·황혼육아·산장관리 등 부족한 남편을 내조하고 있는 아내에게 “나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소. 남겨진 세월도 함께 갑시다.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라는 조항조의 노래 가사를 따뜻한 목소리로 전해 주고자 한다. (2023. 11. 24.)
첫댓글 갈헌선생,
그누구보다도 근면하고 성실하고 올곧게 더불어 잘 사셨습니다. 존경합니다~
공수부대와 교수직의 인과관계... 처음 듣고 혼자 미소를 지었네요.
고생도 많이 하셨고, 가정 관리도 자식 농사도 잘 경영하셨군요.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것에 감사하는 행복한 노년, 부러운 삶이었습니다.
갈헌은 남다른 이타행을 많이 하니
적선지가필유여경입니다.
어제 고향친목회 송년모임에서 김용숙
교장을 만났더니 갈헌의 훌륭함을 얘
기하면서 언제 시간이 되면 오찬이라
도 하고 싶다고 하던군요
훌륭한분들의 공토점은 언행일치와 이
타행ㆍ겸손ㆍ친절등인데 갈헌은 이
모든것을 갖춘 자랑스런 육사인입니
다
갈헌회장님의 삶에 공감합니다. 죽을 때 웃을 수 있어야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그 자세 유지하시길 바라며 존경합니다.
갈헌이 일찌기 자기 적성이 뭔지 일찍 깨닫고 정진하신 결과입니다. 멍성 모르고 군에 갔고, 적성에 안 맞다하여 공무원이 되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래도 처세에 민감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찾지 못한 아쉬움이 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