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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모두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길을 준비해놓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중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예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영광스런 것이다. 하늘로 옮기어간 ‘에녹’이나,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도, 옥중[감옥]에서 홀로 죽은 ‘침례요한’보다, 더욱 위대하거나 더욱 큰 영광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 29).(YHH 362.2)
많은 사람들은 장래를 위하여, 분명한 계획을 세울 수 없다. 그들의 생애는 불안정하다. 그들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염려와 불안을 갖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애는, 순례자의 생애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장래를 꼴 지어주는 것은, 우리[자신]가 아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YHH 362.3)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생애를 하시는 동안, 그분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셨고, 날마다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계획을 나타내 주셨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생애가 단순히, 그분의 뜻을 이루는 생애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그분께 위탁[믿음의 순종으로 의지]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발길을 인도해 주실 것이다.(YHH 362.4)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빛나는 장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는 중에 완전한 실패를 한다.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시게 하라. 작은 어린아이처럼,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삼상 2:9) 분의 지도를 의지하라.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음부터 끝까지를 볼 수 있고, 그들이 그분과 협력함으로 성취하고 있는 목적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지도받기를 바라게 될 바로, 그 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신다.(YHH 363.1)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따라오도록 부르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어떤 바람직한 전망[미래의 생존]을 제공해 주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유익이나, 세속적[세상적] 명예를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들 역시 어떤 보수를 받겠다는 데 대하여, 계약을 맺지 않았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향하여, 구주께서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눅5:27,28) 좇았다. ‘마태’는 그 봉사의 요청을 수락하기 전에, 그의 종래의 직업에서 받았던 액수와 비등한, 어떤 봉급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질문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는 구주와 함께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였다.(YHH 363.2) 이미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에게, 그분을 따르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들은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렸다.그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생계를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친족들을 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구주의 초청을 받았을 때,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생활하며, 나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纏帶:어께와 허리에 매는 보자기]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눅 22:35)고 질문하시자, 그들은 “없나이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YHH 363.3)
오늘날 구주께서는, 마치 그분이 ‘마태’와 ‘요한’과 ‘베드로’를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를 그분의 사업에 부르고 계신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사랑으로 감동을 받으면, 보수[금전의 노임]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제일 중요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협력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분의 보호에 의지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의무에 대한 분명한 지각과 이타적인 욕망을 갖게 될 것이며, 우리의 생애는 세속적 동기를 초월한 고상한 목적으로 고무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근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와 같은 헌신에 따르는 결과[앞날의 수고]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와 같은 헌신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평안을 찾지 못할 것이다.(YHH 364.1)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의 표준에 도달하고자 애쓰기 때문에, 근심의 짐을 지고 마음에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세속적 봉사를 택하였고, 세속적 근심을 받아들였고, 세속적 관습을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성격은 망가졌고, 그들의 생애는 근심으로 눌리게 되었다. 계속적인 근심은, 생명력을 소모시킨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속박의 멍에를 벗어버리기를 바라신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그들에게 초청하신다. 그분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고 말씀하신다. 근심은 눈을 가리므로, 장래를 식별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신다. 모든 어려움 중에서 그분께서는, 구원해 줄 길을 마련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시 84:11)이다.(YHH 364.2)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 모두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길을 준비해놓고 계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원칙을 수락하는 사람들은 난관들이 사라지고, 앞길에 평탄한 길이 펼쳐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YHH 364.3)
오늘의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내일의 시련을 위하여 가장 잘 대비(對備:준비)하는 일이 된다. 내일의 부담과 염려를 모두 모아서, 오늘의 짐에 첨가(添加:덧씌움)하지 말라.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YHH 364.4)
희망과 용기를 가지자. 하나님의 사업에서 실망하는 것은, 죄악 적이며 부당한 일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온갖 필요를 아신다. 언약을 지켜주시는 우리의 하나님, 만왕의 왕이신 전능한 하나님은 부드러운 목자의, 보호와 친절을 겸하여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의 약속을, 성취시켜 주겠다는 분명한 보증[말씀의 능력]이 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모든 어려움을 제거해 줄, 방편(方便:수단방법)을 소유[창조주의 거룩하신 능력을 사랑으로 표현]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께서 마련하신 방편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은 마치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다른 어떤 사랑보다 더욱 뛰어난 사랑이다.
그분께서는 측량할 수 없이 영원한 사랑을 가지고, 그분의 자녀들을 돌보신다.(YHH 367.1)
가장 어려운 상황인 것처럼 보이는 최악의 시간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라. 그분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고 계시며, 그분의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호전[완전한 선(善)을 성취]시키고 계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의 힘은, 날마다 새로워질 것이다.(YHH 367.2) 그분께서는 그분의 종[하늘의 사자]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온갖 도움을 주실 수 있고,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주신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여러 가지 필요에 따라 요구되는 지혜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YHH 367.3) ‘사도바울’은, 시련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함]이니라.”(고후 12:9,10).(YHH 367.4)
예수께서는, 찔림을 받은 그분의 손과 상함을 입은 몸으로, 인류를 위하여 탄원하시며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 28-30).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의 결점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길 믿음과 은혜를 주신다.(CCh 348.4)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위의 불의한 행습을 떠날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형상이, 그들 속에 반영될 때까지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고, 생각의 순결을 주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에녹’과 같이 승천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그들은 세상 사람을 가르치며 경고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불신자들의 정신이나 행습을 좇지 않고, 거룩한 담화(談話:주고받는 대화)와 경건한 모본의 생애로 그들을 책망[경고]할 것이다.
홍수로 세상이 멸망당하기 직전에, ‘에녹’이 승천한 것은 불로 인해 세상이 멸망당하기 전에, 땅에서 의인들을 하늘로 데려가실 것을 예표 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계명을 충실히 순종하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던 자들 앞에서, 성도들은 영화롭게 될 것이다.(SR 61.1)
그리스도께서[변화산에서] 변형되실 때, ‘모세’와 승천한 ‘엘리야’는 그의 받으실 고난에 대하여, 얘기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사단이 ‘모세’의 시체를 요구한 것은, 그가 범한 한 가지 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게 그를 하늘 아버지께 위임하시면서,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 9)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사단에게 ‘모세’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 한 가지 잘못을 뉘우쳤으므로, 그의 품성에 아무 흠도 남아 있지 않고 따라서 그의 이름은, 하늘 기록 책에 흐려지지 않고 똑똑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요구하던 모세의 시체를 부활시키셨다.(SR 173.3) ‘모세’는 하나님에게 크게 은총을 받았다. 그는 사람들이 친구와 서로 이야기하듯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할 특권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신 적이 없는, 그분의 지극한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 주셨다.(SR 174.1)
불경[무례함]에 대한 ‘엘리사’의 효과적인 견책(譴責:꾸짖고 나무람) —고집 센 자녀들의 행동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관념은 잘못이다. ‘엘리사’는 그의 사업 초창기부터, ‘벧엘’의 젊은 아이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았다. 그는 매우 온화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강제하여 그 조롱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게 하셨다. 그들은 ‘엘리야’ 승천에 대한 말을 듣고, 이 엄숙한 사건을 희롱거리로 삼았다.
‘엘리사’는 그의 거룩한 부르심이 늙은이나 젊은이에게,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들이 ‘엘리야’가 ‘엘리사’ 앞에서 승천한 것처럼, 그도 승천하는 것이 더 좋다고 그에게 말하였을 때, 그는 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들에게 내린 두려운 심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CG 272.5)
‘여리고’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목나무 숲이 있었고, 선지자 학교 중의 하나가 있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한 후 그 곳에 갔다. 그 곳에 체류하는 동안, 그 성읍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나아와,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왕하 2:19)고 말하였다.
전에는 깨끗하고 생기를 주던 샘물, 그 성읍과 인근 지방에 물을 공급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던 샘물이, 이제 사용하기에 부적당하게 되었다.(PK 230.2)[(수 6:26) 참조-여리고성 함락할 때, 여호수아의 저주] ‘엘리사’는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한, 그의 주인을 따를 특권을 받지 못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오래 끄는, 병이 임하도록 허락하셨다.
인간의 약점과 고통이 있던 긴 시간 동안에도,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았고 항상 자기의 주위에서, 위로와 평화를 주시는 하늘 사자들을 바라보았다. ‘도단’ 고지에서 그는 자기를 둘러싼, ‘이스라엘’의 불 병거와 마병인 하늘 군대를 보았으므로, 이제 그는 동정하는 천사들의 임재를 의식하고 어려움을 참고 견뎠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하여 강한 신앙을 행사하였고,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의 인자하심에 대한, 지식이 더해감에 따라 그의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신뢰심으로 성숙되었다. 그리하여 죽음이 이를 때에 그의 수고를 마치고, 기꺼이 쉴 준비가 되어 있었다.(PK 263.3) ‘에녹’이 승천한 후,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적대적 입장에 선 사람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모세’는 승천한 ‘엘리야’와 함께 ‘변화 산’에 나타났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보내는 빛과, 영광의 전달자로서 보내신바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세기 전에 드린, ‘모세’의 기도는 마침내 성취되었다.
‘모세’는 그의 백성의 기업에 포함되어 있는, “아름다운 산”에 서서 ‘이스라엘’의 모든 약속들이 집중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크게 존경을 받는 그 사람의, 역사 중에서 인간의 안목에 나타난 마지막 장면이었다.(Hvn 102.1)
‘엘리야’—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왕하 2:1~11)였다.(Hvn 102.2)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지상에 살아 있어, 죽음을 맛보지 않고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고전 15:51,52)할, 성도들을 예표 하였다.
그리스도의 지상봉사의 끝이 가까웠을 때에, ‘엘리야’가 ‘변화 산’에서 ‘모세’와 같이 구주의 곁에 서도록 허락을 받은 것은, 그와 같이 변화함을 받을 사람들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영광을 입은 이들에게서, 구속함을 입은 자들의 왕국의 축소판을 보았다. 제자들은 하늘의 빛으로 옷 입은 예수를 보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는”(눅 9:35)것을 듣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재림 때에 죽음에서 부활할, 사람들을 대표하는 ‘모세’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세상역사의 종말에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되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할 사람들을 대표할, ‘엘리야’가 서 있었다.(Hvn 102.3)
‘엘리야’는 광야에서 고독과 절망에 빠져, 생명은 이것으로 족하오니 죽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였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사, 그의 말대로 그를 취하시지 아니하셨다.
아직도 ‘엘리야’에게는, 해야 할 큰 사업이 있었다. 그의 사업을 마쳤을 때에 그는, 실망과 고독 가운데서 죽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무덤 가운데로 내려갈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천사들과 같이 그분의 영광의, 어전(御前: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갈 것이었다.(Hvn 103.1)
‘모세와 엘리야’— ‘변화 산’에 나타난 ‘모세’는 죄와 사망을 이기실,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증인이었다. 그는 의인의 부활 때에, 무덤에서 나올 자들을 표상하였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변화되어 올라간, ‘엘리야’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지상에 살아남아 있는 자들, 곧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고전 15:51~53)게 될 무리들을 상징하였다.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 두 번째”(히 9:28) 오실 때에 나타내실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늘의 빛을 입으셨다. 이는 그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막 8:38).(Hvn 103.2) 제자들에게 하신, 구주의 약속은 이제 성취되었다. 산 위에서 미래의 영광의 왕국이 축소판[축소된 장면]으로 나타난바 되었으니, 곧 그리스도는 왕이요, ‘모세’는 부활한 성도들의 대표자요, ‘엘리야’는 [살아서]변화된 자들을 대표하였다.(Hvn 103.3)
“특별 부활”—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처음 익은 열매로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그분은 요제(搖祭)의 원형(原型)으로서 여호와 앞에, ‘요제’를 드리던 바로 그날에 부활하셨다. 일천년 이상 이 상징적인 의식이 거행되어 왔다.
추수하는 밭에서 처음 익은 곡식의 이삭들을 모아 가지고, ‘유월절 날’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이 가져간 처음 익은 곡식 단을, 여호와 앞에 감사의 예물로서 흔들었다. 낫으로 곡식을 거두어 단으로 묶어, 들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이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
하나님께 헌납한 곡식 단은, 추수를 예표 하였다. 그와 같이 처음 익은 열매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아들일 큰 영적추수를 표상하였다. 그분의 부활은, 죽은 모든 의인의 부활의 모형이요 보증이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Hvn 104.1)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에 관하여 읽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믿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살아계신, “구세주”로서 큰 돌이 앞에 놓여 있는 그러한 ‘요셉’의 새 무덤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높이 승천한 것을 믿고 있는가....
그는 하늘 조정[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탄원[중보]하고 계시다. 그는 우리가 하늘 조정에 한 친구, 곧 우리의 중보자와 변호인이 되시는, 한 친구가 필요한 까닭에 거기에 계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HP 45.4)
그 당시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었고, 또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셋’[셋째 아들]의 자손들은 ‘가인’[장남]의 아들들과 떨어져서, 산악지대로 올라 가 그곳에 집을 지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가인’의 후손들 가운데 성행하는 사악함과, 우상숭배를 피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녹’의 권면과 영향이 떠나간 후에 그들은, ‘가인’의 자손들과 연합하기 시작했다.(CTr 39.2)
예수님은 봉사시절 동안,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 그분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일으키셨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불멸을 옷 입지 못했다. 그들은 부활한 후에, 계속 죽음과 썩음에 굴복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무덤에서 나온, 사람들은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갔다. 그들은 사망과 무덤에 대한 그분의 승리의 전리품[적군으로부터 빼앗은 영혼]들로서, 그분과 함께 승천한 다수의 포로[구주의 열매로 구원자]들이다.... (CTr 286.2)
하나님께서는 그분 백성들이, 만일 처음부터 종말까지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들이 성취하고 있는 그 목적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다면, 그들이 인도받기를 선택하였을 그 길, 이외의 어떤 다른 길로는 결코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신다.
하늘로 옮겨간 ‘에녹’이나 불 병거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일지라도, 결코 옥중에서 외롭게 죽은 ‘침례요한’보다, 더 위대하거나 영예를 더 많이 받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리고 하늘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선물 중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신임이요, 가장 높은 영예인 것이다.(DA 2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