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은 초대 교회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예배의식은 너무나 파괴적이어서
공회 앞에서 참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가운데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간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분노로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예수의 부활에 참예한
스데반의 완전한 예배였습니다.
참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하면서 .....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탄성의 외침을 발한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믿음의 소통으로 가진 통전적인 예배자였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성령으로 보았습니다.
성전의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영광과 부활하여 영원히 계시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바라본 스데반은
완전한 예배의 탄성을 가졌습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떄가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전적인 예배로 담아낸 스데반은
복음의 선포와 성령으로 예배의 중심인 하나님의 보좌와 그 영광과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스런 빛 가운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것 처럼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성령으로 보았습니다.
복음의 소통을 믿음으로 통전적인 예배의 탄성을 가진 스데반은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보는 예배를 구원의 본질로 영광스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원 본질로서의 예배입니다.
예배를 푸닷거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리는 예배를 지성으로 드립니다.
온갖 소원과 기원을 담은 예배를 지성으로 드리는 종교의식은
샤마니즘적인 무속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속적인 푸닷거리가 아니더라도 구약의 제사 의식을 예배로 전향한 사람들은
드리는 예배를 인본주의 신앙의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드리는 예배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보는 예배의 탄성을 구원의 능력으로 가졌습니다.
흔히들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는 것이
예배를 본다는 말보다 더 올바르고 정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무속적 인본주의 신앙의 전형이요,
예배를 보는 사람은 통전적인 예배를 구원의 본질로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을 성령으로 보는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예배를 보는 사람을 예배의 구경꾼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는 사이비 무속 신앙의 인본주의 늪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배를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구약의 개념이요,
샤마니즘적인 무속 신앙의 표현입니다.
신약의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드리는 예배로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빛을 입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모닥불을 피우는 것이요,
예배를 보는 것은 하늘의 빛을 탄성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인본주의적 실존 신앙의 산물이요,
예배를 보는 것은 신본주의적 신앙입니다.
예배를 잘 드려서 은혜를 받는 것은 불교적 무속 신앙이요,
은혜를 입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예배의 탄성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탄성을 잃어 버린 유사 기독교는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여 신도들의 피고름을 짜냅니다.
신도들의 피고름을 짜내는 사이비 종교는
우상화된 종교적 시스템으로 신도들을 세뇌시킵니다.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는 사이비 기독교 유사 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상화 시키고 번영과 성공을 비전으로 제시하여 종교적 노예로 만들어 갑니다.
성경에서 본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경이로운 탄성, 그 자체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푸닷거리 무속 신앙이나 바알신앙, 그리고 바래새인들의 성전 신앙입니다.
예배를 구약 제사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스데반의 복음의식은
참으로 경이로운 탄성을 가졌습니다.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을 광야 교회로 명명하면서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라"고 탄식을 쏟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마음으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솔로몬의 성전은 바알 신당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멸사히는 제사가 되어 심판을 받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분열된 열지파를 가진 북쪽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드리지 못하였으며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음란히 섬겼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가진 남쪽 유다도
여호수아 이후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때까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히스기야의 유월절은 바알신앙으로 타락한 제자장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병든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신명기 사관을 가진 열왕기 기자는
히스기야의 유월절을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의 극심한 타락으로 인하여
요시야의 위대한 종교 개혁에도 불구하고 남쪽 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짓밟혔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고.....
남쪽 유다가 멸망할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있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불탔습니다.
느혜미야와 에스라와 스룹바벨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축되었지만
불과 100년이 지나지 않아 제사장의 극심한 타락으로 레위 언약을 파기하여
스룹바벨 성전마저 헬라에 짓밟혔습니다.
400여년이 지나 헷롯이 통치수단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하였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지옥의 판결을 받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종교적 온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은
드리는 제사로 명맥을 이었으나 주후 70년 헤롯 성전이 로마에게 무너지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스데반은
더 이상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통전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보는 예배자가 되어 구원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탄성으로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 성전에서 영광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드리는 예배의 종결자인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의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은혜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열어 놓으신 생명의 길로
찬양하며 행진하는 것이 참된 예배요, 그 영광을 탄성으로 바라보는 것이 예배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드리는 예배의 종결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소의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흔연히 가는 성도의 행진은
빌립에게 복음을 받은 에디오피아 내시의 흔연히 가는 참된 예배의 길입니다.
아직도 드리는 예배로 종교적 승부를 거는 기독교 유사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의 옛 습관을 따르는
구원 밖의 사람일 뿐입니다.
예배의 탄성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전적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 영원한 성전을 소유한 참된 성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성전을 가진 성도는
드리는 예배의 종교적 노예로 살지 않고 복음의 자유를 하나님 나라로 가득 누립니다.
영광의 구원받지 못하고 죄의 사슬에 매여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드리는 예배로 열광하며 성공과 번영의 비전을 가지고 질병과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풍요의 신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바알 신앙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