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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은 정약용 귀양지 '다산초당', '모란 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 월출산 아래 자리한 '천년고찰 무위사', 붉은 동백꽃 가득한 '백련사' 다양한 볼거리와 더불어 숨은 이야기가., 가득한 고장. '영랑문학제', '청자축제' 등 개최. 관광지로 위상을 높이고 있는 강진군. . 농특산물 - 쌀, 버섯, 딸기, 오이, 방울토마토, 단감, 배, 전복, 돌게, 미역, 다시마, 꼬막, 바지락, 김, 낙지, 토하젓, 매생이, 황금닭, 강진 맥우, 김자반 등 '강진만'은 도암면과 대구면 사이에 위치한 만으로 군의 중앙부까지 만입되어 군의 형상이 ‘人’자 모양. 해안선 길이 73.61㎢이며, 만 안에는 탐진강·장계천· 강진천·석문천 등의 하천이 흘러들며 평균수온 17.8℃. 해조류 및 어패류 서식에 적합하다. 이곳은 1978년 청정수역으로 선포. 탐진강 하구는 1970년대 간척 농경지. . 강진만 남쪽에는 고금도가 가로놓여 방파제 역할을 한다. 그 사이에 가우도, 비래도 등 8개의 섬이 놓여 있으며 유인도는 가우도 하나이다. 2007년 연평균기온 14.4℃, 연강우량은 1,800.3㎜이다. 선사유적으로는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 도암면 지석리, 성전면 월남리·월하리·영풍리 등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성전리 유적에서 마제석검 출토. 또 칠량면에 강진송전리지석묘군 (전라남도기념물 제66호)이 있다. 관방유적으로는 신라시대 군마방목장. 연해산성(沿海山城). 구수리(九修里) 성지, 마량면 만호성, 병영면 박동리의 수인산성 등. 도암면 만덕리에 정약용 유배생활. 정다산유적(사적 제107호)이 있다. 대구면 사당리.,강진대구면도요지(사적 제68호) 칠량면 강진상흥리의도요지(전라남도 기념물 제81호) 칠량면 명주리와 봉황리, 대구면 용운리 조선시대 도요지. . 도암면 강정리 해남윤씨족보목판 (전남 유형문화재 168호)· 해남윤씨추원당(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9호), 해남윤씨영모당(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8호) 등. 칠량면 단월리 강진염걸장군묘소(전남 기념물 36호). .............. .............. 19세기 후반 울릉도 개척민 대부분 전라남도 출신인 사실이 담긴 고문서. 정약용 ‘탐진어가’ 대목과도 일맥 상통. 돛배를 타고 남해안에서 울릉도까지 항해한 옛 조상들의 항해술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882년(고종 19년)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의 보고서에 울릉도 인구 141명중 114명이 전라도 출신이었다고 기록. 고흥과 여수, 순천 출신이 많았던 것으로 나온다. 전라도 사람들이 울릉도까지 가서 정착을 했던 것. 탐진어가(耽津漁歌)에도 다음 같은 기록. 붉은새우 녹색 맛살은 치지 않는다. 홍합이 연밥 같이 작은 것이 싫어서 돛을 달고 동으로 울릉도로 간다네.' 울릉도로 고기잡이 다니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강진에서 울릉도까지의 뱃길 거리는 약 600여㎞. 당시 전라도 사람들은 돛배를 조정하며 600㎞를 항해할 만큼 항해술이 뛰어났다. 울릉도 근해까지 왕래하다가 식수나 기타 생필품을 공급받으며 인연 맺었던 울릉도에 정착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원거리 어업은 상당히 활성화 됐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다산 정약용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제주에서 갓을 실은 배가 강진지역에 자주 왕래하고 있었던 사실.
표류 관련, 장계 등을 분석해 보면, 그당시 해상활동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들이 있다 서울까지 유통한 곳은.,'강진 영광 장흥' 세 지역. 이미 1697년 강진~서울~강진 간에 곡물 소송과 여객 운송을 했다는 기록. 1782년 공물 귤을 '강진~서울' 뱃길 운송. 이어지는 상업과 여객운송 목적의 뱃길이 있었다는 것. 1806년 '강진의 선장' 김태철은 미역 67첩을 선박에 싣고 서울과 인천, 평양 등지에 판매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부근 도서지역들 뿐만이 아니라 영남 남해안, 서해안 강경, 평양, 동해안 울릉도까지 포괄하는 범위. 그가 지었던 '호남가'라는 노래가 있다. 그는 정조 17년(1793년)과 순조 20년(1820년) 두 차례 전라감사를 지내면서 호남 54개 고을 이름을 빌어 '함평천지 늙은놈이...'로 시작되는 호남가를 지었다. 들어있는데 강진은 다음 같은 내용이 있다. 진도(珍島)로 건너갈 제 금구(金溝)의 금(金)을 일어 쌓인 게 김제(金堤)로다'
떠나가는 장삿배(商賈船/상가선)는 보배섬(珍島/진도)을 찾아가니 골짜기마다 금밭(金溝/금구)이요. 캐어내니 금무더기(金堤/김제)로다 - 상선(商船)을 노래한 곳은 '호남가'에서 강진이 유일하다.
이처럼, 강진은 호남 지역에서 바다를 통해 상거래가 활성화된 대표적인 곳이였다.
조선8도.,지도 <세종실록지리지> 제151권 27장 '제주목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제주목은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제주에 대한 옛 기록에 따르면 ‘태초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신인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지금도 주산 북쪽 기슭에 모흥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그 곳이다. …15대 손에 이르러 고후·고청의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렀는데, 신라가 번성할 때였다.…읍의 이름을 탐라라고 하니 대개 신라 때에 처음으로 탐진에 이른 까닭이었다.… 백제 476년(문주왕 2)에 탐라국 사자에게 은솔이란 벼슬을 주었고, 498년(동성왕 20)에 탐라에서 공부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임금이 친히 무진주에까지 이르렀는데 탐라에서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었으므로 이에 중지하였다.’ 하였다. …고려 1105년(숙종 10)에 탁라를 고쳐 탐라군으로, 의종 때 현령관으로 하였다. 1270년(원종 11) 역적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탐라에 들어가서 난을 일으켰는데, 4년이 지난 계유년에 시중 김방경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1277년(충렬왕 3) 정축에 원나라 조정에서 목마장으로 삼았는데 1295년(충렬왕 21) 임금이 원나라에 들어가 탐라를 돌려주길 청하니, '원나라 승상' 완택 등이 상주하여 그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는 것이 옳겠다는 성지를 받았고, 이듬해에 탐라를 고쳐 제주로 하였다. 제주의 옛이름은 탐라(耽羅)·탁라(乇羅)· 탐모라(耽毛羅)·동영주(東瀛洲) 1295년(충렬왕 21) 제주 행정단위는 제주목으로 개편되었다. 목(牧)은 경(京)과 도호부의 격을 지닌 행정단위와 더불어 계수관(界首官) 지역으로 일컬어졌다. 계수관 지역은 최상의 독자적·개별적 행정단위 역할을 담당했는데,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도(道)가 명실상부하게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간기구로 정착해 극히 짧은 기간에만 그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 지역도 제주목으로 개편된 이후부터는 오늘날의 도(道)와 같은 위상을 지닌 고려의 최상급 지방 행정단위가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관품이 높으며, 많은 수의 외관을 맞게 되었다. 그후 1300년(충렬왕 26)에 이르러서는 제주목에 속했던 촌 가운데서 14개 촌이 동·서 방향으로 나뉘어, 각각 군·현으로 개편. 현존하는 마을의 틀과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초인 1416년(태종 16)에 제주도는 고려 행정조직 동·서도현(東·西道縣) 제도 폐지, 3읍 행정조직을 도입, 대폭적인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제주목사 오식(吳湜)의 건의에 의해서 정비된 행정구역을 보면 한라산 동서로 뻗은 분수령을 경계로 북반면을 제주목으로 하고, 남반면은 이를 다시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을 정의현, 서쪽을 대정현으로 했다. 이 3읍 행정조직은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졌고, 1609년(광해군 1)에 이르러., 3읍 8면으로 개편. 이 하부조직은 조선시대 후기에 제주목 우면이 신우면과 구우면으로 분면되는 등 부분적 개정이 있었으나, 고종 때까지는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이후 1864년(고종 1) 8월 30일 조정에서는 제주목 정의현과 대정현 2개 현을 군으로 승격. 제주목사의 관할에서 분리시켜 직접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아래 두게 하였다. 하지만, 두 현이 제주목사 지휘권에서 벗어난 결과 점차 체통이 문란해지고, 과폐(科弊)가 일어나는 등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1880년(고종 17) 1월 27일 다시 예전대로., 정의현· 대정현으로 환원시켜 제주목사 관할 아래.,귀속. ................조선시대 유배지 & 제주.......................... 조선시대 유배는 왕족, 고위관료에 한해 일정 장소를 지정 유폐 시키는 '안치'와 주위에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심고 그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위리안치(圍籬安置)'가 있었다.
'위리안치'는 연산군이 세계 최초로 만든 유배형. 처첩을 데리고 갈 수 없고, 집밖으로 못나오는 형벌이다. 중종반정 후, 폐위된 연산군은 교동도 위리안치 3개월만에 운명.
"저지르면, 법률에 따라서 죄를 묻는다."- 연산군 - 1506년 폐위된 후, 강화도 서북쪽 교동도 위리안치.
연산군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든 유배 형벌. 자기가 만든 유배형벌에 의해 아이로니칼 하게.,운명.
연산군 재위 때 스스로 만든.,위리안치 유배형. '절해고도 '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안'.,주거 제한. 울타리 밑으로 밥그릇만 들락거리는 구멍이 있을 뿐.
가족, 지인의 면회조차 허용이 안되는.,위리안치.
탱자나무를 빽빽히 심어 햇볕조차 가린 환경. 집밖을 보려 해도 가시울타리에 눈 찔리기 십상. '왕으로 살던 그는 새장 속에 갇힌 느낌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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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流刑)은 유배(流配)라고도 하며 매우 중한 죄를 범한 자를 차마 사형시키지 못하고, 먼곳으로 보내 죽을 때까지 살게 하는 것 유배 보내는 거리에 따라., 2천리, 2천5백리, 3천리 세 등급이 있었다.
세 등급 모두 각각 장형 100대를 맞은 후.,떠나는 유배길. 형틀에 묶여 장형 25대만 맞아도, 엄지발가락이 빠질 지경.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빠진 엄지발가락으로 발을 절며.,시작.
'장독으로 유배길에서 병사하는 경우도.,빈번.'
본래, 유배지는 죄인의 거주지로부터 적어도 600리 이상은 떨어져 있어야 하고 죄인의 집이 있는 도내(道內)가 아니어야 했다.
서울과 경기, 충청도를 제외한 곳이라는.,규정. 실제로는 충청도에 유배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귀양은 고려. 조선시대에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한 기간 동안 제한된 곳에서만 살게 하던 형벌 중에 하나이다. 초기에는 방축향리(放逐鄕里) 즉, 삭탈관직 후, 고향으로 내쫓던 형벌.
후세에 와서는 도배(徒配), 유배(流配), 찬배(竄配), 정배(定配)의 뜻으로 쓰였다
유배지는 함경도 삼수갑산과 평안도 국경지역이 가장 많았고, 경상. 전라도 거제도. 진도 추자도 등 조선시대에 도서 지방도 자주 이용되었다.
영조 재위 때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와 같이 험한 곳이나 무인도에는 유배를 금지시켰다.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역모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아 지속적으로 동정을 살필 수 있는 곳.
고려시대 유배된 왕실 인물로는 희종 조선시대 왕실 인물.,안평대군, 연산군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이 유배된 곳이다.
또한 선조의 손자이자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 인조의 다섯째 아들 승선군, 광해군의 폐비 유씨와 상계군의 아들인 익평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철종 할아버지 은언군, 홍선대원군의 손자이며 고종의 조카인 영선군 등 한양에서 가장 먼 곳으로 ‘유배 3천리’에 해당되는 제주도. 광해군은 군사에게 안방까지 뺏겨가며 18년을 살다가 운명.
추사 김정희, 충암 긴정, 인목대비 어머니 노씨부인, 광해군, 우암 송시열, 면암 최익현의 유배지였던 곳. .................................. ...................................
삼수(三水)는 함경도 북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날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고 매우 구석진 오지. 많은 이들이 추위에 얼어 죽거나 범에게 물려 죽었다.
삼수갑산은 죄인유배지로 악명 높았는데, 유배보내면 대부분 형기가 다하기 전 사망.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 중 한 곳이기도 했다. ............................. .............................
광해군 때, 백사 이항복이 귀양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 중 한곳.
회룡 남쪽 내성강이 감돌아 흘러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귀양지였다
단종 유배지로서 섬처럼 고립된 곳.
고려시대 공양왕의 유배지.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고려 18대 의종 유배지.
포은 정몽주의 1년간 유배지.
'고려시대~ 조선시대'.,귀양지
한양에서 가장 먼 ‘유배 3천리’ 정온 선생, 고산 윤선도 유배지
제주, 거제, 진도 다음으로 고려시대 이후부터 중죄인 유배지
특히 흑산도는 양반 뿐만 아니라 큰 죄를 진 서민들도 귀양살이 정약전(정약용 형), 김귀주(정순왕후 오라버니), 최익현 유배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로서 이곳에서 무려 19년을 보냈다.
조선시대 삼봉 정도전의 유배지였고 나주의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 지금은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의 ‘백동마을’이다.
정암 조광조.,'적려유허지' ...................................
조선시대 유배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은 '절해고도' 유배지에서의 '위리안치' 주거제한. 절망과 고통을 동시에 줄 만큼 가혹한 유배생활.
'숙종 ~ 영조' 시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어도 죽음에 가까운 형벌. 유배지에서 구사일생 환국 이후에는.,복수혈전.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유배 형벌은 당파싸움을 더욱 가중시켰고 조선 후기에는 당파싸움으로 4명 중 1명이 유배생활.
삼국시대 부터 고려시대까지 유배형벌을 합친 것보다 조선시대 유배 형벌 사례가 훨씬 더 상회할 만큼 압도적. 특히, 조선 후기에는 유배 형벌이 지나치게 남용된 것 같다. 2014-01-23 16:24 국민일보 우리나라 육지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가장 오래된 해로. 전남 강진~제주 간 뱃길이 수백 년 만에 다시 열린다. 조선시대 뗏목이 아닌 전세계 40척뿐인 국내 유일 고속선이 육지와 제주도 최단 뱃길(119㎞)을 질주. 강진군은 23일 군청 대회의실에서 미래고속㈜과 강진 마량~제주항 여객선 취항 업무협약을 체결. 고대와 현대를 잇는 신 해양관광시대를 열었다. 267t급 규모로 승객 220명을 태울 수 있다. 45노트(83㎞/h)로 '강진~제주' 1시간30분대. 배삯은 4만~5만원. 두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해상물류 시작, 조선시대 제주도 공출마가 한양으로 갈 때 이곳 마량항을 이용했다. 전남 강진군에서.,마량면(馬良面) 조선시대 제주에서 말을 싣고 와서 다시 살찌운 다음 서울로 보냈던 곳. '마량(馬良)'이라는 지명은 '말을 살찌우다' 라는.,뜻말. ............. .............. 강진군 병영면(兵營面)은.,군사적 요충지 삼면(동.남.북)이 산으로 쌓인 철옹성 요새. 원래, 전라 지역 총사령부는.,'고내상 성지' 광주 송정리에서 왜구 침탈로.,강진으로 이전. 월출산 수인산 화방산이 3面을 막고 서쪽 협곡만 방어하면 되는., 병영면. . 장흥 탐진강에서 합류하는 금강천이 월출산에서 발원해 병영 한가운데로 흘러 착천면과 함께 곡창지대를 이뤄 군량미 없이 자급자족 가능한.,병영면. ........................ ........................ 그후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 육군을 총괄하는 총사령부가 된다. 병영면(兵營面)지명은 여기서 유래. 탐라국 사신과 말들이 쉬어가던 곳.,강진 마량. 강진군청에서 마량 바다까지는 남쪽으로 26km.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완도군 북부.,'강진만' 강진만 안 '고금도'는 '군자가 많이 살았다.'는 섬. ![]() 고금도(古今島)는 원래 "고이도(古爾島)", 점차 변하여, 고이도(古你島)가 되었다. 그뒤 고금도(古金島)로 바뀌어 불렸다가 고금도(古今島)로 변하여 현재에 이른다. 고구마 재배 섬이었는데 그후, 육지로 전래되었다 하여, "고금도에서 나온 마’"는 뜻으로서 ‘고구마’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금도(古今島)............................... 1384년(우왕 10)봉성리(독바위)에 천씨(千氏)가 최초 거주. 1589년(선조 22)덕동리에 고금진(古今鎭) 설치 때 강진군 속. 1896년에 완도 주변의 섬을 합하여 완도군이 설치되었을 때, '고금도와 약산도 사이' 덕동리에 소재지를 두며 완도군에 속. 1946년약산도의 약산면을 분할 농상리에 고금면 소재지를 둔다. 2007년 6월 29일 '마량면~고금도' 마량연륙교 완공. 이를 계기로 동쪽으로 약산면, 금일읍, 생일면을 잇고, 남쪽으로는 신지면, 완도읍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마량면과 강진읍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부상하였다. ........................................................................ 고금도 남쪽으로는.,남해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고금도 인근에 노화도 소안도 보길도 등이 위치.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해상왕국을 꿈꾸던 귀양지. '해남 땅끝마을~ 흑산도 ~추자도~제주도' 보길도는 '해남 땅끝마을~제주도' 뱃길 운항 중 태풍을 만나면 대피할 곳.( 즉, 후폭풍 대피처 역활). 인근 노화도는 남해 물류교환 중심이며 제주 가는 길목.
장차, '노화도 보길도 소안도' 일대 해역은 '동아시아 해상 물류 중심지'로서 부각될 곳. . ![]() 마량 ![]() 탐라국 사신과 말들이 쉬어가던 곳.,강진 마량. ![]() ![]() ....................강진만.............................. 전라남도 해남반도와 장흥반도 사이에 있는 만. 강진군 중앙부까지 깊숙이 만입해 좁고 긴 형태. 만의 일대는 1978년에 청정수역으로 지정되었다. 해안선 79㎞. 2개 유인도(가우도. 죽도).9개 무인도. 해남반도 쪽으로 규모가 작은 도암만이 있고 연안에는 간석지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탐진강 하구는 1970년 간척,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다. 만 안으로 강진천·석문천·탐진강· 장계천 등이 흘러들고 있어서 주위의 해역보다 염도가 낮고, 수온이 높아 해조류는 물론 어패류의 서식에 적합하다. 대합·새우·갯장어·바지락·김·굴·꼬막·낙지· 농어·숭어·망둥이 등이 많이 잡히며, 특히 대합과 새우가 맛이 좋기로 유명했으나, 최근 토사 퇴적으로 생산량이 차츰 감소. 만의 동남쪽에 있는 마량항 일대 해역은 수심이 깊고 만 입구에 가로놓인 고금도와 완도가 방파제 구실을 하여, 해상교통 요지 어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특히 육지에서 생산되는 공산품 농산품 반입, 수산물 반출하는 상업 중심지. ................................................................................ 2015.1.29 강진 마량항 증설 본격화. 2015.6.30 강진 마량항 2016.7.28 마량항 마량항(馬良港)은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공출한 제주마(濟州馬)가 육지에 도착하는 종착지로서 지금도 신마(新馬.새말), 숙마(宿馬.말 잠자리) 등 말과 관련 있는 지명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마량면(면적 20.10㎢)............. 대한민국 전라남도 강진군 남부에 있는 면. 동부는 봉태산(358m), 그밖은 구릉성 산지. 평야는 영동내 연안에, 저수지 곳곳에 축조. 강진만 일대에 수산양식업 활발 마량항이 수산물집산지가 되었다. 항내에는 해조류 가공공장이 있으며, 마량리에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마량면 남서쪽에는 아열대성 상록수림이 울창한., 대오도 . . 행정구역은 영동리· 상흥리· 원포리· 마량리· 수인리 등 5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12개리). 면사무소 : 마량면 마량8길 20. , 인구 1,994(2016). ................................................................... 강진 마량항 2017.5.27 마량항 2017.05.16 가우도 저도 출렁다리 가우도 출렁다리 ![]() 가우도 출렁다리 ....................가우도(駕牛島)..................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월곶로 473 (도암면) 도암면 망호(望湖)에 속한 강진만 8섬 중 유일한 유인도, 1789년까지는 대구면에 속, 뒤에 보암면(現 도암면)에 속. 1914년 행정 개편 때 도암면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진읍 보은산이 소(牛) 머리에 해당되고, 섬 지형이 소(牛) 멍에에 해당하여.,駕牛島. .......................................................... 마량 가우도(駕牛島). 가우도 산책 가우도 산책 강진 마량 가우도 산책. ![]() ![]()
2017.8.15 마량항 ............... 2014.03.05 뱃길 제주방문 올해 230만.,돌파. 조선시대 '강진~제주' 뱃길 당시 배 규모는 어떠했을까? .......................................
조선시대 배는 대개 대선과 중선, 소선으로 구분했다. 대선은 80여 명, 중선이 50여 명, 소선은 30여 명 탑승. (서인범, 주성지 번역. '최부의 표해록' 79페이지 참조). 소선 규모로 30~50명 탑승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로 들어갈 때 일행은 38명이었다. , 1679년(숙종 5년 기미) 9. 16 제주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러 가면서 제주도에 들어가던 이증(李增1628-1686)의 일행이 탄 배는 53명. 격군을 포함 30~40명이 탑승한 것으로 기록. 그당시, 돛단배들은 좋은 바람을 만나면 아침 제주~ 저녁 마량 or 강진읍 남포 도착. 조선시대 최소한 10시간 정도가 소요된 셈이다. 육지 도착은 일년에 몇차례 없는 기회였으며, 보통 '육지~ 제주'는 이틀 정도를 잡는게 상식. 제주도 왕래 행인들은 제주와 강진의 중간 지점에 있는 완도 보길도 추자도, 소안도, 청산도 등에서 하루를 일박. 강진읍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를 통해 제주목사 아버지 임진에게 인사가면서 6척 배. 남사록 著 김상헌이 제주도로 들어갈 때는 좌선 한척, 전라수사가 내준 호송선 네척과 함께 제주 새 판관 환후선 두척, 전라병사가 제주원군을 보내는 병선 두척 등 아홉척이 동행했다. 배가 대열을 이뤄가는게 안전. 배에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는 다른 배가 바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 제주로 옹기를 팔러다니던 주민들도 비슷한 증언. 완도항을 거쳐 청산도에 정박 뒤따라 오는 배를 기다렸다." "배가 3~4척이 모이면 날씨를 보아 대열을 이뤄 제주를 향해 출발했다." "그렇게 대열을 해서 항해를 하면 망망대해에서 무료함도 달래 주었다." 부친상을 당해 급히 해남으로 오다 풍랑을 만나 13일간 표류. 중국 절강성 해안에 도착했던 최부 일행은 43명이었는데 식수를 실은 보조선 한척이 동행한 것이 이색적이다.
조선시대 배들은 매우 튼튼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목선이 태풍에도 끄떡없었음을 알 수 있다. 13일 동안 망망대해를 헤맸던 최부 일행이 탄 배는 대양 위에서 수차례 태풍을 만났으나 파손되지 않았다. 바닷물이 배속으로 쏟아지면서 침수될 위기는 수 차례 있었으나 선원들이 합심해서 물을 퍼내면 배가 다시 정상을 되찾았다. 선체 모양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장한철 일행 29명이 탄 배도 12일 동안 일본 해역등에서 수차례 폭우가 동반된 태풍을 만났으나 선체는 멀쩡했다. 완도 청산도 해안으로 표착하면서 바위에 부딪혔을 때 일부 파손됐을 뿐.
이를 볼때 조선시대 한선 제작술이 상당 수준에 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삼국시대 거쳐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까지 해외무역이 일반화되고 원양 항해가 다반사. 하여, 항해술과 조선술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철저한 쇄국정책이 시행. 원양항해는 부산에서 일본 후쿠오카 사이에 사신 왕래 정도가 전부. 조선술과 항해술이 자연스럽게 침체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주에서 강진의 남포마을로 항해하다 표류한 장한철 일행이 겪은 일을 보면 조선 해양세력이 얼마나 왜소했는지 알 수 있다. 무인도에서 베트남 상선 도움으로 간신히 구조된다. 이 상선은 베트남에서 일본으로 콩을 팔러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상선의 규모가 엄청났다. 상선으로 타게 한 후 29명이 탔던 장한철 일행의 배를 상선 아래쪽 창고 안에 넣었다. 큰 창고를 배 아래에 갖고 있었다. . 창고문은 바로 바다와 연결돼 있어서 언제든지 배를 바다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만큼 필리핀 배의 규모가 컸다는 이야기. 길이는 그 곱절 정도 된다고 표현했다. 4층으로 된 배는 방들이 수없이 많았고, 추녀가 이어지고 난관이 교차되어 있으며, 겹창과 겹문이 즐비할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 새벽 닭울음 소릴 듣고 깨어났다. 상선이 어느 마을 가까이 도착한 걸로 생각. 닭울음 소리는 배에서 키우는 닭들이 훼를 친 것. 닭만 키우는게 아니고 거위와 양과 염소, 개, 돼지 등 그리고 파와 채소를 키우는 밭도 있었다. '한번 내려가고 한 번 올라옴에 길이 서로 같지 않았다' 일본으로 콩을 팔러다니는 베트남 상선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거대한 배에는 각종 출입구가 미로처럼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장한철 일행은 난생 처음 보는 배의 규모에할 말을 잃고 말았다. 초대형 베트남 상선을 보았을 때 대양에서는 무슨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1600년대 들어 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라고 해서 열강들의 아시아 진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847년까지 606척의 동인도회사 선박이 도착했고,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도 열강의 영향을 받아 대외교역을 활발히 펼쳤다. 하멜 일행이 탄 배도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나가사키로 가던 상선. 하멜이 탈출한 1666년 9월 이후에도 조선은 여전히 쇄국정책을 고수해 넓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정도의 상선이 많이 보급됐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일본 등 다른 나라와 국제무역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1770년 장한철 일행이 본 국제해양문화는 개벽천지 그 자체였다. 조선시대는 바다를 멀리했고, 국제사정에 캄캄했다.
그 결과 조선 후기들어 열강들 공격에 취약. 내부적으로 외세로부터 견딜만한 힘을 구비 못했다. 둘러쌓인 한반도 바다를 멀리하는 동안 쇠락했고 강진도 마찬가지.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강진만에 배가 줄어들고 대외적인 항로가 끊기는 시기와 강진 인구가 급감하고 쇠퇴를 거듭한 시기가 멀지 않다. 옛 뱃길을 복원하는 것은 단순하게 역사적인 향수에 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옛 뱃길 복원은 대단히 현대적이고 실리적인 강진의 발전 방향이다. ................. ................. 청산도 ...................조선시대 청산도(靑山島)..................... 1608년(선조 41년) 조선시대 처음 민간인 청산도 정착 1681년(숙종 7년) '수군만호진' 설치로 군사적 요충지 역할. 1866년(고종 3년) 당리진(堂里鎭) 설치, 강진, 해남, 완도 관장. 1895년 당리진 해체되고 완도군에 편입. 1914년 남쪽 여서면(여서도) 포함., 청산면 ......................................................... 1964년 10월 1일 청산면 모도 출장소 설치. 청산도(靑山島)는 대한민국 남해 연안 섬.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의 주도(主島)이다.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등 4개 유인도. 그외 여러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시사철 섬이 푸르러 '청산도'라 부르며 맑고 푸른 다도해. '신선이 산다.' 하여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 . 2007.04.23 ▲ 청산도 서쪽 절벽이 깍아질듯 펼쳐쳤다. 조선시대 장한철 일행 29명은 1771년 1월에 어느날 밤에 표류하다 21명이 죽고 8명 표도 영화 서편제 촬영장.,청산도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다. 조선시대 '장한철의 표해록' 무대. . ....................장한철 표해록'................. 1770년 12월 제주 장한철은 과거를 보기 위해 제주항에서 29명의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의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마을로 항해 하다가 표류한 과정을 기록한 책.
장한철 일행의 표류는 '강진~제주' 뱃길에서 조선시대 표류사 대사건. 그날 오후 지금의 완도 소안도 인근에서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서쪽으로 밀려 표류 그 배는 흑산도 인근 해역까지 밀려갔다. 표류 13일만에 다시 소안도 일대로 떠밀려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행 29명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이 일대는 바위투성이 작은 무인도들이 많아 험하기 짝이 없는 곳. 모두들 죽는다고 통곡을 했다. 승선자들의 자포자기 속에 배는 그날밤 모도를 지나 청산도 어느 해안으로 밀려갔고 배는 바위에 부딛쳐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정월 초엿새날 한밤중이었다. 나머지는 배가 부서지면서 모두 실종. 청산도에 오른 10명 중 2명은 산길을 따라 마을을 찾아가다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고 만다. 제주에서 출발한 29명중 8명 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살아남은 장한철 일행 8명은 청산도 주민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청산도에 머무르게 된다. 장한철은 청산도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음식을 챙겨주었다고 소개한다. 어느날 장한철은 마을의 당집에 들려 그곳에서 소복을 입고 모친 일을 거드는 무녀의 딸을 만난다. 소복입은 무녀의 딸은 몇해 전 남편을 잃은 20살 과부. 그런데 그 여인은 장한철이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의식을 잃었을때 그의 꿈속에서 나타나 물을 건네주던 여인이었다. 어쨌든 장한철은 이 여인과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청산도는 이렇듯 1770년 바다에서 동료 21명을 잃은 선비가 육지에 도착해 현지 여인과 로멘스를 나눈 곳. 장한철은 얼마후 청산도에서 나와 신지도. 마량~칠량 거쳐 남당포 도착.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그는 4년 후 다시 과거에 도전해 영조 51년 과거합격, 제주 대정현감. 강원도 취곡현령을 지낸 것으로 전한다. .................................................... 장한철 표해록 장한철 표해록 원고는 1959년 8월 서울대학교 정병욱교수가 제주도에서 학술조사를 벌일 당시 애월상업고등학교 교장 장응선 씨로부터 원고를 입수하면서 학계에 처음 보고.
이후 정교수가 1979년 번역본을 출간 '강진~제주' 뱃길의 사연이 알려졌다. '처절한 해난사고' 이후 189년만의 일. 장한철은 표류 13일째인 1771년 음 1월 6일. '비바람이 몹시 몰아치니 파도는 산더미처럼 밀려들고 배는 정처없이 떠가는' 생사의 갈림길. 흑산도 주변에서 완도 소안도 주변을 거쳐 해시(亥時:밤 9시~11시 사이)쯤에 청산면 행정구역인 모도 주변으로 떠밀려 온다. 그때 '멀리서 비바람으로 캄캄해진 하늘 아래로 드러난 큰산이., 청산도. '모도~청산도' 거리를 측정하면 8.5㎞. 바람은 다행히 동쪽으로 계속 불고 있었다. 장한철 일행 18명이 청산도에 표도한 직후 사망한 지점은 어딜까? 13일간 표류한 끝에 보였다는 육지. 배를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을듯.. 배는 떠밀려가다가 청산도에 닿으며 산산조각. 사람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장한철도 뛰어들다. 발을 내딛자 다행히 바윗돌 위에 몸이 걸렸다. 약 50 걸음을 걸어 육지로 올랐다. 캄캄하고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당시 상황을 기록한.,장한철.
'보이는 것이라곤 놀란 물결이 해안을 쥐어뜯고 있는 것인데, 그소리는 천둥이 구르는 듯 하고 큰 파도는 길길이 뛰어 하늘로 치솟으니, 그림자는 설산(雪山)을 뒤집는 것 같다.' 표류할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청산도 해변의 정황이 마치, 생생한 필름처럼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는듯.. 장한철은 자신의 도착지점을 정확하게 기술하지는 않았으나 몇가지 추정 가능한 기술이 있다. 우선 장한철이 발을 내딛인 '석서(石嶼: 바위로 된 섬)'. 장한철은 자신이 발을 걸친 석서가 바닷물이 들어오면 물속에 잠기고 물이 빠질때면 모습을 드러낸다 했다. 청산도 면소재지 도청리 가까운 곳 완도에서 배타고 청산도 도청항으로 들어가다 보면 남쪽으로 아주 조그만 '돌섬보인다납다도'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 섬은 만조가 되면 보이지 않고 간조가 되면 모습을 드러낸다 한다. 또 육지로 석맥이 있어 물이 빠지면 이곳으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 한다. 육지와 거리도 장한철이 걸었다는 50보쯤. 그러나, 장한철이 섬에 도착했을 때 기술을 보면 이곳이 아닐 수도 있다. "나도 사람들의 뒤를 따라 벽을 부여잡고 낭떨어지를 붙들며'줄줄이 올라갔다. 해안벽의 높이는 몇백길이 되는데, 그 언덕 아래는 푸른바다이고 언덕 위가 곧 평평한 육지." 장한철 일행 10명중 2명은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 생존자들은 해안에서 10리정도를 가서 마을을 만나게 된다.그런데 납다도 주변에 그 정도 규모의 낭떨어지는 보이지가 않는다. 마을로 향하는 길이 평범에 가깝고 납다도에서 마을이 비교적 가까운 편.
주변에 사람이 떨어져 죽을만한 낭떨어지도 없어 보이는 대신에 이곳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위태롭고 험난한 낭떠러지가 많다. 납다도에서 솔무댕이 지나 끝머리끝 사이 해안. 장한철이 청산도에서 20살 과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 곳은 어딜까? 청산도에 도착해 어느정도 몸을 추수린 장한철 일행은 몇칠후 마을 당집에 들리게 되는데 장한철은 그곳에서 자신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만난 소복입은 여인을 발견. 산길을 꼬불꼬불 걸어갔으면 4㎞는 족히 걸었을 일. 책속에 나오는 당촌등을 중심으로 마을을 측정하면 지금의 청산도 당리와의 거리가 그정도 이다. 한여인과의 로멘스를 삽입한 장한철 표해록이야 말로 청산도와 강진의 남포에서 다시 살아나야할 금자탑이다. 2011.10.28 '장한철 표해 기적비'.,제막 제주도 애월 한담 바닷가 산책로(갯가길) . ................... ................... 1795년(정조 19년) 윤2월, 2차 구호곡 5천섬.,출발. 곡물을 실은 배들이 제주로 가다가 12척 중 5척이 침몰. 800리 머나먼 제주 바닷길도 풍랑으로 끊겨 고립된.,제주도.
그해에는 곡창 전라도에서도 가뭄으로 흉년. 망망대해 속에 고립되어 '죽음의 섬'이 된.,제주. 텅빈 객주에 앉아 이러한 광경들을 목격한., 김만덕.
구휼미 운반비가 곡물 가격보다 많이 드는.,제주. 전국적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많아 조정에서 내려오는 구휼미를 더 이상 기대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
제주목 관아 소속의 관기에서 주막을 열어 의술을 펼친 의녀로 그후 또 다시 거상으로 거듭난 김만덕.
'내가 지금까지 돈을 번 까닭이 무엇이던가?' '나에게 돈벌게 해준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었던가?' '이들이 이대로 모두 죽는다면 내가 무슨 수로 살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보릿고개가 다가오는 제주에 펼쳐진 굶주림의 참상. 김만덕은 재물을 처분하여 급히 1000량을 마련하였다.
곡물을 사기 위해 풍랑 속에 배를 띄워 강진으로 건너가게 한다.
강진 상단을 통해 구입한 곡물을 제주까지 무사히 실어나르기 위하여 자신이 소유한 배를 풍랑 속에 띄운 것.
김만덕은 객주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며 곡물을 실은 배가 무사히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마침, 하늘이 도와 배가 무사히 제주로 돌아왔다.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뚫고 고래등 같은 풍랑을 헤치고 돌아온.,곡물 배.' 김만덕의 눈에서 안도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천금을 들여 구입한 곡물 500 석 중에서 50석은 친척과 은혜 입은 이들을 우선 살리고, 450석은 관가에 보내 도민 구호곡으로 내놓는다.
이때 제주 내 곡물 가격은 육지의 곡물 시세보다 10배였다.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구호곡.
부황(浮黃)난 도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제주목 관청 뜰로 구름 같이 몰려 들었다. 관아에서는 완급을 조절하여 나누어 주었다.
1794년 (정조18년) 갑인년에는 흉년으로 아사. 1795년 이듬해에는 각종 질병 및 돌림병으로 병사. 제주도민 10만 중 3만 인구가 굶어죽고 병걸려 죽었다.
굶주림이 질병을 낳고 병자의 시신이 돌림병을 낳고 흉년이 아사(餓死)를 낳는 악순환
"갑인년에도 마실 물은 남았당." "갑인년 흉년에도 살아 남을 사람." 고난의 대명사 "갑인년."이.,1794년.
그때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낸 곡물이 김만덕이 사재을 털어 마련했던 구호곡이며 갑인년 보리고개를 무사히 넘기게한 식량이다. ................. ................. 2011.1.21 강진신문 '전남∼제주 간 항로' 개설이 불붙고 있다.
목포· 완도· 고흥· 장흥 등 4곳에서 제주 간 카페리호를 운항하고 있는 가운데 강진에 이어 해남, 여수 등 신규항로 개설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각 자치단체가 제주항로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막대한 경제적 효과 때문이다. 전남도에 따르면 현재 목포, 완도, 고흥, 장흥 등 4곳에서 8척의 배가 하루 9차례 제주를 오가는 뱃길이 지난해 말 150만명 돌파, 이는 2009년 123만명 보다 30%, 그리고, 2005년(85만 명)보다는 2배 가량이 늘어난 수치다. 사상 처음 700만 명을 넘어섰는데 그중 22%가 전남에서 뱃길을 이용. 특히, 2010년 8월 장흥 노력도~제주 성산포항 운항 중인 오렌지호가 지난해 30만명에 가까운 승객 유치로 제주뱃길 성공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제주 관광객 700만명 중 선박 여객이 22%. 앞으로 편안하고 빠른 뱃길이 많이 생기면 제주방문 뱃길 관광객이 훨씬 늘어난다는 판단.
배가 항만으로 들어오면 항만 이용료가 발생, 이를 하역하는 근로자들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또 화물을 야적해 놓을 땅이 필요할 것이고, 이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다수 필요하게 된다. 오렌지호는 장흥에 하루 2천명 유동인구를 발생.
장흥군이 거둬들인 세외수입이 지난해 말까지 2억원에 달하고, 식당가와 풍물시장, 주유소 등이 벌어 들이는 직·간접적 수익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대형 컨테이너 하나를 하역할 경우 자동차 한대를 수출하는 이익에 버금가는 부가가치 창출된다는 보고. 오늘날은 자유시장경쟁 체계인 만큼 각 회사들이 노선 경쟁을 벌이고 있으나 조선시대 도회지라 해서 강진과 해남, 영암이 1년씩 돌아가며 제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었다. ('耽羅誌草本' 濟州舊例條) 도회관 주석에 다음과 같은 설명. 신구영송의지지, 월령진상의 수운 및 공엽의 왕래 담당, 상인이 제주도에 들어오는 경우에는 도회관의 공문이 있어야만 비로소 바다를 건너는 일이 허락된다' '제주 세고을의 수령과 사신이 왕래할 때에 강진, 해남, 영암이 도회를 나누어 정해서 각 1년씩 돌아가면서 거행한다'고 했다. "강진·해남 두 현은 모두 바다에 있다. 무릇 제주를 왕래하는 공행(公行)은 반드시 여기에 와서 배를 탄다. 해남은 관두량(館頭梁)이고 강진은 백도도(白道島), 영암 이진포(해남 북평면 이진리)가 강진과 서로 붙어있어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세 곳에 모인다. 매년 강진. 해남 양읍(兩邑)에서 모여 관섭(菅攝) 호송하는 일을 윤번을 정한다."고 적었다. ................................... 후풍처(候風處)가 있었다.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돛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서는 북풍이나 북동풍이 불어야 했기 때문에 후풍처에서 기다리며 적당한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제주로 들어가는 중간에 후풍처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진에서 51㎞ 떨어져 있는 완도군 소안도에 가면 재미있는 비석이 두개 세워져 있다. 면소재지라고 할 수 있는 비자리 입구에 있기 때문에 소안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볼 수 있는 비석이다. (濟州牧使白公樂淵永世不忘碑)'이고, 하나는 '(제주목사심공연택영세불망비 (濟州牧使沈公賢澤永世不忘碑)'이다. 심연택은 고종 20년 5월부터 21년 12월까지 제주목사로 재임한 사람이다. 이들의 영세불망비가 비자리에 세워진 것은 그들이 소안도에 제주와 육지간에 선박 기항지를 두게해서 소안도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으로 소안도 주민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건립한 것이라 한다. 소안도는 이들 현감 때문이었는지 조선후기 제주와 육지를 잇는 대표적인 길목 역할을 하게 된다. 후풍처(候風處)를 말하는 것이다. 강진의 남당포나 해남의 관두량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뱃길은 섬과 섬 사이를 따라 온다. 이 일대는 뱃길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날이 저물다 싶으면 언제든지 가까운 섬으로 피신하면 그만이었다. 과거 바람에 의지해 풍선을 타고 제주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바람이 불면 보길도나 소안도에 잠시 쉬면서 좋은 바람을 기다렸다. 옛말로 후풍처(候風處)란 곳이다. 지금은 청별항이 보길도 주항이지만 예전에는 청별항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황혼포구가 거대한 포구였다. 1970년대 후반에 생겨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목포에서 배가 다녔고, 조선시대 때에는 강진의 남포나, 해남 화산면의 관동리 관두포, 해남 북평면 이진(조선시대 영암) 등에서 출발해 중간에 보길도나 소안도 등을 거쳐갔다. 날씨가 좋으면 당일에 제주에 도착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보길도나 소안도에서 하루 이틀 묵어 갈 때가 많았다. 제주와 호남의 해양교류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과거 항해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목측항해.
다시 말해 뱃사람들이 목적지를 눈으로 보면서 배를 몰던 방법이 일상적. 이 섬 저 섬을 보면서 도착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이자, 이곳에 도착하면 추자도가 눈에 잡힐 듯 들어왔다.
추자도에서는 다시 제주도가 보이는 곳이어서 제주도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길목으로 자리 잡았다. 가장 가까운 유인도. 직선거리로 18㎞다. 그 사이에 바다가 있다.
보길도 보옥마을은 보길도 최남단 지역이면서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제주도~추자도~보길도 거리가 73㎞. 이곳에서 제주와 연결하는 해저터널 추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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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남해안의 항구 및 포구
곳곳에서 제주행 항로 개설을 추진.
현재, 장흥 노력항에서 제주항을 오가는 오렌지호는
승객 500명과 차량 60여대를 실을 수 있는 규모이고,
'마량항~ 제주항' 쾌속선은 탑승객 200명 1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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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만 남쪽 끝자락
미항으로 알려진., 마량항.
마량(馬良)
강진 마량항
마량항
마량항은 항구의 아름다움과 활력이 넘치는 곳.
강진 읍내에서 마량항까지 강진만을 따라 이어지는
23번 국도는 풍광이 아름답고 즐길거리도 제법 많다.
23번 국도를 따라
마량항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자
고려청자와
제주마들이
오가던.,관문
오늘날.,마량항.
마량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탐진은 강진 옛지명.
탐진현으로 불리우다가
강진현으로 바뀐 조선시대.
탐진은 탐라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
배가 마량항 인근 구강포에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탐라로 가는 해상교통 관문.
그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칠량면 등
강진만 일대에서 만든 고려청자를 개성까지
실어나르던 500km 뱃길 시작점이었고, 조선시대
제주에서 실려 온 제주마들이 육지에 첫발을 디딘 곳.
탐라에서 뱃길을 따라 실려 온 말들이 뭍에 처음 내려서
먹이를 먹었던 곳이라 하여 마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마량 말들은 일정기간 육지적응 훈련 후 한양으로 옮겨졌다.
마량항 인근에 말들이 쉬어 가던
쉼터가 있는 신마마을이 자리했다.
마량항은 2006년 전국 최초로 ‘어촌어항
복합공간 조성사업’에 선정되며 관광미항.
기존의 한적한 포구의 개념에서 벗어나 어촌의
삶과 휴양, 관광개념이 조화된 다기능 어항을 추구.
마량항은 동․중․하 3 방파제와 수협위판장,
수산물판매센터 등 다양한 즐길거리와 함께
활력 넘치는 항구의 풍경이 펼쳐진다. 도로 따라
20여 곳 횟집이 성업 중이어서 활어를 맛보기 제격.
마량항 방파제는 생동감 있는 친수공간.
생동감을 주제로 동․중․하 방파제가 각각
생(生), 동(動), 감(感)의 공간으로 나뉜다.
마량항 오른쪽 생(生)의 공간으로 조성된 중방파제는
소나무동산을 시작으로 시가 있는 광장, 꼬막 광장,
푸른 용 열주 등 다양한 테마 공간을 비롯.
파도벤치와 물고기벤치 등 휴식 공간,
까막섬이 바라다 보이는 조망시설.
320m에 이르는 방파제 끝에는 하얀등대.
가운데에 있는 하방파제는 동(動)의 공간으로
방파제 끝자락에 지름 36m 원형 잔교를 설치했다.
3월부터 10월까지 이곳에서 매주 토요음악회가 열린다.
고금대교가 바라다 보이는 동방파제는
감(感)의 공간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서 낚시와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강진군 끝자락에 있는 마량항은
관광미항으로서 여행객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갖춘 곳.
낚시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방파제가 있고,
마량항 뒤편의 북산공원은 수려한 마량항과
주변 섬들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 역할
고금도로 이어지는 고금대교를 건너
고금도. 약산도 섬여행을 즐길 수 있다.
마량항으로 이어지는 23번 국도 풍경
탐진강 물줄기가 바다로 들어서면
차진 갯벌이 가득한 강진만이 펼쳐진다.
풍요로운 강진만을 따라가는 23번 국도는
한국의 나폴리를 꿈꾸는 아름다운 항구,
마량항으로 이어져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강진 읍내에서 강진만의 바다를 만나려면
옹기로 유명한 칠량면을 지나야 한다.
23번 국도는 매지리공원을 지나
한 굽이 크게 올라서는데,
이때부터 강진만의 차진 갯벌과
바다가 여과 없이 펼쳐진다.
고갯마루 우측에 있는
작은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강진만의 풍경은 더없이 고즈넉하다.
해질 무렵이면 갯벌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장관.
정자를 지나면 강진만 가운데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가우도가 금세 눈에 들어온다.
가우도는 소의 멍에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진에 있는 8개의 섬 가운데
가우도는 유일한 유인도이다.
몇해전 다리가 놓여 마량으로 가는
여행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일명 ‘가우도 출렁다리’430m
차가 다닐 수 없는 인도교다.
이 다리를 건너 숲을 지나면
13가구가 모여 사는 가우도마을
이곳 가우도 바다 건너편 망호마을.
또 하나의 출렁다리가 생긴다고 한다.
가우도를 지나면
강진만의 풍요로운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하저, 백사, 서중
어촌체험마을이 차례로 이어진다.
물때가 맞으면
조개잡이 체험을
즐겨보는 것도 좋다.
가우도에서 하저마을을 지나면
고바우 상록공원으로 불리는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
이곳에 서면 강진만과 건너편
도암면, 신전면 일대가 보인다.
고바우 상록공원 지나면 해안도로.
갯벌을 따라 한적하게 걷기 좋다.
미산마을 지나 백사마을까지 4km.
마량항 입구에는 조선 태종 때 마도진이 설치됐던 곳으로
만호성 성터가 마량항 뒷산인 북산 자락따라 이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마량항에서 바라다 보이는 고금도에 머물렀다.
마량항을 통해 인력과 군량미를 조달했고,
거북선이 상시 정박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만호성 건너편으로 후박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상록수림이 우거져 천연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된 까막섬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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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7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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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은
'고려~조선'시대 1000년 동안
전라·경상도 지역에서 거둔 세곡과
화물을 실은 배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또한 명량대첩(1597년)이 일어났던 울돌목에서
남동쪽으로 4㎞ 떨어져 전쟁 유물이 다수 발견된다.
2017년 8월, 진도 명량대첩로.,해역 발굴작업이 한창.
지난 2012년부터 연차적으로 발굴조사 시작.
올해 5차 작업(5월18일~11월2일)을 시행 중.
지난해 4차 조사까지는 조선시대 개인화기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 석 점을 비롯해
토기, 도자기 등 다양한 유물 790여점이 나왔다.
노경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36)는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은 인근 명량해전의 울돌목과
가까운 거리에 있고, 주변 벽파항은 해남, 진도, 제주를
잇는 중간 교두보 역할을 했다. 전라도에서 개경으로
올라가기 위한 중요한 길목이었다”고 설명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올해 5차 발굴조사에서
8월 현재까지 약 60여점 가량의 유물을 추가로 확인.
노경정 학예연구사 - “60점 중 40여점은 고려청자다.
나머지 중 닻돌(anchor), 백자도 일부 나왔다. 진도에서
개경으로 진상된 특산품 중 녹각(사슴뿔)도 한 점 발견됐다”.
울돌목 이 해역은
조류가 빠르게 흘러
수많은 배가 난파됐다.
하지만 해상 지름길이라 위험을 감수했다.
선사시대 이래 현재까지 많은 배가 끊임없이
왕래하는 서해안 해상항로의 주요 길목이다.
2017년 조사에서는 처음
수중초음파카메라 도입.
노 연구사 - “초음파 장비 사용 자체가 처음.
일단 수중으로 들어가면 시야가 굉장히 어둡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장비다. "
"초음파를 쏴 전방에 보이지 않는
형태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수중초음파카메라 착용 수중발굴조사원 사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
수중촬영이나 실측은
연구사들이 직접 수행.
경력 10년째인 노 연구사
“수중발굴은
바다의 환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물때에 따라 일한다.
열흘 연속작업후 4~5일 쉰다.
진도 현장은 특히 변수가 많다.
조사를 원해도 바다가 허락지 않으면 안 된다.
비는 상관없지만, 바람과 태풍에 영향이 많은 편
산업잠수만큼 위험한건 아니지만, 안전이 최우선.”.
향후 연구는 과거 해상전투 흔적확에 초점을 둔다.
사실 발굴조사 자체가 고선박 발견을 위한 것이다.
“과거에도 물살이 심해 침몰사고가 종종 있었다.
그와 관련해 지금까지는 고려청자가 많이 발견된다.
궁극적으로 이곳의 ‘집중매장처’를 찾고, 과거 명량해전,
벽파진해전 등 임진왜란 침몰선 발굴을 기대”.- 노 연구사 -
이번 5차 조사결과는 11월 22일까지 자체보고서를 작성.
5차 발굴조사의 최종 결과 보고서는 내년에 종합해 발간.
한편, 현재 전라남도 목포시에 위치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에서는
‘바다에서 건져낸 향기, 청자향로’ 테마전을 열고 있다.
올해 세 번째 테마전 지난 1일 문을 열어 내달 17일까지 진행.
보령 원산도, 태안 대섬,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
등에서 발굴한 청자향로 일곱 점을 공개한다.
.............맹골수도(孟骨水道).......................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수도(水道).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이 해상에서 침몰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라남도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 울돌목 다음으로 조류가 빠른 수도(바닷길)라고
세월호 사건후 미디어 보도를 통해 알려졌지만 이는 과장보도.
실제로는.,울돌목.
'장죽수도'에 이어
맹골수도(孟骨水道)
순위 역시 주요 수로 만을 고려한 것이고
전국 물길을 포함한 조사라고는 볼 수 없다.
맹골수도는 최대 6노트.,물살.
해상사고 위험이 많아 주의구간.
항해자들은 사전에 조류정보를 확인.
'항해 안전'에 주의해야 하는 구간이다.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맹골수도
이 해역은 황해를 통과하는 주요 항로다.
'인천 ~ 남해' 여객. 선박이 주로 이용한다.
1일 평균 수백척이 통과하는 해역이다.
항로로 이용되는 수도로서 깊이 30m up.
암초를 위시한, '항해 장애물'은 없다.
2002년부터 10년간 맹골수도 인근 해상
해난사고 58건 중 선박충돌 사고.,38건.
전복과 좌초도 각각 6건씩 기록되었다.
2009년 7월 국토해양부가 공개한 맹골수도 조류 에너지 밀도는
15.1 MWh/㎡로서 울돌목과 교동수로 다음으로 높다. 이런 이유로
인근 장죽수도와 맹골수도 일대에 조류 발전단지 조성계획이 추진.
범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길이 6 km, 폭 4.5km 수도'
.
맹골수도라는 이름은 맹골도(孟骨島)에서 유래하였다.
맹수처럼 거칠고 빠른 물살에서 유래된.,맹골도와 거차도.
"맹골도는 '맹수처럼 아주 사나운 바다에 떠 있는 섬' 뜻말."
"'매응골도(每鷹骨島)"라고 불렸던.,맹골수도.
1789년 조선 시대 인구조사 때 섬 주변에 뾰족한
바위가 많아 맹골도로 개칭, 거차도는 '거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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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9
2016.10.12. 목포.,특화산업 무역항 개발 계획
2017.03.26
세월호'팽목항'이 아닌.,
목포신항으로
2017.3.26
2017.3.27 목포신항 부근
세월호 선체 감시계
2017.3.31., 1081일 끝에 마지막 항해
2017.03.31
2017.4.4. 목포항에 인양된.,세월호
2017.4.7 목포신항.
2014.04.16
진도대교
2014.5.3 팽목항
2014.5.3 팽목항.
2014.5.5. 팽목항
2015.4.14 팽목항
2015.4.16
2015.4.24 팽목항.
2016.4.17 팽목항.
2016.4.17 팽목항..세월호 사고 2주기.
2016.4.19
2010.11.04., 진도의 기적
2017.3.10. 헌법재판소 탄핵 판결.
진도
예향진도 상모놀이
2017.3.10 헌재 판결 직후에
팽목항으로.,달려간.,문재인.
2017.3.10 팽목항
2017.3.11 팽목항.
2017.3.17 헌재 탄핵 판결에 항의하는 박사모
2017.3.26 팽목항 세월호
2017.4.19 팽목항 세월호 사고 3주기
2013.06.18 진도항
2013.07.02
....................진도(팽목)항.......................
진도(팽목)항은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는 항구로,
1996년 12월 해양수산부에 연안항 지정 신청을 내어
1998년 2월 해양수산부로부터 연안항 지정고시 받았다.
이후 연안항으로서 해양수산부 관리를 받아
진도군 항만건설에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동안 진도군은 섬에 걸맞은 항구를 갖추지 못했으나
연안항 지정, 개발되며 항구다운 항구를 갖추게된 진도항
과거에는 목포에서 팽목을 걸쳐
제주도를 연결하는 항구였으며,
현재는 진도 근해에 있는 섬, 특히
팽목과 조도를 잇는 항로의 출발지.
진도항
2017.08.22
'진도항 ~조도 창유항' 차도선
진도 씻김굿
진도만가 - 상여소리
진도 동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