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한 까닭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9:26,27,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찬송가 323장(부름받아 나선 이 몸), 435장(나의 영원하신 기업)
사도 바울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을 뵈었고 이방인의 사도의 직임을 부여받고 오랫동안 영적인 달음질을 달려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 부름을 받은 뒤 성령의 능력을 크게 받아 얼마나 크게 쓰임을 받았는가 하면, 심지어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에게나 귀신 들린 자에게 갖다 얹으면 병이 깨끗이 낫는 정도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영적 비밀을 깨달았으며, 심지어 환상 중에 셋째 하늘에 불려가서 가히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말들을 듣고 보고 오기까지 할 정도로 영적인 은혜가 컸습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의 교회들을 세운 지역은 키프로스, 터어키 전역, 그리스 전역, 지금의 체코 지방, 로마 시, 크레타 섬 등지에 이르기까지 심히 광대한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수만, 수십만 명이 복음을 듣고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크게 쓰임받고 성령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사도 바울은 늘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지극히 작은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여겼습니다. 나아가 죄인들 중에 으뜸 된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읽은 그대로 그는 늘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는 남을 치는 데 힘쓰지 아니하고 자기를 치는 데 힘쓰곤 했습니다. 이는 수많은 영적 성과를 내어 많은 영혼을 건지고 많은 교회를 세우고 놀라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드러내는 등 큰 성과를 거둔다 해도 결국 겸손하지 아니하면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원의 길로 이끌어놓고 자기는 도리어 버림을 당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은 교만하기 쉬운 존재요 교만의 끝은 언제나 누구나 예외없이 패망의 길로 나아갑니다. 인간이 얼마나 교만하기 쉬운지, 그렇게 깊게 성령의 은혜를 경험했던 사도 바울조차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그를 아끼고 사랑하시기에 그에게 사탄의 가시를 심어놓았지 않습니까?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가시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7~9)
성령의 사람 사도 바울조차도 하나님께서 그 육체에 일부러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허락하시고 세 번이나 빼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뽑아주시지 않을 만큼 인간은 고집불통 교만덩어리인 것입니다. 천하에 다시 없는 성령의 사람, 성령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아오며, 천국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온 사람일지라도, 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크게 쓰임받고 많은 성과를 이루고 성령께 붙잡혀 쓰임받게 될 때 다가오는 그 영광의 무게를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깊은 감동과 감화 속에 살아온 사도 바울마저 이 세상에서 영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기에 심지어 자비롭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사탄의 가시까지 그 몸에 박히도록 하시고 빼주지 아니할 정도일진대, 우리들은 얼마나 쉽게 교만하겠고 얼마나 변질되기 쉽겠습니까? 영적인 영광도 그러할진대, 세상 영광의 무게는 더더욱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 살아가는 동안 작은 일에도 교만하기 쉽고 작은 성과에도 변질되고 싶기에, 사도 바울이 그토록 추구한 겸손의 덕을 우리도 역시 최선을 다하여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스스로 교만하며 스스로 부패하기 너무나 쉬운 존재임을 명심하고 항상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하기를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나 몸에 사탄의 가시를 이미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가시로 인하여 괴롭고 힘들어서 빼내주기를 많이 간구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괴롭고 힘들어서 빼내고 싶은 그것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겸손해지고 교만이 부서져서 여전히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나마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지금까지 쓰임받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해지는 데 보탬이 되기만 한다면 그 어떤 것이든, 어떤 일이든 그것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 또 겸손한 자만이 성령의 은혜를 계속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한 자만이 더 큰 영광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 큰 영광의 무게를 견뎌야 했기에 참으로 크고 험악한 가시가 필요했고, 우리들은 작은 영광의 무게를 견뎌야 하기에 작은 가시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우리는 끝까지 주님 붙들 수만 있다면,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면, 저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중에는 주님 손에 쓰임받다가 나중에 버림당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세월이 갈수록 자신을 치고 또 쳐서 겸손 또 겸손하여 이 땅에서 수고한 모든 것을 인하여 장차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복된 상을 다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겸손의 분량만큼 은혜의 무게를 견디며, 겸손의 분량만큼 영광의 무게를 견딤을 깨달았나이다. 주여, 우리에게 자신을 쳐서 늘 복종케 하며 주님이 주신 가시조차 감사하며 모든 고난과 연약함에도 감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월이 갈수록 겸손이 깊어져서 쓰임받다가 버림당하지 않고 더욱더 쓰임받다가 주님 만나는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