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72
10월8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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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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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DWIje3aV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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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중에 가장 으뜸인 분은 성모님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명설교를 펼치고 계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율법학자들이나 유다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하고 속 보이는 설교와는 완전 비교 대조되는 예수님의 명쾌하고 감동적인 설교에 사람들은 탄복합니다.
그중에 한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한참 설교를 하고 계시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복음 11장 27절)
이 말은 예수님을 칭송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토록 훌륭하신 예수님을 낳고 기르신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 성모님을 향한 여인의 칭송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꽤나 의외입니다.
저 같았으면 극도의 칭찬 앞에 그랬을 겁니다.
“맞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의 어머니 정말 지금 행복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 낳고 키우시느라 고생도 많이 하셨습니다. 정말 제가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을 향해 여인이 보인 존경심과 예의를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분은 다름 아닌 성모님이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성모님보다 더 맑은 정신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깊이 새겨듣고 철저하게 준수해나가던 사람들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모님께서는 열 달 동안 ‘말씀’을 당신의 태중에 모시고 다녔고, 30년 세월 동안 그 ‘말씀’ 곁에서 생활하셨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것뿐만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성모님보다 더 전문가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군중들 가운에 한 여인의 칭송과 찬미에 가장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성모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과 공경은 덧붙인 예수님의 말씀으로 더 명확히 인증된 것입니다.
보다 지속적이고 영원한 행복, 보다 가치 있는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지 또 다시 고민을 시작해봐야겠습니다.
때로 불나방처럼, 때로 철새처럼 여기저기 세상 속의 행복을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어디 가도 우리의 끝도 없는 갈증을 완벽히 해소해주는 그런 행복, 우리의 공허한 마음을 충만히 채워주는 그런 행복은 없더군요.
다행히도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조금만 손을 뻗으면 참 행복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보고인 성경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지인 성사입니다. 우리의 눈이 좀 더 밝아지고, 우리의 마음이 좀 더 개방되어 그 값진 행복을 알아보고, 찾고, 만끽하는 그런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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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꼭 망해봐야 하는 이유>
얼마 전 김미경 강사가 ‘어쩌다 어른’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TV 강연을 하였습니다. 꿈을 꾸라, 꿈은 오늘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도 매일매일에 충실하다 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는 식의 강연을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논문표절의 시비에 9시 뉴스에까지 나오며 그녀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강사가 아닌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꾸었던 꿈속의 유명강사 김미경이 본래의 자신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지금의 김미경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사랑받아야 할 바로 자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김 강사는 그 순간을 “만났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사로서의 꾸며진 이상적인 자신만을 원하면서 어느 순간 놓쳐버렸던 그래서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고 만나기조차 낯설고 두려운 참 자기 자신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힘이 생겼다고 하고 강의 요청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데도 행복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꿈을 좇으라는 말을 한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말하며, 먼저 참 자기 자신을 만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만나려면 반드시, 반드시 “망해야 한다!”라고 덧붙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보지 않고서는 지금의 자기 모습에 취해 참 자신을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망해서 완전히 다 잃어봐야 자신이 만들지 않은 순수한 참 자신을 만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꼭 망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이 걸려, 그래서 아름다운 몸매도, 얼굴도 모두 잃어버린 샤론스톤의 예를 들면서 그녀도 “만났구나!”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잃은 그녀도 지금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감촉을 느끼는 등, 사용해보지 않은 감각들을 느끼며 행복해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꼭 망해봐야 참 소중한 순수한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율법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게 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을 통해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에덴동산을 불칼로 막으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는 생명나무까지 다다를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불을 통과할 수 있는 방화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방화복이신 주님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를 입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은 구약부터 있었던 율법입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라고 말하듯이 인간을 불로 둘러싸이게 만들어 유일하게 그 불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그리스도의 피를 갈구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 불을 통과해보겠다고 율법에 목숨을 거는 일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스스로는 그 불을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입음으로써만 그 율법의 불칼을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커룹 천사들이 그려져 있던 성전의 휘장은 그리스도의 심장이 꿰뚫릴 때 찢어졌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입음으로써만 그 뜨거운 율법의 저주를 뚫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떻게 잘 지켰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입었는지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기에, 우리는 남들이 법을 지키든 안 지키든 판단할 처지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건 그리스도를 입는 믿음만 생긴다면 그 사람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성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입음으로써 그렇게 변화되었기에 이 믿음으로 얻어지는 구원의 신비를 끊임없이 설파하는 것입니다.
망하기 전 김미경 강사는 세속적인 성공만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서 망해보라고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반드시 욥과 같이 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그런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어 그리스도께만 희망을 두게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넘어서 보겠다고 노력하다가 결국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참 좋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될 때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꼭 붙어 있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의 열매가 자신 안에 맺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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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아메리카 드림(America Dream)'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국은 기회의 땅, 축복의 땅, 평등의 땅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왔고, 공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지금도 중남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 드림을 이루기 위해서 미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입국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단순히 여행을 하려면 '이스타(ESTA)'를 신청하면 됩니다.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면 3개월간 미국에서 지낼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제도입니다. 좀 더 오래 있기 위해서는 ’비자(VISA)'를 받아야 합니다. 비자는 목적에 따라서 종류가 많습니다. 사제들은 종교비자를 받아서 미국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신문사에 있기 때문에 언론인 비자를 받아서 왔습니다. 이스타나 비자는 정해진 날만큼 미국에 머물 수 있는 제도입니다.
미국에 더 오래 장기간 머물기 위해서는 ‘영주권(PERMANENT RESIDENT)'을 신청하면 됩니다. 미국 정부는 서류심사를 거쳐서 영주권을 발급해 줍니다. 영주권을 받으면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권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주권자가 되면 정부가 후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보장, 메디케어 및 추가 보장 소득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주권은 또한 비자보다 훨씬 적은 노동 제한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영주권으로 캠퍼스 밖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주권을 받으면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책임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을 '의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주권자로서 미국에서 살아갈 때 중요한 것은 속해 있는 지역사회를 이해하고 그 지역사회의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문화, 역사, 정부에 대해서도 배우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알려주는 신앙인의 의무와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는 다짐과 결심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기차는 연결된 객차가 많아도 늘 같은 방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피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단순한 가족의 틀을 벗어버리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성이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지만, 우리를 모두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조직화하고, 나누고, 이방인들과 구별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사이에 놓여있는 장애물들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지연, 학연, 계층, 이념’의 벽을 허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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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하고 있다. 부인의 찬사는 우선은 예수님을 두고 한 것으로, 바로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찬사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하신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모두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혈연관계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복되기도 하시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복되시다는 뜻이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으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뵐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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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가르침에 탄복한 어떤 여인이 이렇게 외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어떤 대상의 일부분으로 그 전체를 지칭하는 수사적 표현을 제유법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을 배었던 ‘모태’(부분)와 젖을 먹인 ‘가슴’(부분)은 바로 그분의 ‘어머니’(전체)이신 성모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처럼 훌륭한 분을 낳아 기르신 성모님이야말로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칭송하는 것입니다.
군중 속 여인의 찬사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8). 엘리사벳도 성모님을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된”(1,42) 분으로 칭송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행복한 분으로 여긴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성모님께서 행복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1,38 참조)
오늘 예수님께서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뿐만 아니라 성모님처럼 하느님 말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행동으로 옮기는 모든 이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단언하신 바 있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따라서 날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일이 우리 신앙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성모님처럼 행복한 이로 칭찬을 받고, 또 성모님처럼 예수님께 가장 가까운 이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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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신자분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사목회장을 10년 동안 하였습니다.”, “소공동체 구역장, 교리 교사, 사목회 임원 등 본당에서 안 맡아 본 직책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분들을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직책이 신앙의 성숙도를 알려 주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직책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제복을 입고서, 수도복을 입고서, 교회 안에서의 어떤 직함을 가슴에 달고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 속의 한 여자가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사람들 눈에는 대단한 가치일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치가 있는 것은 당신 말씀에 ‘충실히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 한 가지뿐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그 많은 이들 가운데 하느님 말씀에 가장 충실히 순종하셨습니다.
교회가 성모님을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분께서 그저 예수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듣고 지키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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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던 한 여인은 감동하며, “예수님의 어머니는 얼마나 행복한 분일까?” 하고 부러워합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키우는 어머니의 행복과 그 아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때의 찬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혈육의 끈끈한 정과 사랑, 자녀의 성공에 대한 보람은 여인이 바치는 헌신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더 큰 차원의 행복을 알려 주십니다. 육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영의 기쁨을 얻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행복을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성모님께서 가지신 진정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처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하여 죽음의 형벌을 받을 뻔하였으며 이집트의 피난살이를 한 여인,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본 여인은 세속적으로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모님의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여 사람이 되도록 간택된 신약의 궤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모든 사건과 행적을 보시며, 하느님 구원의 성취를 마음에 새기시고 지켜보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행복은 예수님과 함께 수난에 참여하시며, 예수님 부활의 영광에 처음으로 참여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인의 행복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입은 것”으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이 세상의 화려한 명품 옷을 입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입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행복합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처럼 불멸의 몸으로 변화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는 신앙인이기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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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그리스도 신앙이 유다인들의 선민의식과 율법 신앙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킨 힘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율법 준수를 통해 약속된 하느님 나라와 구원의 길이 선택된 자신들에게만 주어졌다는 편견을 가졌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창조 이래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당신 백성으로 초대하신다고 확신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하느님 나라의 위대한 보편성을,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라는 감동적인 고백으로 선포합니다. 분열의 고통과 따돌림의 상처를 지닌 이들이 왜 예수님 안에서 치유와 자유를 체험하게 되었는지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지구촌, 세계화’란 이름으로 하나의 인류를 꿈꾸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숨겨진 특권 의식과 선민의식으로 사로잡힌 세상을 만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 시대를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을 벗어나지 못한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 “돈에 대한 물신주의”가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를 만들어 내고, 인간을 “소비욕의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53-54항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는 한 여인의 탄복은, 성모님이 살아 계실 때부터 이미 주님의 어머니로 칭송받으셨음을 드러내는 대목이지만, 언뜻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을 토로하는 우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나보다 나은 이를 칭송하기보다 질시와 분노를 앞세우는 모순된 이 세상에 묻힌 또 다른 나의 얼굴이 아닐까 되돌아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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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한 사람>
루카 11,27-28 (참행복)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한 사람>
자녀가
탐욕스레 가지기보다
아낌없이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그 어머니가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자녀가
자신을 위한 높은 자리보다
모두를 위한 낮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그 어머니가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자녀가
으스대며 섬김 받기보다
겸손하게 섬기기를
좋아합니다
그 어머니가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자녀가
힘깨나 쓰는 사람들보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 어머니가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자녀가
제 홀로라도 살기보다
벗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을
좋아합니다
그 어머니가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그 어머니를
행복하다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어머니를
불행하다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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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몇 살이 되어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어떤 여인과 주님 사이의 짧은 대화입니다. 어떤 여인이 성모 마리아가 행복하다고 얘기하자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오히려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은 저를 성찰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오히려 행복하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가 오히려 행복하다.”라는 말씀이라면 나는 진정 이 말씀처럼 행복해하고, 이 말씀을 실천할 것인가? 이런 반성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나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 같은 뜻이지요. 그런데 향기로운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은 저를 풍요롭게 하고 향기나게 하기에 이 말씀은 저는 선뜻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싶지만 하느님 뜻을 실천하라는 말씀은 저의 뜻을 꺾어야 하는 것이기에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억지로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이나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너희는 모두 내게 오라는 주님 말씀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는 주님 말씀은 기껍지 않을 때가 많지요.
실로 저는 삼종 기도를 바칠 때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종종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리고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바꿔 기도하곤 하지만, 의지적인 기도이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닙니다.
공자는 60에 이순耳順하고,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하라고 했는데 60을 넘어 70으로 가는 저는 몇 살이 되어야 아버지 뜻이 내 뜻이고, 내 뜻이 아버지 뜻이 될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 저의 행복이 될지, 다시 말해서, 몇 살이 되어야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여 내 뜻을 꺾는 것이, 전혀 싫지도 괴롭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 행복이 될지,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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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주님을 위해“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해야 하겠습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켰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말씀대로 순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 믿음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한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정오만 되면 성당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오는 노인이 계셨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관리인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말했습니다. “나요, 기도하러 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그저 12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요. 나예요’ 하고 인사만 하고 가는 겁니다.”
얼마 후에 그 노인이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병실에서 밝고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간호사가 그 비결을 여쭤봤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그건 매일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나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오.” 간호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할아버지는 가족도 친지도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매일 오는 사람이 있지.” “그 방문객은 언제 오시나요?” “매일 정오가 되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오시지.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방긋이 웃으면서 한 말씀 하고 바로 돌아가셔.” “뭐라고 하시는데요?” “간단해. ‘여보게, 날세. 나, 예수네!”라고 하지.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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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탁소에 옷을 맡겨서 입을 바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입던 바지가 옷장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혀 맞지 않습니다. 숨 한 번 크게 내쉬면 터져서 커다란 사고가 날 것만 같았습니다. 맞지 않는 이 옷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산 지 10년도 넘은 옷들이라 누구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동네에 있는 헌 옷 수거함 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10년 전에는 분명히 제게 꼭 맞는 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맞지 않게 되었을까요? 옷이 줄어든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옷은 변함이 없었지만, 부끄럽게도 제가 너무 살찐 것입니다. 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부부를 생각해보십시오. 서로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에 부부의 연을 맺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점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화를 내며 상대가 맞지 않는 이유를 말하게 됩니다.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서로 잘 맞으니 친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친구에게 커다란 서운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그 친구와 내가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처음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주님과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 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님과 내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과 더 잘 맞는다는 생각에, 주님을 멀리합니다. 주님이 변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변한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큰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대답하시지요.
하느님을 낳고 키우는 행복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얻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철저하게 하느님 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 맞추는 삶을 살기에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장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한테서 멀어지는 것은 늘 우리의 몫이었습니다. 주님께 멀어지면서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과 우리는 딱 맞습니다. 너무 잘 맞아서 영원히 함께해야 할 분입니다. 주님의 품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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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행복의 발견과 선택>
-말씀의 경청, 실천, 믿음-
"주님,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오늘 복음은 참 짧습니다. 단 두절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주제를 보는 순간 참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참행복’ 누구나 소망하는 바, 참행복한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행복한 삶은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우리말 어법이 재미있습니다. ‘참(진;眞)’이 들어가는 말마디가 유난히 많습니다. 참행복, 참기쁨, 참평화, 참사랑, 참믿음, 참사람, 참말 등 ‘참(진실)’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봅니다. 참에 반대가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행복, 거짓 평화, 거짓 희망, 거짓말도 많고 우리가 흔히 겪는 일입니다. 진선미眞善美중 가장 앞서 나오는 참 진眞입니다. 무엇이 참행복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명쾌하게 밝혀 주십니다. 거짓 행복이 아니라 참행복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평화이듯 세상이 줄 수 없는 참행복입니다. 일시적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참행복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참행복한 삶에로 이끌어 줍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기적과 더불어 논쟁에서의 통쾌한 승리를 목격한 군중들중 어떤 여자가 부러움 가득한 심정으로 큰소리로 말합니다. 세상 어머니들의 공통적 심사의 반영일 것입니다. 어떤 여자는 예수님을 통해 참행복을 발견한 것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에 대한 최고의 찬사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참행복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오히려’라는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내용인즉 마리아 성모님이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까닭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 가운데 한 분이신 까닭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 성모님의 경청과 겸손, 순종의 실천에 이르는 믿음의 여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평생을 경청과 순종의 믿음으로 사신 성모님은 참행복한 분이셨습니다.
이런 성모님뿐 아니라 누구나에게 열린 참행복입니다. 참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참행복 역시 주님의 은총이자 발견이요, 우리의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의 선택이요 결국은 경청과 실천의 훈련을 통한 참행복의 생활화입니다.
바로 여기서 교회와 수도승 전통이 전하는 바,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수행입니다. “경청-묵상-기도-관상-실천”으로 이뤄지는 렉시오 디비나의 생활화가 참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는 물론 일상의 삶으로 확장됩니다.
이런 말씀의 경청과 순종의 훈련을 통해 비로소 참행복의 실현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기도와 성독, 노동이 균형과 조화를 이른 수도원 일과표의 시스템이 참행복의 생활화를 위한 참 좋은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참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참행복은 부단한 선택입니다. 한 두번 선택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참행복의 원천인 주님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훈련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인 말씀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니 문득 어제 어느 자매가 미사 5대 신청과 더불어 휴대폰에 전해준 아름다운 감동적 부부애夫婦愛 실화 메시지입니다.
“21년째 파킨스 병으로 고생하는 자매입니다. 다행하게도 남편의 사랑하는 때문에 절 버티어 갑니다. 그 자매가 하는 말이 자신은 남편에게 사랑받기위해 태어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남편에게 사랑받기위해 태어났다니 이보다 남편에 대한 큰 찬사와 보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구원받은 참행복한 부부입니다.
이 말마디는 하느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기위해 태어났다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존재이유입니다.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 이사야서 아름다운 말씀도 생각납니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살펴 준다.”(이사43;4ㄱ.5ㄱ)
우리 모두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주님 사랑을 깨달아 갈 때 자존감 높은 삶이요 정체성 또렷한 삶이요,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하느님 사랑이요 말씀에 대한 사랑과 경청, 그리고 실천입니다. 참행복에 이르는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이처럼 참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발견하여 부단한 선택과 더불어 훈련에 달렸음을 봅니다. 새삼 행복은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 있는 행복을 무지로 인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해 놔두고 엉뚱한 밖에서 행복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말씀의 경청과 실천이 참행복과 참믿음의 지름길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수행중에 날로 더해지는 믿음에 참행복한 삶입니다. 이미 세례를 통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세례성사 은총을 끊임없이 강화해주는 성체성사 미사은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게해주는 성체성사의 은총이 참행복의 원천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경청하고 믿고, 일상의 삶에서 실천함으로 하루하루 참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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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행복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1,27-28)은 짧은 복음으로, '참행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참행복'은 육적인 관계 안에 있지 않고, '영적인 관계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8.50)
저는 참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형제도 많고 누이도 많고 어머니도 많기 때문입니다. 2년 전에 나를 낳아 주신 육신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갈라3,22-29)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3,2-28)
'육적인 것에서 얻어지는 행복'은 이 세상 떠날 때에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행복'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행복이며, 이제와 영원히 남아있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행복한 사람들이 됩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가 되어 주고, 누이가 되어 주고, 어머니가 되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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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iH-0tlB2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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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말씀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배웁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행복도 있습니다.
행복은
말씀으로 부터
옵니다.
말씀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상황을
바라 본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우리는 더 절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행복의 참된
가르침이십니다.
매일매일이
말씀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말씀을 통해
철이 들고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말씀의 습관이
감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더없는 행복입니다.
말씀과 가까이
하는 우리의
행복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호흡과 같고
들음은 행복의
시작이며 말씀을
지키는 삶은
가장 가치있는
삶이 됩니다.
말씀이 우리를
돌보고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뼈가 되고
살이 됩니다.
말씀을 먹고사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눈을 공동체로
돌리게 합니다.
말씀이 공동체를
향상시킵니다.
사람과 사람은
말씀으로
서로를 더욱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씀은 행복을
행복은 사람을
향하여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말씀을 듣고
지킬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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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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