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김태준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4. 3:48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한국인물기행 김태준
인기멤버
2024.05.23. 01:11조회 6
댓글 0URL 복사
국문학자 삶 떨치고 공산주의 활동 ‘김태준’(1905~1950)
1950년 6월 초순, 6·25가 일어나기 며칠 전 새벽에 서울근교 수색의 한 숲에서‘상아탑에서 고전만 연구하고 싶었던’한 국문학자가 이적행위 및 간첩행위로 총살형을 당한다.
1930년, 대학생 신분으로 일간지에 <조선소설사>를 연재해 국문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선문학사 연구의 개척자, 많은 지식이들이 친일의 그늘로 전향해가던 40년대초, 경성콤그룹 맹원으로 항일운동의 전위에 섰던 활동가.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 연안까지 험로를 헤쳐나간 혁명가. 해방 뒤 지리산에 입산해 추위와 토벌대에 쫓기는 빨치산을 위로한 남로당 문화부장.
우리 국문학사에 40년 동안 김○준으로 올랐던 김태준이 이처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것은 그의 나이 45살 때였다.
그는 일제가 우리나라를‘보호’하기 시작한 1905년 평북 운산에서 소지주이며 완고한 한문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며‘신동’이란 말을 듣고 자란 그는 15살 되던 해 운산공립보통학교 졸업, 그뒤 1년동안 부친에게서 한문을 수학하고 연변공립농업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리공립농림학교 3학년으로 전교해 졸업하고 1931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지나(중국)문학과를 나온다.
‘조선소설사’신문에 연재
그는 뒷날‘외국문학 전공의 변’이란 글에서 자신의 전공선택에 대해 순전히 한문에 중독된 사대주의자가 가진 완고한 편견에 사로잡혀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졸업 뒤 주로 우리 고전 문학을 연구한다.
명륜전문(현재의 성균관대)에서 그에게 배운 한문학자 이가원(77)씨는“언젠가 그에게‘선생님께서 쓰신 <조선소설사>에 손봐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내가 대학 졸업반 때 일본인들이 우리의 소설사와 한문학사 등을 쓰려고 해 내가 먼저 내야겠다는 마음에서 서두르느라 그런 것’이라고 하셨다"고 증언한다.
경성제대 시절 그는 사회주의 관계 서적을 읽는 독서회인 경제연구회에 참가하기도 하고 잡지 <신흥>(1929. 7~)에 참여하며, 1931년에는 이희승, 조윤제, 김재철 등과 함께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경학원(명륜전문의 전신)의 강사로 취임한다.
그는 대학졸업반인 1930년에 <동아일보>에 국내 최초의 비교문학적 국문학사인‘조선소설사’를 68회에 걸쳐 연재한 것을 시작으로 고전문학, 한문학, 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왕성한 연구에 몰두한다.
조선어문학회판‘조선어문학총서’의 하나로 출간된 <조선소설사>(1933)와 <조선한문학사>(1931)에서는 유물론적·계급투쟁적 시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춘향전>을 높이 평가해“계급을 초월한 사랑이요 세습을 초월한 혁명적 시련” “서민계급의 승리와 계급의식 혹은 인습도덕에 대한 반항과 인물본위 도의관념으로서의 평등사상 고취”라고 <조선소설사>에 쓰고 있다.
고전문학 연구 ‘독보적’
국문학사에 있어서의 그의 위치에 대해 권영민 교수(서울대)는“조선어문학회가 창립되면서 서구의 실증주의를 기초로 한 본격적 국문학 연구가 시작되는데 김태준은 고전문학 연구분야에 있어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라고 평가한다.
또한 최근 그의 <증보조선소설사>(1939)를 현재 쓰이는 말로 고쳐 출간한 박희병 교수(성균관대)는 “고전문학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 그의 <조선소설사>는 고전에 대한 방대하고도 해박한 인용 등으로 하나의‘벽’으로 느낄 정도의 교과서였다”고 토로했다.
경학원과 명륜전문 강사 시절 그는 상당한 용기를 지닌 민족주의자로 기억된다. 1941년 명륜전문 2회로 졸업한 이진영(72.민족문화주진회 교수)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로부터 ‘순자(荀子)’와 국어(일본어)‘ 두 과목을 배웠는데 국어시간에 일본어 몇 마디 하는 외에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 각종 행사가 있을 때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황국신민서사’와 ‘일본국가’를 제창해야 했는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는 <삼국유사>만 가지고 있어도 경찰의 조사를 받을 정도였는데....”
“울부짖는 동포 외면 못해”
이러한 그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이 당시 지식인사회를 풍미하던 사회주의로 옮아간 것은 경성제대 강사시절이었다.
1939년 2월 그는 조선인으로선 매우 이례적으로 교수회를 거쳐 경성제대에서 조선문학 강좌를 담당하는 강사가 된다. 교수가 되기 위해 학위논문을 준비하던 그는 1940년 5월 경성콤그룹의 경남지역 책임자 권우성을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한 민족주의 학자의 삶을 공산주의 활동가의 신산한 삶으로 바꾸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박헌영을 지도자로 당과 대중조직의 건설을 통해 국내 반일 민족해방전선의 핵심 대오를 세우기 위한 경성콤그룹에서 그는 이현상·정태식과 함께 인민전선부에 소속돼 과거 활동가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조직원을 포섭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곧 불어닥친 경성콤그룹 검거선풍 속에서 그도 1941년 1월 9일 체포된다. 그러나 감옥생활을 하던 사이에 그는 노모와 아내 그리고 젖먹이 아이를 잃는다. 이러한 개인적인 불행이 그를 “우리 민족의 원수, 인민의 원수, 가족의 원수인 일제를 동해 밖으로 격퇴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 하늘에 머리를 두고 살 수 없는 복수의 염에 불타게 만든다. 감옥을 나온 그는 직업적 혁명가로 변신한다. 학자로서의 삶은 청산하고 실천가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변을 후일 그는 <연안행>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문학연구니 역사연구니 언어연구니 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의 일이니 당분간 이 방면의 서적은 상자에 넣어서 봉해두자...(중락)... 외계에는 공출, 배급, 징용, 징병에 떨며 울고 있는 수천만 형제자매의 아우성소리·소음이 이 귓불을 치는데, 어느 겨를에 조선문학이니 조선역사니 찾고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는 출옥 뒤 “신사참배를 하라, 기관지 <사상보국>에 글을 쓰라, 일선동조론적 입장에서 조선사를 쓰라”는 등 보호관찰소의 회유·협박과 매일 한차례 “일본 강아지들”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은밀한 조직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때 동지이자 연인인 박진홍을 만난다. 박진홍은 30년대에 공산주의 운동의 전설적인 인물인 이재유와 같이 살았던 여성으로 당시 경성콤그룹사건으로 검거돼 치안유지법 4범의 경력으로 갓 출옥했었다. 뒤에 박진홍은 북한의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다.
“나는 그가 한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렇게 용감하게 싸워왔다는데 무한한 존경을 하게 되었고 그후 몇차례 접촉하는 동안에 그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었다”(<연안행>).
그는 당시 횡적연대를 갖고 싸우던 당재건콤그룹, 공산주의자협의회, 자유와 독립 그룹이 조직원 몇 명이 검거되면서 깨지기 시작하자 박진홍의 집에 숨는다. 이때 공산주의자협의회 안의 군사문제토론회로부터“중국 공산당의 수도 연안에 가서 김일성, 무정 동지들과 함께 국내에 대한 군사대책을 세워보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박진홍과 함께 44년 11월 4일 서울을 출발한다.
경성콤 그룹서 항일투쟁
집과 20여년간 수집해온 고서들을 팔아 여비를 마련하고 경성제대 대학병원 조수였던 사위의 신분증과 조수복으로 위장한 그는 일제와 괴뢰 만주국, 국민당 정부의 군대·경찰의 수십 차례에 걸친 검문을 속여 넘기며 마침내 4개월여 만에 연안에 도착한다.
그는 이때의 여정을 해방 뒤 문학가 동맹의 기관지 <문학>에 <연안행>이라는 제목으로 3차례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당시 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주석 김두봉)의 맹원으로서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주홍성(70·전 연변대 교수)씨는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들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총부에서 특별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별다른 정치·사회활동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조선혁명가를 양성하는 조선혁명군정 학교에서 ‘조선국내 반일투쟁정세’등에 대한 특별강의를 몇차례 한 정도였다.
일제가 투항한 뒤 9월초에서 10월말까지 화북에서 심양에 이르는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행군도중 이들 부부는 적의 잔병들과의 잦은 전투에서 극도의 고난을 이겨내야 했다. 주위에서 말을 탈 것을 권유하자 김 선생은‘앞에서 전사들이 생명을 내걸고 전투를 하는데 내가 어찌 말을 타고 따라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들 부부는 심양에서 독립동맹과 헤어져 45년 11월 하순 해방된 서울에 도착한다. 그뒤 그는 박헌영이 중심이 된 남로당의 문화부장으로 임명된다.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중앙인민위원,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문교부 차관, 문학가동맹 위원, 조선문화단체 총연맹 상임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상임위원 등이 해방공간 김태준의 이름 앞에 붙었던 공식 직함들이다.
미군정에 의해 남로당이 불법화된 뒤 당의 핵심간부 대부분은 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한다. 서울에 남은 그는 지하로 숨는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49년초 ‘문화공작대’로 지리산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지라산들어가 빨치산 위로
문화공작대는 47년 6월 남로당 산하단체인 ‘조선 문화단체 총연맹’이 급조한 조직으로 대민 선무공작의 하나였으나 좌익이 지하로 들어가면서 흐지부지됐다가 여순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에 유격전구가 형성되면서 지리산에 파견된다.
문화공작대에는 유진오, 홍순학, 유호진 등이 포함돼 있었다. 김태준은 지리산에 서울로 돌아와 있던 중 49년 7월 26일 종로에서 서울시경 사찰과에 의해 체포된다. 당시 신문들은 그가 남로당 문화부장과 특수정보부장을 겸하고 있었으며 9월 27일부터 4일동안 유진오, 김지회의 처 조경순 등과 함께 공개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토록 핍진한 삶 속에서도 그는 학문에의 정열을 포기할 수 없었음인지 체포될 때 <고려문학사>의 원고를 몸에 지니고 있었으며 사형을 선고받기 전 최후진술에서 “상아탑에서 고전만 연구하고 싶다”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 김태준|작성자 바람소리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